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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10화 (110/206)

110화

벽에 날아든 화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박살 났다. 조각난 유리 파편과 쏟아진 물이 어지럽게 커다란 방 한편에 널브러졌다.

“감히 이따위 꽃으로 날 기만하려 들어?!”

노기가 형형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아더는 방 가운데 서서 제 역할을 잃은 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대가리가 축 늘어진 꽃은 이미 생을 다한 듯 보였다.

“폐하의 쾌차를 바라는 선물이었을 겁니다.”

“또 순진한 척 내 앞에서 연기를 하는구나, 아더.”

아더는 짙은 피로감이 역력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척척한 바닥에 쓰러진 꽃을 들어 올렸다.

오늘 아침, 황궁으로 병문안을 빙자한 꽃이 날아든 게 화근이었다. 누구였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젯밤 연회가 끝날 무렵 어떤 귀족 인사가 제 편으로 황제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절뚝거리는 호이든을 발견한 것을 보면 제법 눈썰미가 있는 자였다.

적당히 모른 척했으면 서로 좋았을 일을….

뱉지 않은 혼잣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꽃의 줄기를 모아쥐고 몇 번 털었다. 괜한 꽃잎만 질척한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제길.”

짧은 욕설을 중얼거린 아더는 이젠 쓰레기가 되어버린 보석 화병 위에 엉망이 된 꽃을 던졌다.

“고작 하룻밤 새 이렇게 되다니.”

호이든은 말하면서도 감정이 치밀어오르는지, 목소리를 희미하게 떨었다.

대가리의 꽃잎이 모두 떨어진 꽃을 바라보던 아더는 한쪽 다리만 기이하게 마른 제 형의 몸뚱이로 시선을 옮겼다. 호이든이 거절한 꽃의 꼴만큼이나, 그의 병든 육신도 초라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선황후인 베스티아의 서거 직전을 떠올리게 했다.

“어젯밤 연회만 해도 제법 걸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어. 몸에 자꾸 힘이 빠지는구나, 아더. 너는 일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겠지.”

공포가 묻어나는 목소리엔 습관처럼 꽂혀 있던 독기도 빠져 있었다.

죽음이 목전에 닥치면 이토록 유약해지는 걸까. 아더는 제 형의 파리한 손을 잡았다.

“콜린스 공작이 이제껏 진료를 잘 봐주지 않았습니까. 이전에도 지금 같은 일이 종종 있었지만, 며칠 내로 회복하셨고요.”

“아니, 하루하루가 달라. 느껴져. 나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게.”

여전히 형의 손을 잡은 채, 문가에 선 시종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시간을 알려줬다.

호이든의 상태와 상관없이 사절단을 환영하는 축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어젯밤, 환영 무도회를 열었으니 오늘은 남자들의 친선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본래라면 어제처럼 황제가 그 포문을 열어야 했지만, 호이든의 상태가 이런 지금은 아더가 그 대리인 역할을 해야 했다.

“밀려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 너는 모르겠지.”

“폐하.”

“난 단 한 번도 투구도, 크리켓도 해본 적이 없다. 너라면 오늘만 해도 몇 번이고 질리게 할 고작 그 게임을.”

천장을 보며 눈을 끔뻑이는 호이든의 곁으로, 이젠 정말 떠나야 한다는 뜻을 담아 시종이 회중시계를 소리 없이 들어 올렸다.

아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손을 놓지 않는 호이든을 억지로 떼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콜린스 공작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폐하는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이겨 내실 겁니다. 그러니….”

아침 식사 속에 넣은 수면제 탓인지, 호이든은 가물거리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차마 ‘쾌차하십시오.’라는 말은 뱉지 못한 아더는 제 혀를 짓씹으며 황제의 침실을 벗어났다.

부디 쾌차하시어, 넥서스의 영원한 태양이 되어주십시오.

제아무리 가증 떠는데 이골이 났다지만,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속마음과 너무도 다른 말인데.

뱉지 못하는 거짓말도 있는 법이었다.

* * *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황궁 야외 경기장엔 어느덧 초여름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무르익을 만큼 만개한 꽃이 저문 자리엔 파릇한 잎사귀가 싱그럽게 피어나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따뜻해진 날씨만큼이나 가벼워진 옷차림의 구경꾼들 또한 바뀌는 계절을 체감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여자들은 한층 주름이 나풀거리는 물빛 치마를 즐겨 입었고, 남자들도 지겨울 만큼 꽁꽁 몸을 감싸던 코트를 벗어 던지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친선 경기의 구경꾼이 되기로 한 웨인의 귀족 영애들과 기꺼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길 자처하며 경기장에 모여드는 영식들도 마찬가지였다.

파릇한 잔디가 솟아난 경기장 위로 브리틴 사절단과 웨인의 젊은 귀족들이 마주 봤다. 주로 전쟁의 요직을 맡는 이들이 참여했으나, 개중엔 샌님 같은 영식들도 몇 있었다.

“아이네스, 여기로 와!”

“휴식 시간에 갈게!”

누군가 베스와 함께 무리의 끝단에 앉은 아이네스를 불렀지만, 그녀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소식지의 추문 이후, 안 그래도 탄탄치 않던 베스의 사교계 입지는 더 어려워졌다. 기득권에 대해선 지독히도 폐쇄적인 이들이 때 이른 양녀의 가십을 눈감아줄 리 만무하다는 게 이유였다.

“넌 누구한테 판돈을 걸 거니? 물론 모두 기부금으로 나갈 테지만.”

아이네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사절단과의 친선 경기에서 가장 높은 득점을 하는 이를 골라 판돈을 걸고, 그 배당금을 축제의 기부금으로 내는 건 웨인의 작은 전통 중 하나였다.

“어디가 좋을까?”

껍데기뿐인 양녀 흉내를 위해 억지로 끌려온 베스였지만, 그녀 또한 괜한 말은 덧붙이지 않은 채 최대한 고민하는 척을 했다.

어젯밤, 제 어머니를 보고도 울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볼썽사납게 울기라도 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얼굴을 비출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추문에 박차만 더 가해졌겠지.

그쯤은 저도 알았다.

“나도 게일 백작님께 걸까?”

“게일…?”

아이네스가 의아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웬만해선 가십에 신경 쓰지 않는 그녀 또한 저도 모르게 기사가 진실이리라 믿고 있던 터였기에 베스의 선택이 의아하기만 했다.

“사실 난 이 모든 게 처음이라서….”

베스의 목소리는 경기장의 중앙으로 들어서는 데베르를 보곤 점차 잦아들었다.

그는 평소 입던 정적인 슈트용 셔츠가 아닌, 품이 헐렁한 짙은 감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몇 개 열린 단추 틈 사이가 일정하게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며 너른 어깨를 더 돋보이게 했다. 다만, 평소와 다름없이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는 그가 사람들이 익히 알던 클리프 공작임을 깨닫게 했다.

그만큼, 오늘 그는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눈이 부신지 눈썹을 살짝 찌푸린 데베르는 제게 날아오는 투구용 공을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자, 여러분.”

데베르에게 공을 넘기고 재빠르게 단상 위로 올라간 아더가 목소리를 높였다. 비공식적인 행사인 만큼 황제의 대리인 흉내는 최대한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좌중 앞에 선 아더는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려 올라간 입술이 햇살이라도 가득 담은 것처럼 시원스레 벌어졌다.

“제가 여기에 오래 서 있으면 저를 원망할 이들만 늘어난다는 걸 잘 압니다.”

시기적절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찡긋 눈짓한 아더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즐겨주세요, 여러분! 여러분이 응원하는 자가 판돈을 가장 많이 거머쥘 수 있도록 저 또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단상을 내려가려다 말고 갑자기 자리로 돌아와서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는 제게 걸었습니다.”

청량하게 터져 나오는 좌중의 웃음과 판꾼들의 호객행위 속에 공이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던 브리틴과 넥서스가 동시에 공을 빼앗기 위해 몸을 맞부딪혔다.

“여기로!”

“구석으로 빠져!”

얼핏 보면 그저 몸싸움처럼 보일 만큼 격한 경기였다. 사절단 축제의 목적이 문화 교류가 아닌, 군사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이니만큼 아군끼리 몸이라도 부대끼라는 뜻에서 생긴 친선 경기였다.

반복되는 몸싸움 속에서 몇 번은 아더가, 그리고 몇 번은 데베르가 번갈아 가며 넥서스에 득점을 냈다. 브리틴 또한 사력을 걸고 경기에 임하는지, 상대편에 득점이 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제 편에서 득점을 냈다.

명실상부 브리틴 득점에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자는 칼론이었다. 무식하리만치 큰 덩치만큼이나 힘이 좋은 그는 달려드는 넥서스를 잘도 쳐냈다.

말끔하던 얼굴들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종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지는 태클과 몸싸움에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다 웃옷을 벗는 사내들도 있었다.

“오 대 오!”

애매한 무승부에 다들 석연찮은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다.

“시시한 공놀이 말고, 사냥 어떻습니까.”

그때, 저 혼자서 공을 갖고 놀던 칼론이 입을 뗐다. 각진 턱 끝에선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냥?”

“가장 큰 놈을 잡아 오는 자가 이기는 거로 하시죠. 간단하게.”

칼론이 씩 웃으며 손에 든 공을 아더에게 던졌다. 공을 받아든 아더는 주위를 돌아봤다.

“좋습니다! 그리하시죠, 황자님!”

“그래, 아더. 끝을 봐야지.”

아더가 경기장 끝에 선 시종에게 짧게 언질을 놓자, 머지않아 잘 정렬된 사냥총이 연이어 그들의 앞에 놓였다. 거의 다 군인 출신이라 자연스레 총열을 정비하는 모습이 다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남자들이란.”

그 모습을 보던 아이네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관중석의 구경꾼들은 다들 경기장 속에 있는 제 약혼자, 아니면 흠모하는 이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속에 앉은 베스도 별다를 바 없이 단 한 명만을 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정리할 생각도 없는지, 데베르는 거칠게 장전을 마치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관중석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아 오는 자가 승리합니다!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경기장 소식을 관중에게 전하는 시종이 목청을 높였다.

야만적이라고 고개를 젓는 제 약혼자를 알지 못하는 게일은 가장 먼저 말을 타고 숲으로 달려 나갔다.

솟구친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얽힌 숲은 대낮임에도 어둑했다. 애초에 사냥 따위 할 생각이 없던 데베르는 그저 아더와 발만 맞추며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쥐새끼 하나 없네.”

아더가 총구를 내린 채 중얼거렸다.

숲의 초입까지는 얼추 다 함께 들어와 왁자지껄하던 주위도 다들 어디로 흩어졌는지 사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난 이쪽으로 가볼게. 브리틴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꽤 포부 어린 소리를 한 아더가 반대편 길로 사라지자, 데베르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길.”

파드득, 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무슨 연유에선지 허공으로 날아오를 때였다.

찰카닥.

낯선 탄창음이 고요가 깨진 틈을 파고들었다.

“...”

장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

데베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분명히 그를 향해 있는 은빛 총구엔 넥서스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잡았다.”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너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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