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정말 당신이 썼냐고 쪽지라도 흔들어보려 올린 베스의 손은, 때마침 끝난 연주에 환호하는 장정들 틈에 손쉽게 가려졌다. 머리 위로 요란하게 손뼉을 치는 인파의 틈바구니에 낀 작은 손이 데베르에게 보일 리 만무했다.
“아….”
베스의 입술 새로 짧은 탄식이 새 나왔다. 열심히 고개를 빼며 데베르를 다시 찾았을 땐, 그는 이미 등을 보인 채였다. 벌써 세 번째 곡이 시작되려 하는 데도 말이다.
오케스트라단이 다음 곡을 준비하기 위해 현악기를 조율하는 소리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섞여들며 장내엔 작은 소란이 피어났다. 다들 새로운 춤 파트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통에 구석에 서 있던 베스도 엉겁결에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
“내가 가볼까?”
“크큭. 그러다 공작한테 얻어맞는 거 아니냐?”
“뭐, 어때. 약혼한 사이도 아닌데. 라프넬 공주도 브리틴 놈하고 붙어있는 마당에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진 저들끼리 쑥덕거리기만 했던 무리 중 하나가 슬금슬금 베스에게로 다가왔다. 소식지야 소식지인 거고, 겨우 춤 한 번인데 어떤가 싶은 호승심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기적절하게 데베르 공작 또한 황제에게 붙잡혀 있다니. 적당히 아둔한 놈들한텐 지금이 추문 속 여인에게 다가가 볼 최적의 기회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영식을 눈치챈 베스의 고개가 바삐 움직였다. 무도회장의 가를 돌며 데베르를 계속 지켜봤지만, 그는 잠시간 주던 시선을 다시 옮겼다.
“끝방….”
손안의 작은 쪽지를 꽉 쥔 베스는 세 번째 곡이 시작되고 나서야 연회장의 문을 밀고 나왔다. 귀가 아플 정도로 쨍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가 두꺼운 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황금빛으로 찬란하던 연회장을 벗어나자, 밖은 거짓말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몇몇 시종들과 보초병들이 황궁 정원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은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굳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히 연회장을 벗어난 영애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무관심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베스는 시커먼 복도로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벽면에 붙어있는 램프는 적막한 복도를 따라 길게도 늘어져 있었다.
그의 저택보다 훨씬 긴 황궁의 복도를 한참을 걸어가자, 정말 서신의 내용처럼 희미한 빛이 새 나오는 방 하나가 있었다. 순간, 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리던 베스의 구둣발 소리가 우뚝 멈췄다.
사람이 있다고?
얼핏 문틈 새로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그를 기다리게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낱같은 빛줄기만 보이는 문 새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안에 꽤 여러 사람이, 그것도 남자가 있단 거였다.
편지를 보낸 건 공작이 아니야.
불현듯 벼락처럼 꽂히는 생각이었다.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몸을 비트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어둑한 복도 속으로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달아나려던 베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베스 아니니?”
도망치는 발걸음보다 여린 팔을 옥죄는 힘이 더 빨랐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베스는 망연한 얼굴로 지겨울 만치 익숙한 하워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당신이…. 설명되지 않는 물음들이 산발적으로 머리에 떠올랐지만, 하워드는 그 상념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저희 딸입니다.”
하워드의 뒤로 브리틴 사절단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내들이 일제히 베스를 보고 있었다. 젊은 귀족 남녀들이 주축이 되는 무도회를 즐기기엔 연로한 이들은 지금처럼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룸을 하나씩 잡아 그들끼리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베스는 하워드의 우악스런 힘에 이끌려 룸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이게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이 또한 하워드의 빌어먹을 시험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제 앞에 서 있는 브리틴의 사절단 또한 하워드의 숨겨진 정체를 명확히 아는지, 아니면 그저 브리틴에서 잔뼈가 굵은 넥서스 귀족쯤으로 아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불투명한 선택지였다.
“아버지를 닮아 딸이 미인이군요.”
“아니죠. 그 어머니를 닮은 거죠. 하워드 부인의 미모가 여간 유명세를 떨친 게 아니잖습니까.”
하워드는 허허 웃으며 베스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아 당겼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여식인걸요. 베스, 갑자기 이리 아비를 찾아오니 조금 놀랐구나. 무슨 일 있니?”
“전….”
베스는 긴장으로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허허, 거참. 이 좋은 축젯날 춤은 추지 않고 늙은 아버지나 찾는다니.”
하워드는 들으라는 듯 우스갯소리를 하며, 룸의 계단으로 베스를 이끌었다.
“위층 발코니에서 무도회나 구경하며 얘기 나누자꾸나.”
베스를 앞세운 하워드는 난간을 붙잡은 채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지팡이를 함께 들고 오르는 게 힘이 드는지 관자놀이께에 불뚝한 힘줄이 솟아오르는 게 선명했다.
연회장의 소음이 넘어오는 발코니 앞에 서자 아래층의 잡담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워드는 그 짧은 움직임에도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쉬는 숨에 섞인 시가 향이 역해 베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끝에 자신을 찾는 데베르의 뒷모습이 걸렸다.
“그래, 속은 기분은 어떠니.”
뻔뻔스런 하워드의 첫마디에 베스는 발코니 난간을 꾹 쥐었다. 하지만 금세 손을 풀어 제 등 뒤로 감췄다.
“너는 그를 믿어서 이곳까지 왔는데, 정작 그는 약속을 어긴 너 때문에 헤매는 처지라니.”
하워드 또한 데베르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우습구나. 고작 데베르를 흉내 내는 것 따위의 방법을 묻는다는 게.”
병으로 점철되어가는 몸과 달리, 갈수록 기민해지는 하워드의 눈동자가 베스의 말간 얼굴을 샅샅이 뜯어봤다. 한 치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혈기 오른 눈빛이었다.
“네가 데베르와 가까워지고 있단 증거로, 내 앞에 그의 서명이 새겨진 만년필을 들이민 적이 있었지. 클리프가에 만년필을 납품하는 놈을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제아무리 꼭꼭 숨기고 드는 클리프가라 해도, 고작 만년필까지 숨기려 들진 않으니까. 그게 허점인 줄도 모르고.”
하워드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필체. 그 필체도 말이다. 하워드가는 클리프가의 군수회사와 계약을 맺었어. 그리고 그 속엔 데베르 놈이 직접 휘갈긴 서명이 분명하게 들어있고. 궁금하면 내 서재에 가보렴. 사기꾼 하나를 데려와 필체를 흉내 내게 했을 뿐이란다. 글쎄, 시간은 삼 분도 걸리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네게 쪽지를 가져온 시종 얼굴은 기억나니?”
가만히 베스를 지켜보던 하워드는 씩 웃음을 지었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네가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덕분에 한 번 더 그자를 써먹을 수 있겠어.”
“베스.” 나직한 부름으로 운을 뗀 하워드는 불현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내가 왜 시시콜콜한 뒷얘기를 숨김없이 들려주는지 궁금하진 않니.”
주름진 얼굴 새로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데베르에게 무슨 얘기라도 해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쓸데없는 짓 말라는 충고를 하려고 그런단다. 과연 클리프 저택엔, 놈의 측근 중엔 내 사람이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젊은 군대장 따위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총으로 죽여버릴 수 있어. 권력이 있는데 살아남는 놈들은 다 명분이 있단다, 얘야. 지금껏 황가가 클리프가에게 벌벌 떨면서도 멸문시키지 않은 건, 그 가문만큼 저를 지켜줄 게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껏 그 늑대 새끼들이 대를 이어온 이유지. 하지만 넥서스는 더 이상 클리프의 이름이 필요 없어질 거란다. 데베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자가 아니란 뜻이야, 이 어리석은 딸아.”
누가 들으면 진짜 딸에게 하는 아버지의 충고로 들릴 만큼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베스는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그의 성질을 잘 알았다.
“아직 놈을 살려두고, 그 곁에 너를 두는 이유는 단 하나. 넥서스는 뿌리부터 썩어야 해. 네가 이 말뜻을 알아들을지 모르겠구나.”
바짝 굳은 베스의 어깨를 하워드가 몇 번 주물렀다. 말라가는 다리와 달리, 갈수록 억세지는 손아귀 힘에 베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자, 이제 내려가자. 애타게 널 찾는 남자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그리고 오늘은 집에서 널 기다리는 손님도 있고.”
그 말에 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손님이라니. 제발 그 일 만큼은….
“설마, 코펠에서.”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군! 그래, 네 어미가 집에 도착해 있어.”
“당신은 미친 자야.”
바들거리는 베스를 보면서도 하워드는 태연히 자신을 부축하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여기서 더 죽일 시간은 없지 않겠니?”
뻣뻣하게 하워드를 붙잡은 베스는 겨우 미소를 걸친 채 룸을 벗어났다.
“데베르군.”
하워드의 속삭임에 눈을 들자, 저 긴 복도 끝에 선 데베르가 보였다.
왜 하필 지금일까. 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과 하워드를 부축한 베스의 발걸음이 엇갈리게 복도를 울렸다.
“함께 계셨군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베스를 불렀습니다. 아마 저희 부녀는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네요.”
희끗한 머리를 살짝 숙이며 지나가던 하워드는 문득 데베르를 불렀다.
“데베르 공작님.”
“말씀하시죠.”
무감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공작을 향해 하워드는 꽤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딸아이의 추문은 아비로써 가슴 아플 뿐입니다.”
말을 마친 하워드는 베스와 함께 유유히 황궁을 벗어났다. 정원 앞에 세워진 차에 오르기 전, 베스는 뒤를 돌아봤지만, 켜켜이 겹친 수풀 사이로 보이는 건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문득 그 어둠 위로, 피골이 상접한 제 어머니 올리비아의 얼굴과 눈 덮인 전장을 뒹굴던 데베르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긴장하지 말렴.”
제 손을 토닥이는 하워드를 내치지 못할 만큼 베스는 넋이 나간 채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하워드 저택에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차에서 뛰쳐나왔다.
“아가씨!”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저택으로 들이닥친 베스는 루카의 만류도 뿌리친 채, 하녀들이 지키고 선 방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 힘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저를 뜯어말리는 하녀들을 거세게 뿌리친 베스는 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값비싼 하워드의 침대 위에, 시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여체 하나가 올려져 있었으니까.
그건 누워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물건처럼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 엄….”
베스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바짝 마른 올리비아의 발에 베스의 손이, 그 어린 날처럼 덜덜 떨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로 하워드의 음성이 겹쳐졌다.
“고운 네 손끝을 희생해 목소리를 다시 얻었으니, 이번엔 네 어미를 희생해 데베르를 얻어볼 생각이니?”
툭, 베스의 눈앞으로 저와 데베르의 얘기가 쓰인 소식지가 떨어졌다.
“데베르 클리프를 마음껏 사랑하렴. 그놈 또한 베스 제인스라면 판단이 흐려질 정도로.”
선고 같은 말도 함께였다.
“그게 너의 첫 임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