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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08화 (108/206)

108화

예상 밖 칼론의 선택에 다들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법도 한 게 그의 앞에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제국의 공주, 라프넬이었다.

꽃잎 사이의 꽃봉오리처럼 저를 둘러싼 영애들 사이에서 동그란 머리통을 빳빳이 세우고 앉아있는 라프넬이 칼론의 눈에 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연회장에 있는 누군들, 행여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눈길이 갈 만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제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라프넬은 작게 입술만 움직였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을 뿐이지만 뭇 사내들을 충분히 홀릴 법한 미소였다. 제법 앙큼한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들썩이는 라프넬은 제 모습이 아둔한 남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칼론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지금 이 연회장에서 보고 있는 건 라프넬 공주님뿐입니다. 어떻게, 대답이 되셨습니까?”

제법 능글맞은 소리였지만, 여유만만한 얼굴 탓인지 밉지 않았다. 이에 라프넬은 얌전히 무릎 위에 모은 손을 올려 제 입술을 가렸다. 슬쩍 돌아간 고개 옆으로 전보다 조금 더 올라간 입매가 보였다.

라프넬은 이내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칼론 또한 적절하게 손을 마주 내밀어 공주를 연회장 중앙으로 에스코트했다. 손을 맞잡은 채 걸어 나가는 한 쌍을 향해 구경꾼들은 알아서 길을 텄고, 첫 번째 무도회 곡을 준비하는 북소리 또한 군중의 심장 소리처럼 둥둥거리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지금, 이 순간. 연회장에서 가장 볼만한 그림은 이 두 사람이었다.

칼론이 라프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춤엔 능하신가요?”

“아마 당신보단.”

연회장 정중앙에 선 라프넬은 빙글 몸을 돌려 칼론을 마주 봤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차갑게 식은 푸른 눈동자가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시작됐다.

칼론의 어깨와 팔에 손을 올린 라프넬은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사뿐히 몸을 돌리는 그녀는 자연스럽게 칼론을 이끌고 있었지만, 칼론도 제법 그 움직임에 솜씨 좋게 움직여줬다. 생각 밖 남자의 실력에 라프넬은 다시 한번 눈썹을 까딱였다. 이번엔 놀라움을 담은 솔직한 반응이었다.

“사교춤이라곤 몰라서 공주님의 발등을 무식하게 밟을 줄 아셨나 보네요.”

칼론은 그 말을 하며 노래에 맞춰 라프넬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내렸다. 주위를 둘러싼 다른 영애들보다 훨씬 높이 올라갔다 내려온 라프넬의 눈이 저도 모르게 커다래졌다.

“무식하게 들어 올릴 줄은 몰랐는데.”

“다음엔 저 샹들리에까지 머리가 닿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엔 라프넬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딱 생긴 것대로 말하는 꼴이었지만, 그나마 이목구비가 봐줄 만해 넘어갈 만했다.

“건방 그만 떠는 게 좋을 거예요. 칼론 대령.”

웃음기가 사라진 공주가 제법 단호하게 말하자, 칼론의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혔다. 짧은 한마디 속 어느 단어를 들어도 탐탁잖다니. 작정하고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군대장이라 소개하는 걸 들으셨을 텐데요.”

“껍데기뿐인 군대장이지. 실속은 고작 대령일 뿐이고.”

“역시.”

칼론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여인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그 입맛이 까다로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공주님의 마음에 들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든다고?”

“어려운 일인가요?”

“당신은 내 마음에 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처벌을 내릴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데.”

라프넬은 저보다 한참은 위에 있는 칼론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칼론은 자신을 심판해 보겠다는 작은 얼굴을 기꺼이 내려다보며, 틈틈이 공주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는 단순히 미색에 눈이 먼 눈빛은 아니었다.

얼핏 보면 아더를 빼다 박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슨 벌을 주실지 궁금합니다.”

“고민 중이야.”

딱딱하게 각이 진 남자의 목소리에, 라프넬 또한 날이 선 목소리로 응수했다.

“순진한 척 천지 분간 못하는 아이들을 앞세워 내 정원까지 들이닥친 벌을 뭐로 줄까, 고민하는 중이지.”

아, 뭔가 생각났다는 듯 라프넬은 반달 모양의 눈을 슬쩍 접었다.

“친위대 말단이라고 황가를 상대로 거짓말을 한 벌까지 함께.”

“아마 그 세 치 혀부터 뽑히겠구나.” 혼잣말 같은 라프넬의 말에 칼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시원스럽게도 웃는지 주위에서 춤을 추던 몇 쌍의 손님까지 그들을 돌아볼 지경이었다.

허리까지 굽히며 웃던 칼론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잡고 있던 라프넬의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아줬다.

“그럼 전 최후의 만찬인 오늘을 마음껏 즐겨야겠네요. 공주님의 벌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노릇이니까요.”

꽤 다정한 목소리를 흘리며 빈손은 자연스레 라프넬의 허리를 감쌌다. 한결 가까워진 두 사람의 숨이 엇박자로 서로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전통 있는 사교춤을 추는 상대에게 추행죄를 묻진 않으시겠죠.”

빠르게 속삭인 칼론은 연회장 한 귀퉁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숙인 턱 끝으로 간지럽게 닿는 금발 머리카락에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있었지만, 이채가 도는 눈동자는 또 다른 목표물을 찾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커다란 기둥 옆에서 멈춰 섰다.

아무도 없는 그곳은, 작은 협탁 옆에 놓인 누군가의 샴페인 잔만이 그곳에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칼론의 입꼬리가 비스듬해졌다.

“쯧. 술이 약하다니.”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샴페인 잔을 본 그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아더의 손이 다시 한번 틈 없이 매진 타이로 향했다. 답답함에 절로 손이 가만있지 못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는 혀 또한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름뿐일 군대장일지언정 그 사기는 결코 이름뿐이지 않을 것입니다. 브리틴은 넥서스의 소도시 정도가 아니라, 엄연한 연합군입니다. 연합군이 아군은 될 수 있어도 넥서스 제국군은 될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한때의 아군은 언제든 적군이 될 수 있다는 걸 제 형만 모른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브리틴은 넥서스의 소속이 아니라 엄연한 이웃 국가이지. 지금껏 그만큼 숨통을 조였으니 이제는 조금 풀어줘야 할 때일지도. 짐승도 몇 번 목줄을 조이면 주인을 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칼론은 내 어머니가 브리틴 왕궁에서 후원으로 기른 고아 중 하나야! 천출이긴 해도 왕궁 물을 먹고 자란 놈이라 브리틴에 대한 충성심만큼이나, 선 황후 폐하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 자다. 그 피를 이은 나는 말할 것도 없지. 적당히 사기를 돋워 넥서스의 힘이 돼준다면 난 더 바랄 게 없어.”

의자 팔걸이를 우악스럽게 쥔 호이든의 손등이 부들거렸다. 마른 손등 위로 핏줄이 애처롭게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 꼴을 쳐다보던 아더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 황제는 이 연회가 끝나고 모두가 연회장을 벗어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절뚝거리는 꼴은 결코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비정상적인 고집마저도 병의 진행, 혹은 오랜 약물치료로 인한 신경 과민증 정도로 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더는 요즘 따라 불쑥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하.”

얼핏 데베르의 얼굴을 본 아더는 작게 실소했다. 저 지독히도 담담한 얼굴이라니. 작년 종전 이후, 시체 썩은 내가 난다는 대단한 대거리를 하며 군대장을 사임한 공작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데베르는 때론 목적의식 없는, 그저 잘 길러진 하나의 사냥개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임한 군대장이지만 견해 정도는 있겠지.”

애매하게 자신을 떠보는 호이든의 말에, 데베르는 무감한 눈동자를 올려 연회장을 빠듯하게 채운 인파를 죽 둘러봤다.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기둥을 본 눈동자는 한 치의 놀라움도 없이 느릿하게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훑어 나갔다.

“제 견해가 중요하십니까.”

잠긴 듯한 목소리는 천장부터 내려온 검은 휘장 뒤에 숨은 한 여자를 보고서야 기어 나왔다. 적당히 고개를 밖으로 뺐다 집어넣었다 하는 걸 보면, 작정하고 숨은 꼴은 아니었다.

“…살아남는 자의 견해가 옳은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베스는 그토록 기다리는 남자의 시선이 제게 향해 있는지도 모르고, 두툼한 벨벳 휘장 뒤에 서 있었다. 무도회의 시작과 더불어 칼론과 라프넬이 이목을 집중시킨 틈을 타 자리를 옮긴 거였다. 가장 피하고 싶던 두 사람의 덕을 보게 된 베스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연회장 구석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공주와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연신 고개를 숙이는 칼론은 다행히도 드넓은 연회장에 더 이상의 호기심은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안심이 된 베스는 그제야 잔뜩 긴장한 어깨에 힘을 풀고 벽에 기대섰다. 발을 옥죄는 구두 탓에 잠시라도 쭈그려 앉고 싶었지만, 행여나 데베르가 자리를 옮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저기로 갈, 엇.”

춤추다가 발을 삐끗한 영애 한 명이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아 휘장 근처로 왔지만, 이내 추문의 주인공을 발견하곤 걸음을 돌렸다. 그런 사람이 비단 한 명은 아니었다. 베스는 자신을 보고 기겁하다가 이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끈덕지게 보내며 사라지는 짧은 순간을 어떤 식으로 견뎌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빼꼼히 고개만 내민 채 저 멀리 여전히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는 데베르를 쳐다봤다. 등을 돌린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평소와 판이한 아더의 얼굴이 대화의 주제가 심상찮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려줬다.

두 번째 곡이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도 베스는 홀로 휘장 뒤를 지키고 있었다. 칼론이 여전히 공주 곁에 붙어 정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베스는 머리를 완전히 벽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베스의 곁으로 다가온 황궁 시종 하나가 짧은 휴식을 깼다.

“영애를 찾는 서신입니다.”

그가 든 은쟁반 위에는 하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얼른 허리를 곧추세운 베스는 약간은 긴장한 손길로 쪽지를 받아 펼쳤다.

「기다리지 말고 복도 끝방으로.」

복도 끝방? 뜻 모를 소리에 호선을 그리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고작 한 줄뿐인 서신을 몇 번이고 곱씹는 새카만 눈동자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급하게 썼는지 잉크가 휘날린 짧은 편지 끝엔 데베르 클리프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청혼서에서 본 클리프가의 서명과 같았다. 특유의 날카로운 필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걸 데베르 공작님이 주셨나요?”

“전 그저 서신을 전달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뿐입니다.”

석연찮은 대답에 답답해진 베스는 문득 데베르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데베르와 베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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