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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07화 (107/206)

107화

귓전을 때리는 트럼펫 소리에 덧붙여진 북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맞춰 브리틴의 나머지 친위대와 사절단이 뒤이어 들어왔다.

“친우가 오셨군!”

이에 호이든은 흔치 않게 반색하며 연합국의 군대장을 맞이했다.

무도회를 직관할 수 있는 상석 앞에 무릎 꿇은 칼론은 그 덩치만으로도 제 존재를 혁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칼론의 어깨를 두드리며 뭐라 격려하는 듯한 추임새를 덧붙이는 호이든의 모습을 보던 아더는 불량스레 제 혀를 짓씹었다.

건방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더는 짧은 후회를 삼켰다. 그날 밤 무슨 생각으로 넥서스에 대한 충정을 운운하며 제게 다가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친위대 말단이라 거짓 너스레를 떨며 세 치 혀를 나불거렸다는 것이었다. 홀로 폐하의 문밖을 지키시기엔 지나치게 명석한 분이시라 했던가. 감히 그따위 같잖은 동정까지 덧붙이며.

커다란 황궁의 연회장에서 칼론과 호이든은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나누는 얘기를 듣기엔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다.

아더는 빈 샴페인 잔을 한번 내려다보곤 곁에 선 베스를 돌아봤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시선 또한 상석의 황제를 향해 있긴 했지만, 그 시선의 끝이 황제는 아니리란 확신이 있었다. 황제의 곁엔 데베르가 서 있었으니까.

아더는 제 우스운 추측에 눈살을 한번 찌푸리곤 주위를 둘러봤다. 잠시 사절단의 행진에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황자와 소식지 속 양녀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보단 덜하긴 했어도 여전히 부채 뒤에 입술을 숨긴 채 시시덕거리는 꼴들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더의 생각과 달리 베스는 데베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를 보고 있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황제의 앞에 선 붉은 머리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세운 채,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살폈다.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 하워드가 보이지 않았다. 하워드가 없다면 그 끄나풀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숨은 거지.

연회장의 이 층 관람석을 훑던 베스의 눈동자가 다시 아래를 향할 때였다.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린 칼론이 연회장을 구경하려는지 고개를 반쯤 뒤로 돌렸다. 그를 지켜보던 베스 또한 때마침 지나가는 시종을 향해 몸을 돌려 샴페인이 가득 찬 잔 하나를 손에 쥐었다. 생각지도 않은 술잔이었지만, 모든 행동은 처음부터 그러기로 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간단히 시종을 향해 턱을 까딱이곤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앞을 봤을 땐, 칼론 또한 고개를 돌린 채 황제에게 뭐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더의 곁으로도 샴페인이 올려진 쟁반을 든 시종이 다가왔지만, 그는 짤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빈 잔에선 냉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물기를 훑는 아더의 손가락에 고민이 묻어났지만, 이내 축축한 손가락은 그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고민은 끝난 터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베스 양.”

제 입으로 파트너가 돌아올 때까지 곁에 있겠다 넉살을 피웠으면서 먼저 꼬리를 빼는 게 기분이 석연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베스는 알겠노라 고개를 주억이며 흘깃 다시 칼론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그 순간, 작게 보이던 데베르의 얼굴이 얼핏 이곳을 향한 것 같기도 했지만 찰나였다.

“곧 돌아-”

아더는 말을 뱉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도회장에서 파트너를 떠날 때면 습관처럼 하던 곧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이 이번에도 툭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쯤에서 멈춰야지. 더 추해지고 싶지 않다면.

아더는 그걸 잘 알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베스 하워드 양.”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정갈한 인사를 건네는 아더를 향해, 베스도 제가 알고 있는 대로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떠나는 황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등을 돌린 아더는 연회장의 중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호이든이 가까워질수록 뻐근해지는 목덜미에 저절로 타이에 손이 올라갔지만, 차마 느슨하게 풀지는 못했다.

호이든의 앞에 서기 위해선 늘 여느 때와 같이 반듯한 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매정한 이복형이 조금이나마 그를 동생으로 인정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설령 가족이 아니라 충직한 집안의 개 정도로 치부할지라도 말이다.

인정받기 위해 애쓴다는 건 이런 거였다. 제 감정을 누르고, 치미는 순간의 욕구 따위는 거세하는. 부끄럽지 않은 황자가 되기 위한 그 모든 것이 아더는 익숙했다.

“폐하.”

“오, 아더구나.”

흔치 않은 황제의 반색은 오늘만큼은 배다른 동생에게도 예외 없었다.

아더를 본 칼론이 퍽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시원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매서운 듯한 인상과 맞물려 제법 매력적인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령관님. 브리틴 군대장 칼론 인사드립니다.”

칼론의 곧은 허리가 아더를 향해 숙어졌다. 본 적 있는 타국의 예우 방식에 아더의 눈썹이 들썩였다. 적당히 불편한 기색이 담긴 몸짓이었다.

“군대장?”

아더의 시선이 데베르를 한번 향했다, 다시 제 형에게로 돌아갔다. 애매한 미소를 걸친 입술 새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 제가 모르는 새 브리틴의 군법이 바뀌었던가요.”

황제의 뒷배나 다름없는 브리틴까지 믿지 못해 대령 이상의 직위를 주지 않던 게 불과 작년이었다. 자신을 집무실 바깥에 내놓은 채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일개 군인의 입에서 ‘브리틴 군대장’이란 소리는 나올 일이 없어야 했다.

“군대장이라니….”

“그저 호칭일 뿐입니다, 사령관님.”

“난 폐하께 여쭈었다.”

칼론과 아더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냉랭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기묘했다. 곱상한 귀족 신사 같은 아더와, 거칠 것 없는 날짐승의 기운이 풍기는 칼론은 가십에 목마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타고난 태라는 건 갖춰 입은 의복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더의 굳은 얼굴을 훑던 칼론은 금세 머리를 다시 숙였다. 붉은 머리통이 아더의 가슴팍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그래, 아더. 혈기 어린 군대장의 패기 정도로 생각해주지.”

얼마간 다시 올라오지 않는 붉은 머리카락을 응시하는 아더의 귓가로 호이든의 목소리가 꽂혔다.

흔치 않은 반색을 내보이더니, 이번엔 답지 않은 아량까지. 아더는 그 생각을 곱씹으며 이젠 완연한 병색이 드러나는 제 형을 내려다봤다.

작고, 유약하고… 다가올 죽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젊은 넥서스의 황제를.

“알다시피 넥서스 군대장이 공석이 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었어. 그 공백에 브리틴 연합군의 기강이 흐트러질세라 임시로 군대장이란 명칭만 허용해줬을 뿐이다. 제아무리 브리틴 군대장이라 해도, 그 무게가 넥서스 군대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지나치게 날 선 반응으로 사절단을 축하하는 오늘, 황제인 나를 민망하게 만들지 말렴. 공식 지위는 여전히 칼론 대령이니 사실 달라진 것도 없는 셈이니까.”

“…데베르 공작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까.”

“사임한 군대장에게 군 소식을 알릴 필요는 없지.”

아더는 순간적으로 안도하는 자신에게 구역질이 밀려왔다. 데베르도 자신처럼 몰랐으니 그리 최악은 아니라고. 고작 그따위 자위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제 꼴이 경멸스럽기만 했다.

괜히 눈이 부신 척, 눈살을 찌푸리며 연회장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봤다. 건방지게 한밤중의 태양 노릇을 하는 황궁의 샹들리에는 빛나지 않아야 할 사람마저 빛나게 하고 있었다.

한때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 샹들리에에 목을 매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니.

유난히 사랑을 갈구하던 소년 시절의 치기 어린 생각이 떠오른 아더는 그새 거칠해진 제 턱을 감싸 쥐곤 데베르에게 눈짓을 했다. 정말 몰랐냐는 뜻이었다.

데베르는 예의 그 지루함을 담은 눈동자로 몇 번 칼론을 훑더니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칼을 오래 잡았나 보군.”

“아.”

칼론이 입술을 탁 벌리더니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내려다봤다. 함께 있는 호이든과 아더까지 모두 볼 수 있게 한껏 내린 손엔 굳은살이 가득했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칼론의 너스레에도 데베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이 지겨운 시간을 견뎌보겠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칼론은 아더를 볼 때보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데베르를 샅샅이 뜯어봤다.

“넥서스에 오니 마음에 드는 것은 있고?”

그런 칼론의 시선을 끊은 건 황제의 영양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에 억지로 시선을 거둔 칼론은 아쉬운 입맛을 슬쩍 다시며 연회장을 둘러봤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 모든 것이 호기롭게도 반짝이는 황궁의 연회장을 고작 마음에 든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단 황궁뿐만이 아니었다. 반질한 넥서스 귀족들의 윤택 어린 얼굴, 값비싼 원단으로 맞춰진 연미복과 드레스, 계절에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것만을 피워내는 화병….

손에 닿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누구든 탐낼만했다.

“감히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요. 넥서스에 아름답고 강한 것들이 넘쳐난다는 것은 근방의 모든 국가가 알 텐데요.”

“그래도 더 눈길이 가는 건 있기 마련이지 않나.”

그 말에 칼론의 입가가 비식 올라갔다. 칼론의 측면에 앉은 호이든에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오케스트라의 긴 환영곡이 끝나고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의자 팔걸이를 꾹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난 호이든은 살짝 비틀거렸지만, 곧바로 아더가 그 곁에 바짝 붙어 티 나지 않게 부축했다. 멀찍이 선 사람들에겐 그저 황가의 두 형제가 사절단을 축하하는 모습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황제의 오른팔이 번쩍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타오르는 듯한 박수 소리도 더 뜨겁게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럼, 저는 먼저 이만.”

칼론은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혀 황제에게 예를 표하곤 여전히 달뜬 박수로 가득한 연회장 중앙을 천천히 걸어갔다. 유난히 여유가 깃든 얼굴은 새로운 브리틴의 군대장을 향한 영애들의 흠모 어린 시선과 심지어 영식들의 경계마저 즐기는 듯 착각하게 했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는 단 한 명만을 찾는 중이었다.

“저기 계시는군.”

그리고 그의 주인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목표물을 발견한 걸음이 한층 더 거침없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파트너도 없이 홀로 계십니까.”

마음에 드는 것.

순간, 칼론은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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