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베스는 손에 든 상자를 더 꽉 쥐었다. 비가 그친 뒤라 서늘한 날씨인데도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이 차림으로 갈 수는 없어요.”
데베르는 숙소를 향해 들어서는 베스의 뒤를 따랐다. 무슨 꿍꿍이냐는 듯 여자가 뒤를 흘깃 돌아봤지만, 그는 여상한 얼굴로 위층을 턱짓할 뿐이었다.
베스가 정말로 당황한 건 기어코 숙소 입구까지 들어온 데베르가 관리인에게 손짓할 때부터였다. 그는 제 집안의 사용인을 대하듯 관리인을 불러 세웠다.
“이 간호사의 방에 들려야 할 일이 있는데.”
“대체 무슨…!”
베스가 얼른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도 저도 못 하는 관리인이 어버버 거리며 공작과 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상식적으로 간호 숙소를 외부인이, 그것도 남자가 들어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클리프 공작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이곳은 넥서스이고 웨인이라는 것을 데베르는 지독히도 잘 알았다. 변하지 않는 가치라 자위하는 귀족 놈들의 계급 놀이를 누구보다 속속히 아는 자가 바로 데베르 클리프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제 마음껏 그 특권을 이용해보려는 중이었다.
“내가 지금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가.”
날 선 시선이 관리인을 향했다. 애꿎은 관리인만 아닌 밤중에 들이닥친 공작 때문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더 참지 못한 베스가 얼른 방문자 명부를 끌어당겼다.
“공작님께 꼭 전해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십 분 내에 나올게요. 걱정 마세요.”
“으, 응. 그래, 베스 네가 그렇다면야….”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삐걱대는 숙소 방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르던 데베르가 자연스레 문을 잠갔다. 찰칵거리며 문이 잠기는 소리에 여자가 퍼뜩 뒤를 돌아보자, 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보여주고 싶어?”
옷장 앞에 선 베스는 손에 든 드레스를 어쩌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얼른. 내가 인내심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몸을 가릴만한 것이라곤 작은 옷장 문 하나뿐인데, 남자는 보란 듯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안 그래도 좁은 방 안에서 그가 주는 위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네 입으로 애인 사이까지 하자고 한 마당에 내외는 좀 우습지 않아?”
침대의 발치에 옷장이 있었기에, 베스는 데베르의 무릎 앞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십 분 동안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아. 굳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 없다면 더 많고. 어때? 계획을 수정해 보는 건.”
노골적인 회유에 베스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휙 뒤를 돈 베스는 차분히 간호복의 단추를 풀어나갔다. 안에 슬립이라도 갖춰 입은 게 그나마 남은 작은 위안이었다.
얇은 어깨끈 밑으로 미처 베스가 발견하지 못한 데베르의 흔적이 넘쳐났다. 가만히 제가 남긴 어젯밤의 증표를 읽어나가던 그는 드레스 뒤에 달린 지퍼를 채우지 못해 헛도는 손짓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그래?”
살짝 손끝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고작 그뿐인데도 작은 방 안에 긴장감이 피어났다. 어쩌면 등 뒤에 닿는 남자의 숨이 지나치게 뜨거워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베스는 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절단을 환영하며 연합국 간의 우정을 돈독하게 한다는 축제의 명분에 맞게 드레스는 정석 이브닝드레스라기보단, 유행하는 원피스 모양에 레이스와 보석 몇 개가 더 박힌 단정한 차림이었다. 살짝 붉은 기가 더해진 드레스는 유난히 붉은 여자의 입술과 잘 어울렸다.
창가에 걸터앉은 데베르는 몇 번 제 손가락을 튕겼다. 느릿하게 손을 튕겨낼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수가 지나갔다. 그 중엔 제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울 만큼 지질한 수도 있었고, 눈앞의 여자가 약간은 측은해질 수도 있는 저열한 수도 있었다.
그의 계획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베스 제인스였지만, 선택의 기로를 쥔 건 데베르 자신이었다.
데베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연회는 이제 시작이었다.
나란히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공작과 양녀를 향한 끈질긴 시선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두 사람에게 들러붙었다. 베스는 저도 모르게 데베르의 팔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그 약한 악력에 남자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긴장한 베스는 그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적의를 띤 시선은 늘 따갑기 마련이었다.
“어머, 공작이랑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봐요.”
“제 어미도 웬 남자와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배운 게 그 모양이니 저러지. 쯧, 갑자기 신분이 상승하니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군요.”
제 모습 하나하나를 뜯으며, 돌이킬 수 없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힐난하는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스는 평소보다 더 당당한 듯한 데베르를 흘깃 올려다봤다. 시종이 건네는 샴페인 잔을 물린 그는 커다란 연회장의 기둥 곁에 베스를 세웠다. 무도회를 등지고 선 데베르 덕분에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베스는 짧게 숨을 뱉어냈다.
“춤출 생각은.”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데베르 공작님.”
다가온 남자 하나가 조심스레 데베르의 말을 끊었다. 황제의 직속 보좌관임을 상징하는 금색 커먼버드를 입은 그는 뭐라 데베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얼핏 저를 내려다보는 데베르와 눈이 마주친 베스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신은 뾰족한 구두코에 얼마간 눈을 박고 있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여기에 가만히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당부하는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베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러겠노라 답을 대신했다.
“실없는 놈들하고 말 섞지도 말고.”
과연 누가 추문이 붙은 제게 말을 붙일까. 베스는 실없는 그의 당부를 흘려들으며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미덥잖은 대답을 확인하고 나서야 데베르는 보좌관이 사라진 연회장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데베르라는 잠깐의 가림막마저 사라진 베스는 동물원의 동물이 된 마냥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평판을 들어야만 했다. 데뷔탕트를 했을 무렵엔 베스에게 관심을 보이던 영식들도 저들끼리 수군대며 눈길만 던질 뿐, 감히 다가올 엄두는 내지 못했다. 입 떼기 좋아하는 영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스는 졸지에 사람들의 눈요기가 된 참담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천정을 가득 메운 샹들리에의 화려한 조명 하나하나를 세는 동안 무도회의 음악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데베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리를 지어 담소를 나누는 연회장의 손님 중 침묵을 지키는 이는 베스 한 명뿐이었다.
베스는 가만히 구두코를 까딱였다. 적어도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이곳에 있으라는 약속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때, 베스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안녕하세요, 베스 양.”
베스는 갑작스런 황자의 등장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급히 무릎을 까딱였다. 잠시 사그라들었던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몰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베스는 그의 등장이 불편하기만 했다. 이번엔 황자와 양녀. 뜯기 좋은 가십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전 이런 시선에 익숙해서요.”
아더는 허공을 향해 능청스레 눈을 찡긋하더니 베스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렸다. 옅은 갈색빛의 슈트를 입은 아더는 베스트 단추까지 단정하게 잠근 모습이었다. 그를 향한 흠모 어린 영애들의 시선들이 꽂혔지만, 아더는 손에 든 샴페인 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음, 그러시구나.”
아더는 찰랑이는 샴페인을 몇 번 손안에서 흔들며 손장난을 하다가 슬쩍 베스를 쳐다봤다.
“무도회 파트너는 어렵다고 하셨지만, 잠깐의 말동무 정도는 허락하시겠죠?”
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장난에 진심을 숨기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베스 양의 파트너가 돌아올 때까지만요.”
아더는 광활할 만큼 커다란 황궁의 연회장을 휘 둘러봤다.
“이 시끄러운 곳에서 저 혼자만 입 다물고 있긴 너무 심심해서요.”
아더는 그러겠냐는 뜻을 담아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을 담아 몇 번 눈을 굴리던 베스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뭐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자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아더는 제법 근사한 미소로 화답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지만, 먼저 입을 뗀 건 으레 그렇듯 아더였다.
“저희 아버지도 어머니를 여기서 만나셨다고 해요. 그때도 사절단을 환영하는 무도회 중이었는데, 어머니가 한눈에 들어오셨다고…. 뭐, 후처이니 자랑할만한 건 아니지만요.”
아더는 그새 바짝 마른 입술을 샴페인으로 가볍게 축였다.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마음을 자꾸만 선득하게 만들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은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런저런 소문은 많았지만, 아버지가 저희 어머니만큼은 꽤 진심으로 사랑하셨거든요.”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어 주는 시선의 온기 때문이라면 꼴사납다 비웃을까.
“선황께선 저희 어머니만 사랑하셨어요. 저까지는 아니고.”
아, 이 말은 실수였나. 아더는 눈썹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어쩌면 일렁이는 건 그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베스 양도 신경 쓰지 마세요. 다 허울뿐인 인간들이니까.”
괜스레 연거푸 들이킨 샴페인은 어느새 동이 나 있었다. 쟁반을 들고 지나가는 시종에게 손짓하려는 순간, 연회장의 음악이 급히 바뀌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브리틴 사절단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트럼펫이 몇 번 우렁차게 울려 퍼지더니, 이내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쩍 벌어졌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고개도 함께 문가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넥서스와는 조금 다른 의복을 입은 사내들이 열을 맞춰 연회장의 카펫을 밟고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로 들어오는 건 통상적으로 브리틴 왕국의 친위대였다.
“젠장.”
빈 샴페인 잔을 든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채 선봉으로 들어오는 자는 아더가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스스로를 친위대의 말단이라 소개하며 건방진 말을 지껄인 그자.
“브리틴 왕국의 군대장, 칼론. 넥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지금은 자신을 군대장이라 소개하며 호이든 앞에 무릎을 꿇는 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