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빌어먹을 넥서스 귀족 놈들!”
벌컥 내지른 콜린스의 고성에 베스는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급히 옹송그렸다. 바짝 오그라든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베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몇 번 숨을 골랐다.
웬만해선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콜린스도 예사 화가 솟구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아껴서 그런 거라는 걸 알면서도, 베스는 갑작스런 큰소리에 불안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자꾸만 손바닥을 갉작거렸다.
끔찍한 버릇이었다.
병원 바깥에선 이런 세 사람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다는 듯,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연합국과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니만큼,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웨인의 거리는 이미 인파로 즐비했다. 그 인파들이 내는 즐거운 소리가 눈치 없이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전 괜찮아요.”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이것뿐이었다.
몰리 부부 내외도 이런 베스의 대답에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침음만 삼켰다. 클리프 가에서 전담 간호를 철회하겠다는 기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데베르 공작은 이 추문을 해명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클리프 가는 불필요한 스캔들을 가져갈지언정, 가주의 중독 증세에 대해선 함구하겠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이미 베스에겐 선택권은 없었다.
“언제든 우린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말한 희생은 고작-”
고작 이딴 것이 아니란다. 그리 말하려던 부인은 제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 제국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방식으로 그 세력을 키워나갔던가. 그리고 그 속에서 데베르는, 그의 가문 클리프는 어떤 공을 세웠던가.
몰리 부인은 넥서스의 유일한 공작부인으로써, 그리고 군대장의 유일한 병력을 아는 병원장으로서 베스만큼이나 데베르 또한 보호해야 하는 처지였다. 진절머리 나는 웨인 계급의 가장 꼭대기에 앉아 있는 주제에 입바른 소리는 잘도 지껄였으면서, 마음으로 낳은 딸아이 하나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무너지게 했다.
“너를 보내선 안 됐는데….”
뒤늦은 자책을 읊조리는 부인의 손을 베스가 살며시 잡아 왔다. 평소보다 해쓱한 얼굴을 한 베스가 살짝 웃어 보였다.
“저 말고도 비밀리에 귀족 부인들의 전담 간호를 돕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아요.”
어떻게 하면 부인이 조금이라도 안심할까, 고민하던 베스는 할 수 있는 만큼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때마침 거리를 행진하는 연주단의 음악 소리와 함성이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왔다. 그 환성에 베스의 목소리가 묻혔다.
“전 운이 조금 없던 것뿐이에요.”
그래, 그뿐이다. 운이 조금 없었을 뿐.
베스는 넘쳐나는 상념을 그렇게 단념시켰다.
감히 데베르 공작의 밀회 상대로 떠오른 백작가의 양녀를 보기 위해 병원은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베스 간호사는 브리틴에서 온 응급환자만 보도록 해요.”
몰리 부인은 베스를 끝 병실로 밀어 넣곤 쓸데없이 머리를 기웃거리는 귀부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부인들께선 제가 조금 더 편하시겠죠.”
끝까지 자신을 흘깃거리는 무리를 이끌고 사라지는 몰리 부인의 뒷모습을 보던 베스는 복도에 있던 불청객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축제의 첫날이었다. 술집도 아닌 병원에 타국의 환자가 벌써부터 올 일은 없었다. 쉬라고 해도 쉬지 않을 제 성정을 알기에, 몰리 부인이 적당한 핑계로 자신을 배려한 것이란 걸 베스도 알았다. 하지만 밀려오는 무력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스는 적막한 병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는 병실에 숨어 있는 것뿐이라는 게 한심하기만 했다.
말문이 트인 대신 발목이 붙잡힌 느낌이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다. 대신,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는 잃는 법이지.’
할멈은 그녀의 ‘아가’가 유난히 시무룩해 보일 때면, 그런 말로 다독이곤 했다.
‘넌 잃은 게 많으니 얻는 것도 많을 거다.’
꼭 그 뒷말을 덧붙이곤 했다. 할멈 자신은 빛이라곤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약방에 틀어박혀 잔뜩 취한 귀족들에게 주사를 놓는 게 전부면서, ‘아가’에게는 언젠가 이곳을 벗어날 그 날을 말해주곤 했다.
그럴 때면 베스는 할멈은 나와 함께 가지 않을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할멈의 손바닥에 무엇이라도 쓸라치면, 그녀는 노쇠한 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잽싸게 손을 물렸다.
‘난 네 가족이 아니다.’
무정할 만큼 매정할 말이었다.
‘가족도 있는 녀석이 왜 이리 청승이야.’
하지만 할멈은 아가가 상처받지 않게 하는 법을 알았다. 그래서 속상하지 않았다.
할멈은 지혜로웠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목소리와 가족을 잃은 대신, 몰리 공작 내외를 만났으며 아이네스와 딕시, 그리고 병원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나오지도 않을 답을 찾으며 베스는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매 순간 눈을 뜰 때마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절그럭거리며 제 몸통에 매여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만큼이나 베스의 마음도 새카맣게 가라앉고 있었다.
“베스 아가씨.”
낭랑한 목소리가 어둑한 병실을 건너왔다.
“루카.”
루카는 그새 조금 더 키가 자라 깡총해진 발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부지런히도 흐르고 있었다. 그저 이대로 멈춰버리고 싶은 베스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드레스 가져왔어요, 아가씨.”
루카는 뛰어왔는지 코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린 티가 물씬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 루카의 손에 들린 드레스 상자를 받아들던 베스는 실수인 척 소녀의 소맷자락을 슬쩍 들췄다.
“엇.”
“응? 왜 그러니?”
베스는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팔뚝의 멍을 들켰을까 봐 동그래진 루카의 눈이 안쓰러웠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장난스런 물음을 던졌다.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손을 휘휘 내젓는 루카를 보던 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거짓으로 웃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저조차도 믿을 지경이었다.
“오늘이 공식적인 마지막 사교 행사래요. 아가씨는 알고 계셨어요? 오는 길에 그 주근깨 많은 아가씨 친구를 만났거든요. 근데 어찌나 아가씨 드레스에 간섭하는지, 어휴.”
상처를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해 안심했는지, 루카는 그새를 못 참고 재잘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루카보다 한 계단 뒤에서 내려오던 베스의 눈이 멀쑥하게 솟은 소녀의 목 언저리를 훑었다. 역시나 얼핏 드러난 목덜미 아래가 푸르죽죽했다.
함께 숙소를 향해 가던 베스는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늘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던 수송 차량 옆에 평소에 보지 못한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가 꺼진 채 세워져 있었다. 반질한 윤이 나는 검은색 차는 인장이 없어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루카.”
“네?”
베스는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황궁 연회장은 아이네스가 함께 가기로 했어. 오늘 웨인에 볼거리가 많다더라. 저택으로 바로 돌아가지 말고 구경하고 놀다가 가, 알겠지?”
“저, 저는 받을 수 없어요.”
겨우 그 동전 하나가 뭐라고 사색이 된 루카의 머리를 베스가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내 부탁이야. 난 오늘 놀지 못하니까. 하워드 백작님도 오늘은 사절단 환영식에 참석하실 거야. 저택엔 아무도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놀다가 가.”
우물쭈물하던 루카는 “얼른” 하며 재촉하는 베스를 보더니, 냉큼 동전을 받아들곤 허리를 꾸벅 숙였다. 베스는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보던 루카가 결국 신나게 웨인 중심가로 뛰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자신을 지켜보는 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 문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느릿하게 열렸다. 가로등을 등진 길쭉한 그림자가 베스의 발치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베스는 피하지 않았다.
“내가 그리 간절하진 않나 봐.”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남자는 전장에서의 모습과 똑같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훈장 대신 행거칩이 꽂혀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그의 손엔 병원장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소식지가 들려 있었다. 지난밤의 정염 따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공작의 얼굴은 애인이 아닌 타인을 보는 것처럼 무감하기만 했다.
데베르는 손안의 소식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추문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만의 특권이었고, 그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올 수 있는 타고난 여유였다.
그건 베스가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 추문에서 널 구원할 유일한 사람인데.”
데베르의 시선이 베스의 품에 들린 드레스 상자를 향했다.
“하지만.”
그가 미소 지었다. 잘 벼린 칼 같은 미소였다.
“안타깝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
다가오는 그의 정갈한 구둣발엔 조금의 조급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남자의 향이 더 짙게 풍겨왔다. 건조한 겨울바람을 닮은 향은 지난밤 그의 품 안에서 헐떡이던 베스를 숨 막히게 몰아붙인 것이기도 했다.
“네 선택에 대한 대가니까.”
데베르는 망설임 없이 베스의 네크라인 언저리 카라 깃을 젖혔다. 옷에 가려져 있던 그의 흔적은 여전히 하얀 살결 위에 남아 있었다.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잖아. 안 그래, 베스 제인스 양?”
데베르 클리프는 옷을 들춘 손을 다정하게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 까닥이는 손끝도 함께였다.
“잡아. 네가 좋아하는 신사 흉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