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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04화 (104/206)

104화

라프넬은 어느 명화 속의 여인처럼 앉아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한치도 굽히지 않은 채, 눈동자는 창밖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의미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 손에 찻잔 대신 소식지를 든 그녀는 꼭 전장에 나간 연인을 기다리는 이처럼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라프넬은 아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서 몇 시간을 하릴없이 앉아 있는 이유였다. 티파티에 베스 제인스가 백작가 영애 신분으로 초대되었다는 걸 말해주러 온 이후, 아더의 궁에 온 건 두 번째였다. 물론, 어릴 적에는 이곳이 그녀의 거처나 다름없었던 때도 있긴 했지만…. 모두 의미 없는 기억일 뿐이었다.

“공주님, 황자님께선 아침 일찍이 클럽에 가셔서-”

“클럽?”

라프넬은 나직이 되물었다. 이 흐린 아침 댓바람부터 영식들의 클럽이라니. 수가 뻔한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또 아더 메이너는 도망치는 거겠지. 그 옛날처럼.

“오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 걱정 말렴.”

“그게 아니오라-”

“내가, 내 가족을 기다리는 것까지 허락받아야 할까?”

“송구합니다, 공주님.”

대번에 날카로워지는 공주의 목소리에 시종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고 사라졌다.

또다시 커다란 아더의 응접실엔 라프넬 홀로 남았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프넬은 뻐근할 만큼 곧게 세운 허리를 둥글게 굽히곤, 테이블에 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이 부스스 흩어져 내렸다. 꼴사나운 표정을 숨겨주기엔 제격이었다. 애초에 그 누구도 보지 못할 표정이긴 하지만.

라프넬은 너무 오래 쥐고 있어 끄트머리가 구겨진 소식지를 테이블에 던졌다. 푸른 눈동자는 이젠 외운 거나 다름없는 짤막한 기사를 마저 읽다, 이내 감겼다.

“내가 여기로 올 줄 알고 도망친 거지?”

듣는 이 없는 물음이었다.

라프넬은 바깥 정원의 커다란 시계탑을 흘깃 쳐다봤다. 시침은 어느새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렴.”

라프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미 정갈한 드레스는 더 나무랄 것 없이 단정했지만, 그녀는 구겨지기 쉬운 옷소매 자락과 치맛단을 습관처럼 정성스레 매만졌다.

“잠시 산책해야겠어.”

곁으로 다가온 벨을 향해 라프넬이 말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웨인은 가장 만개한 봄이 오면 으레 전례 행사처럼 비바람이 기승을 부리곤 했다.

곧 초여름이 온다는 신호였다.

라프넬은 끝단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더의 후원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온실 정원과 달리, 거칠 것 없이 폭풍을 온몸으로 밤새 견딘 아더의 후원은 건재했다. 오히려 물기에 젖은 푸른 나뭇잎들은 더 싱그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이 약간은 샘나면서도, 또 적당히 그녀의 마음을 기껍게 했다.

라프넬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후원 구석의 오솔길로 향했다. 호젓한 수풀길은 공주의 정원으로 향했다. 라프넬과 아더 둘 다 어렸을 적, 자신이 공주이고 황자라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을 그 무렵에는 발이 닳도록 뛰놀던 길이었다.

라프넬은 뒤따르는 벨까지 물린 채, 홀로 들어섰다. 구두 굽에 맞닿아 부서지는 나뭇가지의 잔 소음이 적막한 사위를 깨우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 흔치않은 고요함에 살며시 눈을 감을 때였다.

“자, 여기 봐야지.”

웬 굵직한 목소리에 라프넬의 눈썹이 모여들었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여기. 읏차, 한눈팔면 안 되지?”

라프넬은 눈앞의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최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엔 건장한 남자 하나와 그의 허리께에도 오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한 무리를 이뤄 걸어오고 있었다. 쫑알거리는 아이들의 높은 목소리가 새소리처럼 오솔길 위로 울려 퍼졌다.

갓길로 새는 아이 하나를 안아 올린 남자가 라프넬은 발견하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탓에 품에 안긴 아이의 몸도 함께 라프넬을 향해 기울어졌다.

“오늘부터 브리틴 사절단을 환영하는 축제가 있습니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게 넥서스 황궁을 ‘아무나’ 쏘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닐 텐데.”

라프넬은 입꼬리를 빙긋이 올린 채 답했다. ‘아무나’에 방점이 실린 답을 눈치 빠른 남자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난감한 듯 남자는 웃으며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곧 그의 제복 안자락에서 통행 허가증이 나왔다.

“허가는 받았는데…. 이 길은 포함되지 않았나 봅니다.”

민망한 듯 샐샐거리는 남자를 지나치며, 라프넬은 그가 걸어온 오솔길 끝을 턱짓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건 이곳이 아니야.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내 정원이나 보다 가는 것뿐이고.”

툭 튀어나온 날 선 목소리에도 남자는 씩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저 노상 우렁찬 목소리를 높이며 온갖 곳으로 시선이 향하는 아이들을 불러올 뿐이었다. 병아리처럼 뒤를 따르는 아이들을 흘깃 본 라프넬의 걸음은 망쳐진 제 정원으로 향했다.

보란 듯이 금이 간 온실 정원의 통창 너머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라프넬은 무심한 얼굴로 남자를 돌아봤다.

“때를 잘못 찾은 거 같긴 하지만.”

남자는 빙글거리던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정원을 둘러봤다. 가무잡잡한 얼굴과 장대한 기골 탓인지 웃지 않는 남자의 얼굴은 무뚝뚝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가 돌연 정원을 향해 걸음을 뗐다.

“뭐 하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라프넬을 향해 남자는 다시 한번 똑같은 대답을 뱉었다.

“여전히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라프넬은 이젠 대놓고 남자를 경멸 어린 눈길로 쳐다봤다.

“내게 아부 떨어봤자 일개 친위대인 네게 떨어질 건 없어. 하지만 건방 떨어서 좋은 것도 없지.”

“절 기억하시네요.”

남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뒷짐을 졌다.

“아더 사령관님과 같은 말씀도 하시고요.”

잔뜩 가시를 세운 공주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전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정원을 둘러봤다.

“간밤의 폭풍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요?”

몇 번 입술을 짓씹던 라프넬이 입술을 뗐다.

“…뿌리가 약해서라던데.”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아더도 없는 지금. 누구에게든 뱉어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길가의 개한테 말을 거는 것보단 나을 성싶어서 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말에 남자는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프넬의 드레스 끝단으로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레 뻗어오는 손에 라프넬은 더러워진 제 드레스 자락을 가리키는 줄 알고 얼른 발을 뒤로 뺐지만, 남자의 손이 향한 건 있는지도 몰랐던 발치의 노란 꽃 한 송이였다. 흙으로 잔뜩 얼룩진 꽃잎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지만, 그 뿌리만큼은 정원 밑바닥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 꽃을 흔들어 뽑은 남자는 정성스레 꽃잎을 털더니 라프넬에게 내밀었다.

“언제든 살아남는 건 있기 마련이죠.”

남자는 드레스 자락만을 꼭 쥔 라프넬의 손끝을 조심스레 붙잡아 올렸다. 감히 공주의 손을 함부로 잡다니. 누군가 보면 기겁할 짓이었지만, 라프넬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꽃잎을 튕겨내더니, 라프넬의 손바닥 위에 샛노란 꽃을 올렸다. 그러곤 주문처럼 매끄럽게 브리틴어를 읊조렸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라프넬의 입가가 비틀렸다.

“당신이구나. 내게 꽃을 보낸 사람이.”

“무슨 말씀이신지.”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내가 못 알아들으리라 생각한 건가?”

무언가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브리틴에서 유명한 시구입니다. 그저 여인에게 하는 인사치레로도 많이 하고….”

턱을 살짝 치켜든 남자가 제 아래에 있는 공주를 슬쩍 내려다봤다. 하얗고 사랑스러운 공주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고슴도치처럼 굴고 있었다.

“청혼할 때도 많이 하죠. 물론, 지금 저는 인사를 한 거지만.”

그때, 햇빛 한줄기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짙은 먹구름을 뚫고 나온 기꺼운 빛 한 줄기였다.

라프넬은 분수에 반사되는 쨍한 빛무리에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마 공주님을 흠모하는 브리틴 녀석이 있었나 봅니다.”

느릿하게 굴러온 먹구름이 다시 햇빛을 가렸을 땐, 남자는 이미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친위대 말단이라 이젠 브리틴 귀족 꼬맹이들을 데리고 황궁 도서관으로 가야 하거든요.”

아이들은 그새를 못 참고 정원 바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남자는 가볍게 뜀박질하더니 마지막으로 라프넬을 돌아봤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거엔 공주님도 포함입니다.”

건방진 미소가 라프넬의 눈에 걸렸다.

* * *

“정말 말도 안 돼요!”

답지 않게 흥분한 몰리 부인이 손에 들린 소식지를 테이블로 집어 던졌다.

병원장실엔 몰리 부인과 콜린스 공작, 그리고 베스가 앉아 있었다. 침통한 표정의 콜린스는 테이블 위로 내던져진 소식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세상에, 이제 겨우 데뷔탕트 한 애를 이따위 가십지에서…!”

부인은 의자 팔걸이에 기댄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네가 대체, 데베르와, 무슨.”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가 소식지 속 기사의 전부였다.

“누가 봐도 이건 데베르와 베스 얘기잖아요. ‘갑자기 사교계에 나타난 이단아 같은 양녀’가 베스 아니면 누구겠어요? 데베르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하도 단골 인사니.”

참지 못한 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추문도 이런 추문이 없구나. 너와 데베르가 불순한, 아, 말을 말아야지.”

차마 데베르와 베스가 불순한 관계라는 말은 뱉지 못하겠는지, 부인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굳이 병원까지 직접 와서 영양제를 찾는 귀부인들이 제법 있었더랬다. 흘깃흘깃 누구를 찾는 꼴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베스를 찾는 것일 줄이야.

“밤마다 밀회했다는 부분은 우리가 해명할 수 있잖아요, 여보.”

콜린스는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소식지에는 데베르와 베스가 불순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밤마다 그의 저택 혹은 회사에서 은밀한 밀회를 가진다는 말이 원색적으로 쓰여 있었다.

몰리 부인의 말대로 클리프 가문의 비공식적인 주치의 역할을 한다고 얘기하면 추문은 어느 정도 일단락될 성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약쟁이란 데베르의 멸칭은 모두가 아는 것이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멸칭은 군대장인 그를 더 강해 보이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약물 중독을 치료받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넥서스 군대의 주축인 데베르 공작의 면면을 밝히는 것은 제국의 군사력을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고작 개인의 누명을 벗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부인, 귀족들의 전담 간호는 문서조차 존재치 않는 비밀이란 걸 알잖소.”

세 사람 사이의 짧은 침묵을 깬 건, 우편 배달부가 가져온 서신 한 통이었다.

짧은 기별을 읽어나가던 부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클리프 가문이 전담 간호를 취소한다는구나. 모든 것은….”

이젠 부인의 목소리마저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말했던 대로 비밀에 부쳐달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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