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데베르는 제 품 안에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작은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봤다. 밤사이 바짝 마른 머리칼에선 그와 같은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데베르는 고개를 숙여 말간 베스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탁한 눈동자가 여자의 어깨너머 허공을 배회했다. 끔찍하게도 오늘 비가 내리다니. 간헐적으로 창을 때리던 빗줄기는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여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아, 어쩌면 더 어울리려나. 전장에서의 숲길, 그 버석거리는 흙바닥에 생채기 난 맨발로 서 있는 모습조차 어울렸던 여자니까.
베스의 허리를 감고 있던 데베르의 손이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군살 하나 없이 바짝 메마른 뱃가죽을 지나, 보지 않아도 그가 남긴 울혈 자국이 낭자할 둔덕을 지나, 마지막으로 갸름한 턱을 지나고 나면….
거칠한 그의 손끝에 물기 어린 입술이 닿아왔다. 살짝 열린 틈에서 나온 옅은 숨의 온기가 규칙적으로 그에게 닿았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잠든 여자에게선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는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처럼 베스의 입술을 아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미친 새끼.
데베르는 조소했다. 고작 이 정도의 온기에도 제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더없이 경멸스러웠다. 애써 내려간 손은 다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족쇄치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맥없이 늘어져 있던 여자의 어깨가 움칠하더니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끄트머리만 잡는 모양새였다. 무얼 고민하는지 몇 번 바르작거리더니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데베르는 때에 맞춰 눈을 감았다. 순진한 척하는 꼴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까 전보다 선명하게 닿아 오는 여자의 숨결만이 유일한 어려움이었으니까.
시트가 바스락거리더니, 이내 매트리스가 작게 출렁거렸다. 순순히 손을 물린 데베르는 주저앉은 여자의 튀어나온 날갯죽지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흐린 여명에도 유난히 새하얀 나신에 새겨진 자국은 선명했다.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는지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은 유달리 작아 보였다.
더듬거리며 침대 헤드를 짚는 여자의 손등에 파란 힘줄이 돋아났다. 제 몸 하나 지탱하는데도 힘줄이 돋는 주제에 뭘 믿고 찾아온 건지. 무슨 말인가 뱉으려던 데베르의 입술이 이내 굳게 닫혔다.
겨우 일어선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그의 것이 분명할 흔적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게 들이켜는 숨이 데베르에게도 들렸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데베르는 잔뜩 지친 뒷모습을 한 채 욕실로 걸어가는 베스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정말 그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조차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녹초가 된 건지 여자는 근처에 몸을 가릴 가운이 있는데도 손을 뻗지 않았다. 꼭 그에게 죄책감이라도 안겨주려는 것처럼 그가 우악스럽게 남긴 손자국으로 가득한 몸을 한치도 가리지 않은 채 짧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하….”
그제야 데베르는 몸을 돌려 높이 뻗어 올라간 천정을 올려다봤다. 적당한 고양감과 부유감은 정신을 더 선명하게 만들 뿐이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어.’
안타깝게도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장담할 수 있을까. 베스 제인스가 곁에 온 이후 그에겐 수많은 변수가 생겨났으니,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었다. 가령 죄책감이라거나, 혹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라거나.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베르는 지난 밤이 고스란히 담긴 시트를 내려다봤다. 그 사이, 바깥은 더욱 심하게 비바람이 내리치고 있었다. 욕실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쯤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세차게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날씨라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엔 그의 여자가 얌전히 잠들어있었다.
“베스.”
나직한 목소리가 낮게 욕실을 울렸지만, 여자는 미동이 없었다. 욕조 바깥으로 길게 뻗은 팔에 고개를 기대고 잠든 여자는 그의 품 안보다 차가운 욕조가 더 편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욕조의 물을 튕겨냈다. 장난스런 손짓이었지만, 가라앉은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때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홀가분한 얼굴로 날 뒤틀리게 만들지 마. 아직은 그 뒷말을 삼킬 여유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이하게 틀어지는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정직하게도 지난 밤과 똑같이 반응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잠든 여자를 한 손에 일으켜 세워 제 맘대로 굴고 싶다는 저열한 욕망이 그를 충동질했다.
얼마든지 더 진창으로 굴 수 있었다. 바닥을 기는 것쯤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데베르는 조금은 인내해보기로 했다. 어쨌건 베스 제인스는 그에게 있어 흔치 않은 존재이니까.
아니, 유일한 존재니까.
식은 욕조 물만큼이나 차갑게 굳은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춘 데베르는 여자의 귓바퀴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일어나, 베스 제인스.”
네가 선택한 이 지독한 현실을 마주 봐야지.
클리프의 인장이 찍힌 차 하나가 성의 뒤편에 있는 늑대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칠게 몬 차 머리가 아무렇게나 숲 어귀에 멈춰서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사냥총을 든 데베르였다.
그 언젠가, 카시우스는 어린 아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늑대 새끼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법부터 가르쳤었다. 카시우스의 허리께 정도밖에 오지 않던 어린 데베르는 눈물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늑대 새끼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카시우스는 알았다. 그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늑대 새끼’라 불리고 있고, 그 아들조차 자신의 멸칭이 ‘늑대 새끼’란 걸 눈치챘다는 것을.
카시우스는 데베르에게 자기 자신을 죽이는 법을 가르친 거였다. 그는 그런 아비였고, 그런 공작이었으며, 그런 군대장이었다.
그리고, 데베르는 자신이 아버지의 망령을 끼고 사는 자임을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이토록 비가 내리퍼붓는 날, 늑대가 숲 어귀를 돌아다닐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데베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숲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엉망으로 솟아오른 바지 앞섶을 보자 미치광이 같은 웃음이 새 나왔다.
짧게 어깨를 떤 그는 손에 든 사냥총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커다란 나무 등치에 이마를 기대자, 마치 환영처럼 베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욕조 바깥으로 뻗은 손끝에서 핏방울처럼 떨어지던 물방울이 어지러운 그의 머릿속에도 똑, 똑 계속해서 떨어졌다.
“베스….”
비어버린 손은 자연스레 아래를 향했다. 고통에 찬 듯한 낮은 신음이 빗소리에 섞여들었다. 흉흉하게 솟은 기둥을 부여잡은 손등에도 비슷하게 핏줄이 돋아났다. 데베르는 계속해서 베스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등에 닿았던 부드러운 손끝을 기억했다. 그건, 한때는 목소리를 대신해 그에게 새겨졌던 인장 같은 것이었다.
속죄하지 못할 죄를 씻기 위해 비는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모두 부질없는 것일 텐데도.
데베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그를 닮은 짙은 잿빛이었다.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달아오르기만 하는 열기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역겨운 새끼.”
홀로 하는 속죄식이었다.
집사는 비에 흠뻑 젖은 꼴로 웨인의 저택으로 들이닥친 가주를 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간밤에 어딜 갔는지 사라진 가주는 늦은 오후가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질척이는 물 자국을 길게 남기며 계단에 올라서는 데베르를 향해 집사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데베르는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대신 일별을 던지자, 집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데베르의 걸음은 침실이 아닌, 복도의 맨 구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흐린 날씨 탓에 잔뜩 음산한 기운이 풍기는 서재 테이블엔 누리끼리한 종이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무신경하게 봉투를 뒤집어 털자, 하얀 약 몇 알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데베르는 그걸 보면서도 제 손길에 뜯겨나가던 베스의 옷가지 단추를 떠올렸다. 정말 미친 꼴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욕을 짓씹는 턱의 근육이 솟아올랐다. 이미 반쯤 빈 위스키병에 약을 집어넣고 흔들자, 작은 알약이 포말을 만들어내며 피어올랐다.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모습은 샛노란 알코올 속에 떨어진 작은 수류탄 같기도 했고,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의 자취 같기도 했다.
비에 젖어 척척한 손이 위스키의 주둥이를 잡아챘다.
목구멍이 마비라도 됐는지 이젠 알싸한 느낌마저도 들지 않아, 데베르는 연거푸 고개를 젖혀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 속에 섞인 약의 미미한 쓴맛마저도 이젠 달갑기만 했다. 한참을 입에 머금은 약 기운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열린 서재의 바깥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그곳엔 주름진 얼굴 사이에 잔뜩 근심을 끼운 집사가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
데베르는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는 집사가 테이블 위에 올린 종이를 보고서도 열어보지 않았다. 대신 장에 진열되어 있던 새로운 위스키병을 딸 뿐이었다.
“또 공작이 미쳐간다는 소문이라도 실려있던가요.”
답 없는 집사를 보던 데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흠뻑 젖은 셔츠는 근육 진 그의 골격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잘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그러기엔 클리프 가는 지나치게 건재할 텐데요.”
“그게 아니라….”
집사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다시 한번 굳게 다물었다가 어렵사리 열었다.
“‘그분’께서….”
그분.
탁, 데베르의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올려졌다. 어느새 물 자국으로 끄트머리가 얼룩진 종이가 술병을 대신해 그의 손에 들렸다.
짧은 기사를 읽어나가던 데베르의 입가가 휘어졌다.
“…더럽게도 노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