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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01화 (101/206)

101화

성급하게 내딛는 데베르의 걸음과 함께, 베스의 등이 이내 쿵, 하고 문에 부딪혔다. 데베르는 베스를 안은 팔을 조금 더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짧은 틈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데베르는 그 찰나의 여유도 없는지 다시금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여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빠듯하게 맞췄다.

밀어붙이는 그의 입맞춤 때문에 베스의 고개가 자꾸만 옆으로 밀려나자, 데베르는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 올려 작은 얼굴을 고정했다.

“움직이지 마.”

잔뜩 힘줄이 불거진 손이 베스의 귓바퀴와 한쪽 뺨을 거세게 감쌌다.

베스는 제게 퍼부어지는 열기를 오롯이 감내하느라, 질끈 내리감은 눈을 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몸이 다시 한번 들썩이더니, 등에 닿아 있던 서늘한 촉감이 사라졌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잠시 멀어졌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베스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흣.”

이내 쇄골 언저리를 지분거리는 입술에, 베스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그는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여자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만-”

베스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 듯, 데베르는 그녀를 집어던지듯이 침대로 떨어뜨렸다. 출렁거리는 매트리스의 움직임과 함께 베스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순백의 침대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 모습을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한쪽 손을 여자의 얼굴 옆에 짚은 데베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 아래에 누워있는 베스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분명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침대에 몸을 뉘었으면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베스는 처음 방 안을 들어왔을 때보다 흐트러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올렸다. 얕게 떨리는 손이 그의 목덜미를 감싸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선택한 일. 베스는 이 침실을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저 스스로 얕은수를 떠올린 그 순간부터 약간의 수치심이 밀려올 때마다 그 말을 곱씹었다.

애인이라면, 그것도 눈앞의 이 남자의 애인이라면 어떻게 굴어야 하는 걸까. 보통의 애인들은 서로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밀려드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설픈 흉내에 그가 비웃을까 걱정도 스쳤지만, 모두 쓸모없는 생각이란 걸 잘 알았다.

결국 우리는….

베스는 떨리는 입술을 작게 벌렸다.

“…기쁜가요?”

그 말에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지,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창가를 한 번 향했다. 굳게 닫힌 입술만큼이나 무감한 눈동자는 탁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베스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전혀.”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데베르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전의 거친 입맞춤보다 한결 부드러웠지만, 훨씬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고요한 방 안엔 질척한 타액 소리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귓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은 매끈한 목덜미를 스쳐, 반쯤 열린 원피스 단추 사이로 들어갔다. 덜 마른 머리카락으로 축축이 젖은 어깨에 뜨거운 손이 닿아왔다.

덜컥 겁이 밀려온 베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원피스 단추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인내심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젠장.”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단추 몇 개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뜯겨나갔다. 베스의 손이 말려 올라간 치마와 뜯어진 앞섶 중 어디를 가려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자, 마디 굵은 남자의 손가락이 하나씩 얽혀들었다.

데베르는 여자의 머리맡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남은 한 손은 순식간에 슬립 차림이 된 베스의 허리께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절로 오그라드는 작은 몸을 적당히 제 무게로 누른 데베르는 베스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게 내가 달게 굴 때 삼키지 그랬어.”

그건 경고였다.

찢겨나간 슬립은 애처롭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베스는 빠듯하게 제 아래를 채운 이질적인 느낌에 입술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깨물었다. 거친 움직임에 저절로 올라간 머리가 침대 헤드에 닿을락 말락 하자, 곧 억센 손아귀 힘이 다리를 붙잡아 내렸다. 더 빼곡하게 맞춰진 접합부에 베스는 뱉지도 못한 탄식을 집어삼키며 어룽진 눈물을 툭 떨구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눈물길을 따라 남자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베스를 보면서도, 데베르는 움직이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더 울었으면. 온몸이 탈진할 만큼 울어버려, 제 품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으면.

데베르는 제 끔찍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잔뜩 메마른 웃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 품 안에서 가릴 것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베스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울음 같은 신음을 참지 못해 흘리면서도, 여자는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이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꾹 다문 채, 제게 무슨 짓을 하건 다 받아들이겠다는 듯 구는 꼴이 데베르를 더 미치게 했다.

“진작 이럴 걸 그랬어.”

차오르는 남자의 허리 짓에 베스의 허리가 허공으로 붕 떴다. 이번엔 신음도 내지 못한 붉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렇지 않아?”

제 흔적으로 얼룩진 여린 몸을 으스러질 만큼 껴안으며 데베르가 속삭였다.

밤은 길었다. 끝날 듯 결코 끝나지 않는 밤이었다.

체력의 한계를 견디다 못해 기절하듯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어김없이 남자의 몸짓에 눈을 뜨는 것의 반복이었다. 나중엔 눈물마저 말라버려, 그저 그의 품에 매달려 성난 그를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마지막이 왔을 땐,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그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베스는 빗줄기가 툭툭, 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자,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 미명과 희뿌연 안개가 어지러이 얽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도 울어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던 베스는 제 허리를 감싼 손을 쥔 채,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밤새 지독히도 저를 괴롭힌 남자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간밤의 열기로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로 늘어뜨린 그는 무르익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이어지는 올곧은 콧대와 단단히 여문 턱은 그가 성숙한 남자이며, 더 나아가 꽤나 매력적인 남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베스가 기억하던 앳된 소년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걸 깨닫자, 베스는 저도 모르게 뻗던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

그만.

베스는 자신을 일깨웠다. 제 몸을 감싼 남자의 손을 치우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빠진 몸은 이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사이로 지난 밤의 흔적이 흘러내리자, 막막할 만큼 아득한 감정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베스는 겨우 침대 헤드를 짚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공작의 전용 욕실이겠지만, 어차피 이 모습으로 복도를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젯밤과 같이 욕조 물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베스는 흐물거리는 몸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아파….”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이 욱신거렸다. 지난밤, 그는 전장에서 첫날밤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베스는 제겐 서운할 자격조차 없음을 잘 알았다.

하얀 나신 곳곳에 그의 흔적이 열꽃처럼 남아있었다. 지워지지도 않는 자국이 남은 제 가슴께를 몇 번 문지르던 베스는 이내 포기하고 욕조 벽에 고개를 기댔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바깥의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지친 그녀를 재우기 시작했다.

제발 잠들지 마. 제발. 일어나 나가야지.

희미해지는 다짐을 읊조리던 혀끝이 점점 느려졌다.

욕조 바깥으로 뻗은 손끝에선 똑, 똑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베스. 베스 제인스.’

베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잠들었던 건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창을 때리는 것 같던 비바람이 지금은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베스는 차가운 욕조에서 얼른 일어나 구겨진 원피스를 대충 몸에 끼워 넣었다. 안개와 비바람으로 희끄무레한 창밖의 시계탑을 노려봤지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욕실을 나가려던 베스의 발이 멈칫했다. 행여 그 남자가 여전히 잠들어 있을까. 아니면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온갖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며 걸음을 뗐지만, 그 긴장이 무색하게 베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텅 빈 침실뿐이었다.

베스는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를 툭 떨어뜨린 채,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전히 축축한 채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 바닥에 널브러진 슬립, 희미한 혈흔 자국.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곤 그곳에 함께 있던 데베르의 흔적뿐이었다. 지운 듯이 말끔하게 사라진 그의 빈자리가 베스의 숨통을 꾹 눌렀다.

행여 꼴사납게 울기라도 할세라, 얼른 제 옷가지를 마저 챙겨 도망치듯 침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젯밤처럼 아무도 없는 복도를 홀로 걸어갔다. 힘이 빠진 다리 탓에 몇 번 넘어졌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니 부끄럽지도 않았다.

오직 부끄러운 건 제 모습 하나였다.

어리석은 선택을 최선의 선택이라 자위하는 제 모습.

빈방에 들어오자마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간호복을 급히 주워 입었다. 아이네스의 배려인지 짐이 모두 독방에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인 시계탑의 시침은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모여있을 연회장 식당으로 가면서 베스는 입술 끝을 당겨 물었다.

단 한 번도 간호복을 제 가면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만큼은 이 찬란한 푸른색 뒤에 제 못난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어? 베스!”

“어머, 너 괜찮은 거니?”

“교수님, 베스 깨어났어요!”

그래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향해 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내 그림자는 볼 수 없게.

그리고, 다시 만날 데베르 당신조차도 내 어둠은 알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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