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멈칫한 베스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그저 본능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안락한 안식처처럼 저를 부르는 그의 성을 향해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걸어갔다. 이번에도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미칠 듯이 쏟아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이곳에 와서 할멈을 만나, 무엇을 물었을까.
보호구역에서 자란 나를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설마 보호구역에 오기 전에도 내가 이곳, 번트에 살았다는 것까지 알까. 그렇다면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눈앞에 선명히 보이던 불빛을 뒤로하자, 베스에게 남은 건 온통 흐릿하고 희미한 것들뿐이었다. 유일하게 확실히 답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할멈이 그냥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답은 아니. 아무리 할멈에 대해 노망이 났니 어쩌니 안 좋은 말들이 뒤따라도 그렇게 갑자기 죽을 분은 아니었다. 하워드에게 붙잡힌 일 년 정도의 공백을 제외하면, 간간이 연락이 닿을 때마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 호통을 치던 편지 속의 필체를 기억했다.
“하워드….”
늘 그렇듯 불행의 불씨는 하워드에게서 피어났을 것이다. 아이는 분명히 데베르 공작 말고도 할멈을 찾던 이가 있다고 했다.
왜 죽였을까. 무엇을 입막음하려고. 나의 출생? 내 어머니의 존재?
버석거리던 가슴이 이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할멈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하워드에게 붙잡혀 수면제나 삼키며 꿈속을 헤맸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하워드가 어머니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기억했다. 어린아이가 도움을 요청해보겠다고 뛰쳐나간 그 짧은 시간. 그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그 끔찍한 작자는 사람 하나를 영영 제 딸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죽였다고.
그 늙고 힘없는 노파를.
베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건 얼마쯤은 분노였고, 얼마쯤은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체 해 봤자, 자신은 겨우 이 정도의 존재라는 게 절절히 와닿을 뿐이었다.
하워드는 덫에 걸린 짐승의 다리를 하나하나 자르듯 베스의 가장 곁에 있는 사람부터 하나씩 사라지게 했다. 브리틴의 명령을 어긴 어머니가 목숨만큼 사랑했던 아버지를 전쟁터로 보냈고, 남편을 잃고 이미 망가진 그녀를 제 딸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만들었다. 베스의 가족을 손쉽게 지워버린 하워드는 끔찍하게도 ‘삼촌’이란 이름으로, 자라나는 소녀의 곁을 맴돌았다. 지난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젠 할멈까지…. 내게 대체 무엇이 남아있지.
베스는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봤다. 허연 손과 달리, 잔뜩 흉이 진 손톱 밑은 색이 거무죽죽했다.
그 순간,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데베르를 떠올렸다. 늘 제멋대로 구는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견고히 자신만의 성을 세우고 살아가는 그 남자.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남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제일 먼저 떠오르다니.
베스는 실소하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 아무것도 없고,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한 내게 남아있는 게 그 남자라 생각하다니.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힘껏 흔든 베스는 제 눈앞에 있는 신기루 같은 점 하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인가. 눈을 찌푸리다 조금 더 다가갔다.
다락방이 있는 이 층짜리 소박한 집.
기억 속의 옛집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집 한 채가 베스의 앞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그마한 오두막까지 보였다. 매일 밤, 오지 않는 소년을 기다리고, 아버지를 기다렸던 그 오두막이.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벌써 꿈이라도 꾸는 걸까. 베스는 가만히 어둠에 잠든 그 풍경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그 오두막의 뒤뜰에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나타난 것은.
베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딱 멈췄다. 불던 바람도, 희미하게 풍겨 오던 풀 향도, 귓가를 간지럽히던 풀벌레 소리까지도. 호흡마저 잊은 베스의 귓가엔 경고음처럼 점점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입술을 벙긋거려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어린 베스의 뒷덜미를 낚아챈 남자였다.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단 말이야.
남자가 한 걸음을 떼는 순간, 베스는 발작하듯 반대편 길로 뛰어갔다. 어릴 때와 똑같은 길이 베스의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젠 대체 누구에게, 누구를 구해달라고 해야 할까.
안 돼. 안 돼.
뒤에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베스는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고 계속해서 내달렸다. 땅이 일렁였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시야도 점점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몸이 한 번 붕 떴다.
남자에게 붙잡힌 건지, 저 혼자 돌부리에라도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연극의 막이 내려오듯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점멸하던 눈앞이 마침내 새카맣게 덮일 때에서야 베스는 안도했다.
꿈이든 죽음이든 어디로든 괜찮으니, 이 현실만 아니라면 좋겠어.
해 볼 수 있는 마지막 바람이었다.
긴 꿈이었다.
베스는 그 어린 날로 수십 번, 수백 번 돌아갔다. 웃으며 아버지의 품에 뛰어오르던 순간은 지겹도록 반복됐다. 하지만 지겨워도 좋았다. 그 지루한 순간 속에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
지금처럼 파리한 모습이 아닌, 발그레한 뺨을 가진 젊은 어머니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스는 제 목소리 따위는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장면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체처럼 늘어진 어머니의 어깨로 다가가는 손이 보였다. 덜덜 떨고 있는 손은 애처로울 만큼 작았다.
‘네가 저렇게 만든 거란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하워드의 음성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다음 장면은 본 적 없는 할멈의 죽음이었다.
시커먼 보호구역의 골목에 이름 모를 이들이 들어간다. 할멈의 위치를 묻는다. 돈에 눈에 먼 작자들은 고작 돈 몇 푼에 할멈이 잠든 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방에 들어간다.
베스는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막힌 것처럼 제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고, 허공만 맴돌았다. 그러다 보면 이내 일을 마친 하워드의 수하들이 나왔다.
지칠 틈도 없이 마지막 장면이 이어졌다.
거대한 잿빛 바다가 보였다. 아니. 그건 눈동자였다. 그녀를 원망하듯 노려보는 흉흉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채가 돌던 잿빛 눈동자는 곧 피로 점점 붉어졌다. 베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의 몸 위로 견고한 그의 몸뚱이가 쓰러졌다. 그리고 거친 숨이 귓가에 선명히 와닿았다. 모든 게 베스에겐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러다 그 숨이 점차 사그라들면, 머지않아 남자의 손은 그녀의 등허리를 죽 훑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장면은 다시 첫 장면으로 이어졌다.
끝나지 않는 꿈이었다.
* * *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이네스가 연신 땀을 흘리는 베스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베스는 사용인들의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듣자 하니 정원을 산책하다 쓰러졌다고 하는데,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게 아이네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톱은 또 뭐람.”
아이네스는 속상함이 가득한 얼굴로, 잠결에도 손톱 밑을 뜯어내는 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에 잠잠해지기도 잠시, 베스는 다시 열에 들떠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잘못…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아이네스는 연신 베스의 마른 팔이며 목덜미를 닦았다.
베스는 꽤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의료봉사의 마지막 날을 앞둔 초저녁까지도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베스가 눈을 떴을 때는, 또다시 컴컴한 어둠 속이었다. 한참을 눈을 깜빡거려봐도 바뀌는 장면은 없었다. 천장의 격자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자, 미지근해진 물수건이 툭, 침대 위로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봐도 거대한 독방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베스는 침대 곁의 설렁줄을 흔들 생각도 안 한 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욕실로 들어갔다.
언제라도 들어올 주인을 기다리기라도 한 건지, 욕실의 욕조엔 여전히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닿은 발끝에서 느껴진 뜨뜻한 감각이 마침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베스는 가라앉았다. 뽀글거리던 기포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일어났다. 헐떡이며 내쉬는 숨 사이로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욕실을 벗어난 베스는 곁에 걸린 원피스 하나를 주워 입었다. 거대한 클리프 성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침실을 나섰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창밖의 풍경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던 침실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베스는 그저 복도에 간헐적으로 걸린 램프 불빛을 따라 걸어갔다.
이 길 끝에 그 남자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늘 맞았으니까.
베스는 제 불행을 믿었다.
복도는 커다란 문 앞에서 끝났다.
똑똑. 힘없는 노크 소리가 적막을 깼다. 들어오라는 허락도,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주저 없이 문을 밀었다. 그러자 작은 틈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베스는 부신 눈을 찌푸리며 더욱 세게 문을 밀었다.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베스는 한참 동안 눈을 가린 손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리 전담 간호사라지만 이 시간에 침실로 오는 건 무례한 일 아닌가.”
봐. 내 불행을 믿는다고 했잖아.
베스는 작게 웃으며 제 꿈속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서 있는 데베르를 올려다봤다.
그래, 저 남자는 늘 저렇게 저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데.
“간호사로 온 거 아닌데….”
며칠 간의 고열로 약간은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베스는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껏 그가 그랬듯이.
코끝에 청량한 그의 향이 닿아왔다. 잠시 숨을 고르던 베스는 그대로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아랫입술 끝에 제 마른 입술을 붙였다 뗐다.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덜 마른 머리에 젖은 어깻죽지로 향하는 게 보였지만, 그는 그 어떤 손길도 내밀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입으로 말해. 나와 무얼 하고 싶은지.”
냉정하다 싶을 만큼 무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베스는 속상하지 않았다.
더 차갑게 굴어줬으면. 이러다 정말 내게 실망이라도 했으면. 그러다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끝났으면….
두 손을 올려 남자의 뺨을 감쌌다. 늘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오늘따라 차가웠다. 어쩌면 제가 너무 열이 올라 그리 느끼는지도 몰랐다. 뭐가 됐건 상관없었다.
이젠 끝을 내야지.
조심스레 남자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아까 전보다 조금 더 깊게 입 맞췄다.
“…우리 애인 사이 해요.”
떨어진 입술 새로 그가 짧은 숨을 뱉어냈다.
데베르는 대답 대신 베스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달아오른 숨이 지척에서 맞닿았다.
베스는 꿈에서 보았던 그 눈을 마주 보며,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하지만, 마지막 말은 남자에 의해 삼켜질 수밖에 없었다. 곧 뜨거운 숨이 베스를 헤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