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뭔가 망설이던 관리인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건… 저희도 잘….”
끝이 애매한 답이었다. 흠, 잠깐 거칠한 수염을 긁던 콜린스는 이내 호탕하게 관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소식 감사하오! 다들 편히 지내겠구먼. 나도 오랜만에 클리프 성도 보고 말이야.”
들뜬 소식은 빠르게 무리에게 전해졌다.
“저녁 만찬은 본채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리인은 자연스럽게 봉사단을 클리프 성의 본채로 안내했다. 본 적 없는 규모의 클리프 성에 다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찬탄을 쏟아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성의 외양만큼이나, 그 앞에 펼쳐진 널찍한 정원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풍겼다.
베스 또한 그 풍경에 넋을 빼앗긴 이 중 하나였다.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누구든 우러러보게 할 만큼 고압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웨인의 저택보다 오히려 이곳이 그 남자와 더 어울려 보였다.
거대한 외벽 가득 빼곡한 유리창은 그들이 쓸 연회장을 빼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은근히 을씨년스럽네.”
“그러게. 불이 전부 환하면 훨씬 예쁠 것 같은데. 주인이 없어서 그런가?”
누군가의 혼잣말에 다른 이가 맞장구를 쳤다.
아직 해가 전부 저물진 않았지만, 층고가 높은 성의 복도는 벌써 어둑했다. 하지만, 그 작은 불만조차 곧 눈앞에 나타난 만찬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에.”
탄식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모두의 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콜린스 공작에게로 향했다. 어서 식사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진즉 알아챈 콜린스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가 준비한 건 아니지만, 마음껏들 드시게.”
고대한 만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전투 같은 식사 내내 수다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들 그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다들 제 말만 쏟아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당장 다음 날 아침부터 진료를 봐야 하니 술은 식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미 그들은 경험해본 적 없는 공작의 만찬에 취해 있는 중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하나둘씩 침실로 돌아갔다. 끝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딕시가 침대 위로 푹 쓰러지고 나서야, 기나긴 만찬은 끝이 났다. 가장 먼저 침실로 돌아온 아이네스가 베스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샴페인이라도 한 잔 있었다면 딕시 쟤는 내일 진료 보기 직전까지 연회장에 앉아있었을 거야.”
베스는 웃으며 아이네스의 어깨 위로 이불을 둘러줬다. 씻고 옷 갈아입는 소리에 다소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고요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베스는 잠든 간호사들의 골골거리는 숨소리와 바깥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잠이라도 왔으면 싶었지만, 어차피 오늘은 그른 일이었다.
하릴없는 시간이 한참은 지났다고 느꼈을 때에서야, 베스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다들 곯아떨어진 탓에 조심스럽던 발걸음은 이내 대담해졌다.
낡은 트렁크의 제일 밑바닥에서 꺼낸 건 잘 다려진 간호복이 아닌 남루한 원피스 한 장이었다. 그걸 주워 입고 제국 병원의 브로치가 사라진 망토까지 걸치자, 베스는 그저 시커먼 그림자 정도로만 보였다. 바라던 그림이었다.
끼익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을 열자, 기다란 복도가 집어삼킬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베스는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낯선 곳이었지만 들어왔던 입구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등치와 조형물의 그림자만을 밟으며 움직이던 베스는 성을 벗어나자마자 뛰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지만, 발은 알아서 기억을 더듬어 주인을 안내했다.
익숙한 골목 어귀에서야 바쁘던 걸음이 멈추어졌다. 벌써 무언가에 취한 이들이라니. 비틀거리며 골목 어귀를 기어 나오는 인영들을 보고 있자니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알싸한 향.
비틀거리는 사람들.
고작 그 두 가지만으로도 자신은 진창으로 빠지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귓가에서 잔뜩 긴장한 호흡이 팔딱거리는 게 들려올 지경이었다. 베스는 다시 한번 단단히 망토를 고쳐맸다. 얼굴을 반쯤 가릴 만큼 푹 뒤집어쓴 망토 사이론 빼꼼한 눈동자만이 보였다.
“어이.”
베스가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 하나가 비칠거리며 손을 뻗어왔다. 베스는 급히 몸을 뒤틀어 남자의 손을 피했다. 하지만, 안도할 틈도 없이 이번엔 개미굴 같은 골목 한구석에서 튀어나온 놈 하나가 베스에게 딴지를 걸었다. 눈을 보아하니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했다. 피해 볼 요량으로 바짝 벽에 붙어섰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 이봐. 여기 처음이지? 뭐, 뭘 원해. 여긴 뭐든 있다고.”
어깨를 잡은 손을 확 패대기라도 치고 싶었지만, 망토 자락을 쥔 탓에 그조차 여의찮았다.
“왜 얼굴을 가려. 보, 보자. 아가씨. 좀 보자고!”
금방이라도 망토를 벗겨낼 듯 거칠게 어깻죽지를 잡아당기는 남자에 베스가 소리라도 지르려는 때, “억!” 소리와 함께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데구루루 베스의 발치로 굴러온 건 주먹만 한 돌이었다.
베스는 돌이 날아온 골목 끝을 바라봤다.
“넌….”
벽 뒤에 숨은 채 빼꼼히 눈만 내민 아이가 그녀를 똑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베스는 아이를 한번, 발치에 기절한 듯 널브러진 남자를 한번 쳐다보다 주춤주춤 걸음을 뗐다. 낮에는 잽싸게 도망을 쳤으면서, 밤이 되자 아이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낯선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누구 찾으세요?”
아이는 맹랑하게 물었다.
“이곳에서 사니?”
“누구 찾으시면 찾아드릴게요.”
아이는 발치에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맨발로 툭툭 찼다. 어딘가 부끄러운 모양새였다.
“저도 적선이 아니라 선물이에요.”
제법 당돌한 구석이 있는 아이의 말에 베스는 마른 웃음을 뱉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이곳에 던져졌을 무렵에는 이만했겠구나 싶었다.
“이 골목의 노파를 찾고 있어. 음, 보통 할멈이라고 불리는데… 해독, 아니. 그러니까-”
“주사 놓는 할멈 찾으시는구나.”
아이는 어린애에게 해도 될 법한 말을 고르는 베스의 정곡을 쿡 찔렀다.
“혹시 아니…?”
베스의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애꿎은 돌만 괴롭히던 아이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할멈 죽었는데.”
“뭐?”
“주사 놓는 할멈 몇 년 전에 노망나서 돌아다니다가 죽었다고요. 내가 봤는데.”
“그럴 수는….”
베스의 새카만 눈을 빤히 올려다보던 아이가 중얼거렸다.
“공작님도 와서 확인한 건데.”
베스는 노파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공작이 그걸 확인했다는 게 더 믿기지 않았다.
그 남자가 여기를 대체 무슨 이유로….
“그 공작님 얼굴 기억하니…?”
“여기 공작님이 저기 성에 사는 공작님 말고 또 있어요?”
아, 베스는 저도 모르게 한발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아이는 그게 자기 말을 믿지 못하는 거로 생각했는지 대뜸 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 공작님 말고도 또 있어요. 대장한테 가면 알려줄 거예요. 대장이 여기 다 관할하거든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관할’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 나름 이곳에서 자란 뼈가 굵은 아이였다. 베스는 멍하니 아이의 손을 따라 골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몇 번 골목을 돌고 나서야, 희뿌연 궐련 향이 피어오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래침을 찍찍 뱉던 남자는 손님을 발견하곤 이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내 그게 젊은 여자임을 알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작년에 영주놈이 알지도 못할 이유로 골목을 뒤집은 이후, 귀족 손님을 받는 건 웬만해선 꺼렸다. 애저녁부터 번트 보호구역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놈들을 제외하면, 웨인에서 왔다 하면 일단 손부터 내저었더랬다.
그런데 이 야심한 새벽에 척 봐도 있는 집 여식임을 풀풀 풍기는 여자라니. 영 꺼림칙했다.
“거, 되지도 않은 분장하고 와도 소용없으니 그리 아쇼. 웬만한 건 아가씨가 사는 웨인에서도 충분히 해결한다고. 거기도 일 잘하는 놈들 많으니.”
“노파가 죽었다고요?”
“갑자기 뭔 노파 타령이야.”
“엘리젯 바머. 약방에서 주사 놓던 노파. 입에 붙은 말이 전부 욕설이고, 카시우스 공작과 소공작까지 일면 한 적 있는…. 그 노파, 정말 모르세요?”
베스는 속사포처럼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쏟아냈다.
“…약 장사할 때 없어선 안 됐을 텐데.”
남자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기껏해야 제 남편의 정부를 알아봐달라는 소리나 할 줄 알았던 여자의 입에서 갑자기 약 장사 얘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한 거였다.
안 그래도 클리프 놈이 골목을 뒤집은 게 기억에 선했다. 제 귀족 친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와 넙죽거린 게 아까울 만큼, 갑자기 돌변한 공작은 하루아침에 골목을 작살냈었다.
“제기랄. 갑자기 그 할멈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 혈기 오른 잿빛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나 말고 또 누가 찾았죠?”
아직 반이나 남은 궐련을 신경질적으로 팽개친 남자는 손을 휘저었다.
“나가쇼, 나가! 오늘은 손님 안 받으니까. 난 약쟁이 일엔 이골이 나 손 턴 지 오래됐으니 그리 알고.”
“잠깐만.”
“아, 잠깐이고 자시고 나가라고!”
성마르게 망토를 잡아끄는 남자의 완력을 못 이긴 베스의 손이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망토가 떨어졌지만, 남자는 베스의 얼굴은 차라리 보지도 않겠다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쭉 뺐다.
“난 아가씨 얼굴 본 적도 없으니 우린 본 적 없는 사이요! 하여간에 웨인에서 오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난다니까!”
남자에게 팔이 붙잡혀 질질 골목 입구까지 끌려간 베스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손을 탁탁, 턴 남자가 골목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이 쥐방울 새끼! 네가 저 여자 데리고 들어왔지!”
하지만 남자가 잡아채기도 전에, 아이는 잽싸게 남자는 들어 오지 못할 만큼 좁은 틈새로 몸을 내던졌다.
베스는 다시 끔찍한 적막이 내려앉은 제 주위를 멀거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처 없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저, 저 끔찍한 보호구역의 향만 맡지 않을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았다.
그 남자는 왜 보호구역을, 그것도 할멈을 찾아갔을까.
그리고 누가 할멈을….
베스는 그렇게 한참을, 느릿하게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베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막막할 만큼 새카만 밤하늘 가운데에 노란 불이 반짝 밝혀졌다. 너의 이정표는 저곳이라고 말하는 듯 선명한 불빛이었다.
“왜….”
그곳은 클리프 성의 맨 꼭대기. 공작의 침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