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다소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음성에 데베르는 다시 한번 참지 못한 웃음을 쏟아냈다. 자신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는 베스를 볼 때마다 묘한 만족감이 올라왔다. 무엇이 됐건 어젯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목석처럼 굴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
심지어 대답을 피하려고 떠나는 곳조차 번트라니.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베스는 그 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늘 그의 눈에 보이고,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했다. 때때로 어딘가로 숨어버리겠다 한들 그곳조차 데베르 클리프의 품인 곳으로.
데베르는 일부러 한쪽 눈썹만 구겼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으나 제법 진지했다.
“네가 또다시 도망가면 첫 번째로 뒤져야 할 곳이 내 영지라는 게 우스워서. 어떻게, 이번엔 좀 치밀해?”
농담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말해봐. 이젠 냅킨과 펜 따윈 없어도 되잖아.”
데베르는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기다란 다리를 꼬아 앉자 구두코가 베스의 종아리에 닿을 듯 말 듯 장난질했다.
“그럴 일은-”
“혹시 모르지. 이번엔 어머니가 아니라,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이라도 들을지.”
“…….”
“이번엔 일 년? 아님 이 년 정도는 필요한가.”
베스는 작은 입술에 힘을 주고, 남자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조차 오래 하지 못했다. 시선을 푹 떨구는 베스를 본 데베르는 빙글대던 얼굴을 굳혔다. 말간 얼굴이 시무룩해질 때마다, 정확히는 그의 앞에서만 물러질 때마다 애매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죄책감이라니. 그런 하등 쓸모없는 감정이 감히, 제 안에 피어나다니.
데베르는 짧게 조소했다.
“무르게 굴지 마.”
그건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일을 늦출 생각은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며 시간을 축내는 건, 이 여자 앞에서 하는 같잖은 신사놀이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아직 우리 사이에 할 일이 많은데 말이야.
“그럼 내가 조금은 미안해지잖아?”
베스는 남자를 대신해 그의 행거칩 언저리를 노려봤다. 빳빳하게 펴진 슈트는 제복과 색이 비슷했지만, 계급장이며 훈장 따위가 주렁주렁 달려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베스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봤다. 눈앞의 남자에게만 정신이 팔려 잊고 있던 배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날씨.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어둠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 간간이 들려오는 악단의 음악 소리까지. 새삼 그때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이 남자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인지가 실감 났다.
그의 말마따나 무르게 구는 제 탓일지도. 베스는 먼저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향해 베스는 배운 예법대로 인사를 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공작님.”
“함께 가시죠.”
“아뇨. 저는 친구들이….”
뒤를 가리키던 베스의 손가락이 곧 허공에 어색하게 머물렀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있어야 할 제 친구들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딕시가 감언이설로 아이네스를 꿰, 몰래 카페를 나간 게 틀림없었다.
“상대의 적군은 내겐 아군이라더군요.”
잔뜩 당황한 표정을 숨길 여유도 없어 보이는 베스를 향해, 데베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흔한 군사학 기초입니다. 베스 양이 알아두면 좋을.”
데베르는 팔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보는 눈도 많은데.”
약점을 찾고, 쥐는 건 데베르의 본능이었다. 그건 베스 제인스에게도 예외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촉을 세웠다면 모를까.
주변을 돌아보고 나름 고민하는지 작은 두 손을 쥐어뜯는 그 짧은 순간을, 데베르는 기꺼이 기다렸다.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그래야만 지금처럼 마지못해, 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베스를 볼 수 있었으니까.
어색하게 손을 올린 베스를 보며 데베르는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인형은 싫어했지만,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베스 제인스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 * *
이른 새벽부터 병원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전쟁 탓에 근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의료봉사를 떠나는 날이었기에 모두 약간의 걱정과 기대로 들떠있었다.
다른 의료진들 모두 인부를 도와 갖은 짐을 수송 차량에 싣느라 바빴다. 베스는 제 몸보다도 큰 상자 안에 갖은 비품을 챙겨 넣는 중이었다.
“난 번트는 좀 무서운데.”
처음으로 의료봉사를 떠나는 딕시가 작게 투덜거렸다.
용케 베스와 아이네스를 따라 냉큼 따라가겠다 지원하긴 했지만, 향하는 장소가 번트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영주인 클리프가의 소문만큼이나 양가적인 평판의 번트는 아름다운 평원과 더러운 뒷골목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듣자 하니 보호구역도 간다잖아.”
앓는 소리를 하며 베스의 곁으로 딕시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젯밤, 숙소에서 자신을 쌩하니 지나치는 베스를 보고서야 아차 싶었던 차였다. 공작님과 좋은 시간 좀 보내라고 일부러 아이네스까지 닦달해 자리를 비운 거였는데 이토록 결과가 신통찮다니.
타고난 중매가라는 제 자부심에는 금이 갔지만, 딕시는 어떻게 베스라도 녹여볼 요량으로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넌 가봤어? 보호구역? 하긴, 네가 언제 보호구역을 가보겠어.”
딕시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전에 딱 한 번, 귀한 목걸이 매물이 웨인 보호구역에 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어휴, 말도 마. 웨인에도 그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니까.”
베스가 짊어지는 상자의 반대편을 얼른 쥔 딕시는 말을 이어갔다.
“그냥 유흥가 정도랑은 그 분위기 하며, 다니는 사람들까지 뭔가 달라. 좋은 의미는 절대 아닌데. 확실히 달라. 약간 다들 맛이 간 거 같기도 하-”
그때, 창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간호사 먼저 타세요!” 하는 굵직한 외침도 함께 들려왔다.
때마침 병원 건물로 들어오던 인부 하나가 베스와 딕시를 보곤 알은척했다.
“어유, 이 무거운걸. 이리 주세요. 이런 건 힘 좋은 제가 잘하죠! 허헛!”
한껏 너스레를 떠는 남자 탓에 순식간에 빈손이 된 베스와 딕시의 눈이 마주쳤다. 두 눈만 뻐끔거리던 둘은 곧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당연하지!”
베스의 귀여운 으름장으로 짧은 냉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여유롭지 않은 수송 차량 때문에 의료진들은 번트의 초입부터는 삼삼오오 마차에 올라타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딕시는 번트가 무섭다는 말을 한 것이 무색하게, 창밖의 풍경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감탄을 참지 못했다.
“이야! 역시 듣던 대로네.”
“딕시.”
그런 딕시를 언니처럼 잡는 아이네스를 보며 베스는 피식 웃었다. 아웅다웅하는 둘의 소리를 라디오 삼아 뻥 뚫린 차창 벽에 고개를 기대자, 거대한 번트 성 아래의 광활한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빛깔을 담은 번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건 그 누구도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하지만 베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선 풍경이었다. 그녀에게 번트는 작은 오두막 창문 너머, 그리고 어두침침한 보호구역의 방이 전부였다.
그 순간, 무언가 발견한 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부신 햇살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부지런한 발재간과 작은 키로 봐선 아이가 틀림없었다.
아이라고?
무언가 더 보려 창밖으로 고개를 빼려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어 섰다. 갑자기 발이 막힌 말이 히힝 거리며 뛰어오르는 소리에 아이는 잽싸게 수풀가로 사라졌다.
“에잇! 제기랄. 바퀴가 부서졌소!”
걸걸한 마부의 욕지거리를 들은 아이네스가 조심스레 바깥을 살폈다. 마차 바퀴가 부서진 건 그들이 탄 마차뿐인지, 다들 부지런히 길을 지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베스는 아이가 사라진 수풀가를 향해 길을 거슬러 갔다. 오랜만의 웨인에서 찾아온 손님을 제외하면, 길은 적막할 만큼 고요했다. 짹짹거리는 지저귐 소리에 수풀 하나가 움찔, 움직였다.
베스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곧 작은 머리통 하나가 불쑥 수풀 사이에서 튀어 올랐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이 베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니?”
“…….”
“왜 마차에 돌을 던졌는지 물어도 될까?”
질책은 전혀 담기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에 망설이던 아이는 쭈뼛거리며 맨발을 꼬았다.
“…귀족 아가씨나 마님은 구걸하면 돈을 주세요. 돈을 받으려면 빨리 지나가면 안 되니까요….”
베스는 마차를 한 번 돌아보곤, 제 망토에 달린 제국 병원의 의료진을 상징하는 브로치를 뜯어냈다. 순금은 아니지만, 장터에 팔면 제법 값을 받을 정도는 됐다.
“적선이 아니라 선물이야.”
작은 아이는 구미가 당기는지 입술을 삐쭉거렸다. 베스가 선선히 브로치를 든 손을 흔들고 나서야, 아이는 조심스레 다가왔다. 잔뜩 경계하는 게 몸에 밴 모습이었다.
베스의 손 위에, 그녀보다 한참은 작은 손이 슬쩍 닿았다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베스!”
그새 바퀴를 갈았는지 멀리서 딕시가 외쳤다. 얼른 베스가 고개를 돌렸지만, 아이는 벌써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딕시의 재촉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베스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어쩌면 어릴 적 자신의 그림자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간이 병원은 번트의 어느 비어있는 곡창에 차려졌다. 대부분이 전장에서부터 손발을 맞추었던 이들이기에 낯선 환경에서도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어디서 소문을 들은 건지 번트에서 터를 잡은 사람들 말고도 환자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모두가 한숨이라도 돌릴 무렵엔 해는 이미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콜린스는 뻐근한 허리를 쭉 뒤로 밀었다.
“허허, 세월 앞에 장사 없네. 겨우 하루 지났다니.”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교수님. 내일은 동트자마자 진료 보셔야 하니까요.”
“이것들, 가르쳐놨더니 아주 스승을 잡아먹는구나!”
피로감이 녹진한 얼굴들이 짙은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서둘러 임시 숙소로 향하려는 그들을 막은 건 클리프가의 인장이 찍힌 검은 차였다.
“안녕하십니까. 콜린스 공작님.”
차에서 내린 건 영주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관리인이었다. 다들 영문을 모르고 관리인을 쳐다봤다.
“영주님께서 웨인의 의료진분들께 훌륭한 숙소와 식사를 마련하라 연락하셨습니다. 사양 마시고 클리프 성으로 가시죠. 이미 저녁 만찬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콜린스는 허허 웃으며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무리를 돌아봤다. 그러다 베스와 눈이 마주친 콜린스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노상의 늙은이에겐 사양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소식이군요.”
헛기침을 한번 한 그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데베르 공작도 지금, 번트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