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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7화 (97/206)

97화

머리맡으로 해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 베스를 깨운 건 딕시의 쨍한 목소리였다.

“일어나! 오늘 아이네스와 오랜만에 나들이 가기로 했잖아!”

베스는 잔뜩 찌푸린 눈을 뜨지도 못하고, 이불을 파고들었다. 어젯밤 그대로 쓰러져 잠든 탓에 이불도 덮지 못한 몸이 한기로 으슬으슬했다.

“잠도 없는 애가 왜 이렇게 늦잠이람. 오늘 같은 날은 늦잠도 소용없어. 얼마 만에 우리 셋이서 함께 보내는 개인 시간인데.”

딕시가 연신 어깨를 흔들자, 베스는 미약하게 손을 흔들었다. 충분히 알아듣고 있으며 곧 일어날 거란 뜻이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참을 굼뜨게 구는 베스를 의심쩍게 바라보던 딕시도 이내 깨우기를 포기하곤, 작은 의자에 앉았다. 호기심 가득한 주홍색 눈이 책상 위에 엉망으로 말라붙은 종이를 향했다. 공작의 청혼서란 걸 곧장 알아챈 딕시는 묻고 싶은 말은 묻지도 못한 채 입술만 벙긋거렸다.

“착오가 있었나 봐.”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베스가 작게 답했다. 눈빛만으로도 묻지 않은 질문에 답할 만큼 함께 한 시간이 길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축하해줬을 딕시에게 매몰차게 굴고 싶진 않았다.

“우편 배달부가 술에 취하기라도 했나?”

베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스런 미소를 걸쳐보고 싶었지만, 거짓말에 서툰 그녀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딕시는 어느새 얌전히 제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몰리 부인의 말에 따르면 천방지축으로 날뛴다는 혹평 아닌 혹평까진 듣는 딕시에게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우편 배달부 핑계라니. 눈치 빠른 그녀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베스를 단박에 알아봤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실수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 있게 들렸다. 아무리 자신이 평민이고, 넥서스의 사교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집안이긴 해도 결혼한 손위 언니들을 보면 청혼서와 그 답신은 집안의 가주에게로 도착했다.

뻔히 베스의 양부가 하워드 백작이란 걸 온 웨인 사람들이 다 아는 지금, 굳이 데베르 공작이 간호 숙소로 청혼서를 보낼 리는 없었다. 잠깐 고민을 거듭하던 딕시는 며칠 내로 백작님께 청혼서가 다시 가겠지, 라고 저 좋을 대로 결론을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청혼서가 다시 갈 거야.”

속 모르는 위로까지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웨인 중심가는 어느덧 늦봄으로 흘러가는 계절을 만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악단의 음악 소리에 베스와 딕시의 고개가 연방 좌우로 돌아갔다. 아이네스만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 귀족의 체면이라는 가르침을 떠올리며 고개를 빳빳이 고정할 따름이었다.

“어머!”

하지만 순간 터지는 듯한 폭죽 소리에 소리를 내지른 아이네스는 움츠린 어깨를 펼 생각도 못 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곧 폭죽보다 더 청량한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하핫, 아이네스 너 얌전 떨 때부터 알아봤다.”

딕시는 배를 움켜잡은 채 깔깔거렸다. 베스도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놀리지 마.”

잔뜩 성이 난 아이네스는 벌게진 얼굴로 당장 눈에 보이는 테라스 카페에 들어섰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지만, 아이네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널찍한 테라스 구석으로 향했다.

평일인데도 커다란 테라스는 바깥 거리만큼이나 사람들로 즐비했다. 그들은 거의 사교계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사들이었으나, 간혹 딕시처럼 부호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떠오르는 이들 또한 있었다.

차를 주문한 아이네스는 무언가 잊었다는 듯, 부리나케 테라스 난간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앳된 소녀 하나가 재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가 보렴. 난 친구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돌아갈게.”

똘망똘망한 얼굴의 소녀는 곧장 고개를 주억였다.

“네, 아가씨. 그리고 게일 백작님은 오늘 저녁 영식들의 클럽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아이네스 또한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멀어져가는 소녀가 잘 가는지 얼마간 지켜보던 아이네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혼하면 쟤가 널 따라가?”

딕시가 물었다.

“응, 꽤 오래전부터 함께했어. 착한 아이야. 똑똑하기도 하고.”

귀족 영애들이 결혼할 때면, 제 친정에서 가까운 수족 한 명을 데려간다는 건 베스도 아는 일이었다.

베스는 작은 소녀가 사라진 길을 말 없이 바라봤다.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루카가 따라오겠지. 그러면 루카도 저 아이처럼 공작의 소식을 내게도 말하고, 하워드에게도 말하고….

“…베스? 베스?”

막막한 상념에 잠긴 베스의 앞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였다. 티스푼으로 각설탕이 잠긴 찻잔을 휘젓자, 새하얀 설탕 알갱이들이 찻물 속을 어지러이 배회했다.

“베스.”

아이네스가 티테이블을 주먹으로 탁탁 두드리고 나서야, 베스는 완전히 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듣고 있었던 거 맞아?”

“어, 으응.”

“결혼식 올 수 있는 거 맞지?”

결혼식. 그제야 정신이 반짝 든 베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같은 베스의 얼굴에 작게 웃음을 지은 아이네스가 딕시를 돌아봤다.

“딕시 너도.”

“나도?”

능글거리던 딕시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내가 가면 네 흠이 될 수도 있잖아.”

딕시는 담담하게 말했다. 간호학교야 원체 몰리 부인과 콜린스 공작이 엄포를 놓았기에 평민과 뒤섞여 다니는 아이네스를 고깝게 보는 시선이 줄어들었지만, 공식적인 사교 행사는 달랐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친구가 오지 않는 결혼식이 다 무슨 소용이야.”

제법 단호한 아이네스의 말에 딕시는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품속으로 몸을 날렸다.

“감동이야! 내가 제일 비싼 선물 가져갈게!”

“어유, 왜 이래!”

다시 들뜬 목소리가 셋의 테이블을 채웠다. 모두 목전에 둔 아이네스의 결혼에 관한 얘기였다. 신혼집은 어디이며, 방은 몇 개이고, 드레스는 무슨 색이며…. 하릴없이 즐겁기만 한 얘기에 결국 베스도 저를 집어삼키던 고민을 잊은 채, 간호학교 시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거라곤, 이젠 웃음소리가 난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게.

데베르는 저 멀리 맞은 편에 앉아있는 베스를 쳐다보던 시선을 테이블 위의 서류로 옮겼다. 그 시선을 따라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던 하워드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유롭게 살던 시절이 더 많은 아이라 아직 예법에 서툰 게 많습니다.”

데베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읽어보던 계약서를 한 장 넘겼다. 그곳엔 처음으로 맺는 클리프가와 하워드가의 무역 협약이 빼곡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순간, 인자하게 휘어져 있던 하워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내 서글한 미소를 되찾았다.

“클리프 가문과의 사업을 위한 첫발이니, 대충 할 수는 없지요.”

“베스 양을 말한 거였습니다.”

데베르는 펼쳐진 서류철을 덮었다. 둘 사이엔 한 모금도 비워지지 않은 찻잔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찾기 위해 애쓰셨겠단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애써 찾은 조카딸이니 혼사도 신경 쓰실 테고요.”

하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나치게 여유 있는 공작의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은 숨을 죽이고 틈을 노려야 하는 때였다.

“주위에선 혼기가 찼다고 하지만, 제 눈엔 아직 아이 같아서요. 좀 더 끼고 보살피다 보낼 생각입니다.”

“베스 양의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예?”

의자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친 데베르는 새 나오는 헛웃음을 손등으로 대충 가렸다. 어느새 자신을 발견하곤, 사색이 된 얼굴로 종종걸음 하는 베스 제인스를 보고 있자니 입가가 간질거렸다.

내게 다가오는 베스 제인스.

데베르는 이 기꺼운 순간을 만끽했다.

너른 테라스를 단번에 걸어온 베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데베르를 바라봤다. 어제의 혈기 오른 모습은 상상도 못할 만큼 반듯하고 멀끔한 공작이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아직 하워드는 제 등 뒤에 누가 와 있는지 모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였다.

베스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우연히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을 때는 그야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더랬다. 이 시간에 그 남자가, 적어도 여기 있을 리 없다는 실낱같은 희망은 맞은편의 익숙한 뒤통수를 보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혼서를 가지고 그 난리를 친 게 불과 어젯밤인데. 베스는 그들 사이에 놓인 서류를 보려 눈을 찌푸렸지만, 제대로 보이는 건 허연 종이뿐이었다.

혹시 청혼서면 어쩌지.

하워드가 청혼서를 받아드는 순간이, 끔찍한 계획의 도화선에 돌이킬 수 없는 불이 붙는 순간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이 베스의 발을 이곳까지 이끈 거였다.

“베스 양이 사업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

데베르는 간단하게 베스의 불안을 일축했다.

“엇, 베스 아니니? 귀신처럼 기척도 없이 말이야.”

그제야 베스를 알아챈 하워드가 너스레를 떨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뭐라 귓가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웅얼거렸지만, 베스의 온 정신은 제 앞에 있는 데베르에게 쏠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가 청혼서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라도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을 하는 듯 여유롭게 구는 그의 앞에서 자꾸만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공작님과 잠시 얘기를 나눠도 될까요? 후원 관련 얘기인데…. 지금은 주위에 보는 눈도 많고, 잠깐 얘기를 나눈다 해도 걱정하신 추문이 돌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렴. 공작님, 늙은이는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녀의 대담한 요청에 허허 난감한 웃음을 지은 하워드는 공작에게 먼저 자리를 뜨는 양해를 구하곤, 이내 테라스 바깥에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하워드가 사라지자, 미미한 웃음기라도 걸치고 있던 베스의 얼굴은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무려 청혼이 오간 사이에 식어 빠진 찻잔이나 마주 보고 있는 건 유감이야.”

“사흘은 짧아요.”

베스는 대뜸 본론부터 내뱉었다.

“결정하기에… 사흘은 짧아요.”

“해보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사흘은 부족합니다, 공작님.”

어차피 굳힌 결심을 돌이킬 남자가 아닌 이상, 베스는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어보려 했다.

“내일부터 번트로 의료봉사를 떠나서…. 어차피 사흘 안엔 답을 들려드리지 못해요.”

“하하.”

그 말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가 웃긴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던 베스는 그 순간 테라스 사이로 밀려드는 햇살에 미간을 찌푸렸다. 타는듯한 붉은 노을이 잿빛 머리카락에 닿아 부서지는 게 보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전해질 때마다, 베스의 가슴께 또한 함께 둥둥 울렸다. 정말 바보 같게도.

그는 완연한 즐거움을 담아 웃고 있었다.

“번트가 누구 영지인지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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