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데베르는 손가락 한 마디쯤 드러난 여자의 빗장뼈를 제 엄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갖은 흉터로 거칠한 제 손은 흉내도 내지 못할 부드러운 촉감과 온기였다. 데베르는 홀린 듯이 굴었다. 반듯하게 뻗은 여린 뼈마디를 손가락으로 훑다, 그 가운데 움푹 팬 지점을 살짝 누르자 팔딱거리는 숨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넌 가끔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어.”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지만, 짙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는 무감하기만 했다.
여자의 어깨를 쥐고 있던 데베르의 손이 조금 위로 올라왔다. 얇은 목덜미는 한 손에도 충분히 감싸졌다. 빗장뼈를 쓸던 엄지손가락은 이젠 여자의 밋밋한 목울대를 매만지고 있었다.
여기서 목소리가 나온다니. 데베르는 작은 셈을 했다.
“이 빌어먹을 제안에 흔들리는 걸 보면.”
데베르의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그 시선의 끝에 베스의 목덜미가 체한 듯이 걸려들었다. 허옇게 비어있는 목덜미는, 침실에 걸려있는 브로치가 사라진 군복만큼이나 여전히 그의 신경줄을 끊어 먹는 모습이었다.
“너야말로 날 믿어?”
조금은 자조 섞인 물음이었다.
나도 날 믿지 못하는데, 대체 넌 뭘 믿고 이 어둠을 뚫고 와서 내게 매달리는 건지. 하지만, 그 물음의 답이 너무도 뻔해 데베르는 제가 대답을 대신했다.
“하긴. 그런 것 같네. 이 밤에, 고작 청혼서 하나 물려달라고 뛰어온 걸 보면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내겐 네 믿음에 상응할 만큼 아름다운 꼬리표가 없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전장에서 직접 본 네가 더 잘 알잖아.”
그 순간, 탁 하는 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베스는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발을 뒤로 물리다, 구두 뒤축과 문이 부딪혀 난 소리였다.
그 소리에 데베르의 눈동자 또한 아래로 떨어졌다. 도망이라도 가 볼 생각이었는지, 그제야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오는 작은 발을 보자 헛웃음이 새 나왔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베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짧은 웃음을 채 매듭짓기도 전이었다.
“좁은 곳에서 뒤로 물러나는 게 최악의 수라는 것쯤은 알아야지.”
저항할 여지도 없이 딸려온 여체가 그에게 쏟아지듯 안겨 왔다. 깜짝 놀라 커다래진 까만 눈동자를 보며 데베르는 고개를 까딱였다. 어련히 알아들으란 뜻이었다.
약품 창고 안, 겁에 질린 채 뒤로 물러서는 여자를 보며 떠올렸던 같잖은 충고. 그 뒤늦은 충고가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아갔다.
“날 당황하게 하고 싶으면 지금처럼 다가와. 도망가는 새끼들은 질리도록 봐서 이골이 났거든.”
베스는 평소보다 더 거칠어진 그의 언사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픽, 마른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도 자애로운 네가 도망치는 적군을 살려보려 아등바등 굴 때였잖아? 정확히는 죽어가는 거였지만.”
데베르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는 엉망이 된 청혼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그러곤 제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
“이리와 앉아. 베스 제인스 양이 지금 해야 하는 건 부탁이 아니라 사정이니까. 보아하니 자신이 왜 사정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얇은 종이 한 장을 우습게 적신 위스키는 어느새 협탁 아래로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흉하게 젖어버린 청혼서 만큼이나 진창이 된 제 마음 위에도 그 위스키가 떨어지는 것만 같아, 베스는 찌푸린 눈에 힘을 줬다.
“아, 급하게 백작가 영애가 되셔서 아직 넥서스의 법도엔 서투시지.”
남자의 목소리엔 이젠 숨길 수 없는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아니, 그는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모욕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베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데베르는 베스를 보지 않은 채, 하던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청혼서를 보내면, 웨인의 그 어떤 귀족 놈도 감히 네게 청혼서를 보내진 못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겠지.”
공작의 권위. 때로는 폭압적일 정도의 권력은 클리프가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데베르는 그 권력을, 한치의 가감도 없이 눈앞의 여자를 향해 쓰겠노라 말하는 중이었다.
넥서스에서 데베르 클리프의 청혼을 거절할 만큼의 호세가는 존재치 않았다. 심지어 라프넬 공주와의 혼담조차 그의 손에 달린 것처럼 구는 실정에, 고작 백작가 정도쯤이야.
선택권이 없는 하워드 백작은 제 양녀의 유일한 구혼자인 공작에게 딸을 내줄 것이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걸 알기에 베스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이 야심한 밤, 그의 침실을 찾은 것이었다. 비록 그게 지금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질지언정 말이다.
“그게 넥서스 귀족의 법도야. 평범한 베스 제인스였다면 모른척했어도 될.”
치밀어오르는 감정과 달리, 데베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분히 가라앉기만 했다. 반쯤 열린 창밖으로 불어오는 밤바람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뱉는 말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베스가 잊어버린 그의 모습이기도 했다.
“탓하고 싶으면 네 핏줄을 탓해.”
말갛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데베르는 전에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욕정이라니….”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데베르는 한 칸이 열린 원피스를 바라봤다. 고작 한 칸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저 아래에서 밀려오는 눅눅한 온기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치솟아 오르는 열기를 꺼뜨리기 위해 얼음이 든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켜자, 곧 눅진한 취기가 그를 둘러쌌다. 그 정도도 갈무리하지 못할 만큼 아직은 제가 바닥이 아님에 데베르는 안도했다. 우스운 안도감이었다.
“고작 그런 천박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나 보군.”
데베르는 눈을 감았다.
한때, 자신도 이 여자를 향한 제 비이성적인 충동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권태로울 만큼 흐트러짐 없는 걸음을 멈칫하게 만들고, 불지 않는 바람에도 저를 흔들리게 하고, 갈증을 아무리 해소해도 또다시 갈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은 뭘까, 하고.
“…차라리 욕정이라면 좋겠어.”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한순간의 정염 내지는 욕정이라면. 그렇게 몇 번 불타오르다 사라질 것이었다면, 하고 그는 바랐다. 적어도 무서운 줄 모르고 몸집을 불려 나가는 제 저열한 욕망을 알아채고 진저리칠 베스 제인스를 보고 싶진 않았다. 그것조차 욕심일까.
베스는 소파에 기댄 남자를 훔쳐봤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피곤함이 가득 깃든 얼굴은 욕정을 잠재우니 어쩌니 할 때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꼭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들려오는 건 정원의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뿐이었다. 베스는 그가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일 때보다, 어쩐지 이 침묵이 더 불편했다.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는 남자의 이마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난 간호사와 단둘이 이 시간에 침실에 있지 않아.”
축축한 목소리가 베스를 일깨웠다. 그 말뜻을 깨닫자, 저절로 벌떡 몸이 일으켜졌다. 잉크가 잔뜩 번진 청혼서는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지만, 베스는 낚아채듯 손안에 구겨 넣곤 침실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오고 나서야, 베스는 시커먼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곤 헛숨을 내쉬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베스는 그 감정조차 제겐 사치란 걸 잘 알았다.
“네가 선택한 거야.”
어느덧 잔뜩 힘이 빠진 구두 소리만큼이나 희미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로비를 지나 정원으로 나올 때까지도 그녀를 잡는 이는 없었다.
베스는 청혼서를 쥔 채, 까마득히 넓은 그의 정원을 멍하니 걸어갔다. 그 화려한 전경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밤이 되면 이 거대한 저택에 홀로 있는 걸까.
고요히 잠든 정원을 바라보던 베스가 문득 스친 생각에 고개를 젖혔을 때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가장 환하게 밝혀진 공작의 침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 있는….
눈이 마주쳤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바깥에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곁에서 들려온 집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베스가 다시 침실을 올려다봤을 땐, 텅 빈 창문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베스에게 다시금 집사는 부드럽게 권유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대여 마차도 끊긴 시간이니 계시는 숙소까지 저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전….”
“부디 이번만큼은 사양 말아 주십시오.”
집사가 든 램프 불빛에 그의 주름진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따스한 눈동자는 그 불빛을 닮아있었다.
“…감사합니다.”
베스는 철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침실을 돌아봤지만 남자는 없었다.
텅 빈 방에 들어오자마자 베스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곤죽이 되다시피 한 청혼서는 책상 위로 내던진 채였다. 요란하게도 삐걱거리는 침대 다리 소리가 홀로 잠들지 못하는 베스의 감각을 더 일깨웠다.
베스는 좁은 침대 위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양팔로 제 다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안 그래도 마른 몸이 꼭 한 줌처럼 오그라들었다. 한껏 팔을 커다랗게 펼쳐봐도, 자신에게는 겨우 제 몸 하나 안을 품밖에 없다는 게 또 베스를 못내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졸음은 종전 이후, 정확히는 하워드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아니, 하워드가 강제로 만들어낸 것이니 어쩌면 후유증이라고 해야 맞는 말 아닐까. 지난 일 년간, 대거리할 때마다 강제로 먹은 수면제에 쓴물이 올라올 지경인데.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온갖 잔상들이 뒤섞였다. 베스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이 모든 것들이 몽롱해지다 이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끔찍한 도피처였지만, 이젠 유일한 숨통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장면만이 자꾸만 선명히 떠올라 베스를 괴롭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새카만 제 방 한구석이 꼭 그의 침실 구석처럼 보였다.
그의 침대 곁엔 익숙한 군복이 걸려있었다. 넥서스 문양의 브로치가 사라진, 그날 밤의 흔적이나 다름없는 군복.
‘사흘이야.’
그리고 그 위로, 침실을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자신을 향해 그가 뱉은 경고 같은 한마디가 겹쳤다. 베스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데베르의 목소리는 베스를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