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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5화 (95/206)

95화

“얼른 열어봐!”

딕시는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베스의 손에 기어코 청혼서 봉투를 쥐여줬다. 베스는 멀거니 제 손에 쥐어진 하얀 봉투를 쳐다보다, 천천히 인장을 뜯어냈다.

곧이어 나온 부드러운 종이엔 클리프가의 공식적인 청혼 내용이 쓰여 있었다.

“세상에!”

“공작님과 베스라니.”

탄성 어린 호들갑들이 곳곳에서 새 나왔다. 하지만 베스는 굳은 듯이 청혼서 맨 끝에 적힌 서명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웨인에 여름이 올쯤엔, 넌 베스 제인스가 아니라 베스 클리프일 거야.’

짧은 청혼서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렸다.

클리프. 유난히 날카로운 발음은 남자를 닮아 있었다.

“베스…?”

심상찮은 베스의 표정을 읽은 딕시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워드에게 틀어 잡힌 어깨가 그새 멍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괜찮아?”

“난 괜찮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괜찮다는 말과 함께 베스는 청혼서를 꽉 쥐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종이는 구겨져도 손에 상처를 내지 않았다.

베스는 무리를 뚫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베스의 귓가에 들려오는 건 세차게 뛰는 제 심장 소리뿐이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방 안에 들어선 베스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잠금쇠도 없는 서랍은 칠이 벗겨져 거칠했지만, 망설임 없이 가장 구석을 손으로 훑어냈다.

이내 손에 두 개의 브로치가 걸려들었다.

하나는 해진 줄에 매달려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금방 닦아낸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디 가!”

숙소를 뛰쳐나가는 베스를 딕시가 붙잡았지만, 베스는 잠시만이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은 마지막 대여 마차가 있겠지.

시간을 셈하며 달려가던 베스는 낯익은 마부를 보곤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가씨는-”

“클리프 저택으로 가주세요.”

하룻밤 새 똑같은 손님을 두 번이나 받게 된 마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하실 수 있는 만큼 빨리 가주세요.”

“거참.”

베스는 풀어헤친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마차는 빠르게 클리프 저택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높이 솟아오른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곧 거대한 철문 너머의 클리프 저택이 드러나자, 베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부는 바람에 희미한 풀 향이 실려 왔다.

“공작님께선 그 누구도 방문을 허락지, 앗.”

낯선 방문자에 길을 막던 사용인들도 베스의 얼굴을 보곤 군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녀로서는 영문 모를 일이었지만, 이유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도착했소이다. 아가씨.”

마차에서 뛰어내린 베스는 집어삼킬 듯이 커다란 저택을 올려다봤다. 그의 침실이 있을 맨 위층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늘 어둠에 잠겨 있을 것만 같던 그의 공간은 온통 환하기만 했다. 정원을 빼곡히 둘러싼 램프가 그러했고, 작은 방 하나까지 모두 불을 밝힌 창들이 그러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적막한 로비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베스는 기억에 담아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이 계단을 오르면, 이 복도를 지나면 그 남자가 있겠지.

역시나. 그녀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베스는 한 걸음, 데베르의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마주한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보던 책을 덮었다.

“내일 아침에 오라고 일부러 밤에 보냈는데.”

여자의 손에 들린 청혼서를 본 데베르는 가볍게 웃었다. 때마침 열린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웃음을 따라 흩어졌다.

베스는 구겨진 청혼서를 남자의 앞에 놓았다. 무슨 뜻이냐는 듯 그의 눈썹이 들썩였다.

“거절하는 거예요.”

“그래.”

왜냐는 물음도 없는 남자에, 베스는 다시 한번 천천히 똑같은 말을 뱉어냈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그의 태도가 싫었다.

“진심이에요. 공작님의 청혼은 거절하겠습니다.”

“알겠어.”

남자는 정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위스키를 따랐다. 느긋한 손짓은 청혼을 거절당한 남자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시려면 마시고.”

베스는 구겨진 청혼서 위에 브로치 두 개를 놓았다.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브로치 위로 옮겨가는 게 보였다. 그제야 베스는 메마른 입술을 또다시 달싹일 수 있었다.

“전 정말로 공작님과 결혼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탁, 소리와 함께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거칠게 놓은 탓에 넘친 위스키가 청혼서 끝자락을 적셨다.

“이 청혼이 부탁이나 제안 정도로 들리나 보군.”

고집스런 목소리는 전장의 숲길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굴던 남자는 여전했다.

“청혼서를 하워드 백작이 아닌 그 보잘것없는 간호 숙소로 보낸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을 베푼 거야.”

치밀어오르는 화를 애써 눌러 내리는 데베르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내리깐 시선 끝에 엉망이 된 여자의 구두가 들어왔다. 청혼서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뛰어왔을 여자를 생각하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돌아가. 내일 날이 밝기 전에 하워드가로 청혼서가 도착할 테니까.”

데베르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꼴사나운 헛소리를 더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안 돼요.”

침실을 나서려는 데베르를 베스가 급하게 붙잡았다. 그의 셔츠 끄트머리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제발.”

단호하게 거절을 곱씹을 땐 언제고, 여자의 눈은 곧 울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청혼하지 말아달라 비는 베스 제인스라니.

데베르는 겪어본 적 없는 아득함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분노와 비슷했다.

“대체-”

“착각하시는 거예요.”

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봤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에요. 한순간의 욕정, 그 비슷한 마음이요.”

떠올린 적도 없는 말이 쏟아졌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 남자의 청혼을 물릴 수 있다면야.

“특별한 상황에 만나서, 제가 공작님을 유일하게 전담해서…. 착각하시는 거예요. 청혼을 거절하는 건 정말 죄송해요.”

베스는 거의 헐떡이고 있었고, 데베르는 고요히 내쉬던 숨을 뚝 멈췄다.

욕정. 눈앞의 여자는 단 한마디로도 순식간에 그를 참담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데베르 클리프란 남자는 늘 제겐 손쉬운 존재라는 걸, 베스 제인스 하나만 몰랐다.

데베르는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도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헛소리를 지껄여도 성의가 있어야지.”

가냘픈 목덜미를 슬며시 감싸자, 여자가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어야만 했다.

“넌 가만 보면 내가 도는 걸 즐기는 거 같아.”

“아니야?” 베스의 입술 앞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뚝뚝 끊어내는 음성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내가 한 말은 유효해. 하워드 백작에게 청혼서를 보내도, 네가 지금처럼 굴 수 있을지 궁금하네.”

“…제 대답은 똑같아요.”

“죽어도 클리프는 싫다…. 그래, 고매한 베스 제인스 양의 부탁이니 이해해 드려야지.”

데베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넌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제가… 공작님께요?”

청혼을 거절한 마당에 대체 뭘 해줄 수 있냐는 걸까. 베스는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해줄 수 있는 거. 난 네가 필요하거든.”

데베르는 슬쩍 미소 지었다.

“네가 말한 그 ‘욕정’이라도 잠재우려면. 한때는 우리가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잖아?”

노골적인 남자의 말에 베스의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벌게지는 얼굴이 자신도 느껴졌지만,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걸 해드린다면 청혼서를 물리시겠어요?”

소파로 걸어간 데베르는 반쯤 남은 위스키잔을 들이켰다. 얼음이 담긴 잔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잿빛 눈동자에 정염이 넘실거렸다. 술기운이 오르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이미 머릿속은 뜨겁기만 했다.

“내 정부라도 되던지. 그건 청혼서 따위 필요 없으니까. 빌어먹을 클리프 따위 넘겨받을 필요도 없고. 생각해 보니 이편이 훨씬 나은 거 같네. 편리하고.”

정부라니. 아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베스가 무슨 말이라도 뱉으려는데, 남자가 더 빨랐다.

“아, 정부는 부인이 있어야 하지.”

말려 올라간 입꼬리 옆에 야트막한 볼우물이 패었다.

“그럼 애인이라도 하던지.”

베스는 데베르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저 정신 나간 남자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저를 믿으세요?”

베스의 목소리는 이젠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믿지 못한 지는 꽤 됐어.”

“그런데 어떻게 정부니, 애인이니-”

“믿지 못하면 욕정도 못 하나? 베스 제인스 양은 그런가 보지?”

빙글거리던 미소가 지워진 남자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방금 전의 정염은 어디 갔냐는 듯, 무감한 눈동자만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정해. 애인 노릇이나 하며 내 흥미가 떨어지길 기다리던가, 이대로 돌아가 양아버지께 청혼서를 받던가. 평생을 족쇄처럼 옭아맬 클리프보단, 한때의 연애 놀음이 낫지 않겠어?”

베스는 퍽 선심을 베푸는 듯 구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에겐 늘 그렇듯 틈이라곤 존재치 않았다.

답은 결국 하나였다.

“청혼… 철회하겠다고 약속하시면요.”

그놈의 청혼. 데베르는 천천히 베스에게 다가갔다. 잔뜩 흐트러진 잔머리가 하얀 얼굴 위로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용감하기도 하지.”

제 손가락으로 스치듯 그 머리카락을 훑던 데베르는 돌연 머리끈을 풀어 내렸다. 순식간에 끼쳐오는 베스만의 향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멈춘 숨이 드디어 쉬어지기 시작했다.

적당한 청량감과 아득함이 어지럽게 얽혀들고 나서야, 데베르는 제 감정을 직시했다.

“내가 애인하고 뭘 할 줄 알고.”

그의 손가락이 원피스 단추 하나를 툭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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