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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3화 (93/206)

93화

고압적인 명령에 남자는 대번에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굽히는 건 넥서스에는 없는 예법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브리틴 사절단의 친위대 중 하나입니다.”

남자는 반듯하게 접은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아더는 무감한 시선을 옮겨 피우려던 시가에 불을 붙였다.

몇 번 짙은 연기를 뱉어낼 때까지도 남자는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똑바로 서.”

그제야 남자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곤 허공에 눈을 고정했다. 그건 으레 하급병이 상관을 향해 하는 행동이었다.

남자의 모든 행동은 자신이 외국인 병사라 말하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친위대에 합류하고 넥서스에 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에 아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추 자신과 시선이 맞을 만큼 큰 키의 남자는 척 보기에도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건 하루아침에 단련되는 것이 아니었다. 짙은 붉은색 머리와 가무잡잡한 피부 또한 호전적인 성미를 내비치기엔 충분했다.

“타국의 친위대이면서, 사절단은 내버려 둔 채 함부로 황궁을 활보하는 건 지나치게 넥서스를 믿는 건가, 아니면 브리틴에 대한 충성심이 딱 그 정도인 건가.”

오랜만에 하는 사령관 흉내에 아더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그건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짓이었다.

“넥서스를 믿습니다.”

남자는 고저 없이 답했다. 짧은 대답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더 아더의 심기에 거슬렸다.

“제 나라보다 타국을 믿는다….”

“정확히는 넥서스를 지키는 아더 사령관님을 신뢰합니다.”

그 말에 아더는 픽 웃었다. 타들어 가는 시가를 보던 아더의 고개가 남자를 향해 기울어졌다.

“내게 아부 떨어봤자 떨어지는 건 없어. 하지만 건방 떨어서 좋은 것도 없지.”

허공 위에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던 남자의 눈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아더와 눈을 맞춘 남자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 있습니다.”

아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가를 쥐지 않은 반대편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자, 엉망으로 구겨진 카드가 손에 닿았다.

“알고 있다….”

“아더 사령관님을 모르는 브리틴 군은 없습니다.”

남자는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제 뜻을 전했다.

“이렇게 홀로 폐하의 문밖을 지키시기엔 지나치게 명석한 분이시란 것도요.”

시가를 던진 아더의 손이 한 번에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핏줄이 튀어나온 손등이 잘게 떨릴 만큼 아더는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에 감추지 못한 분노가 실렸다.

“내가 지금, 네 이름을 묻지 않은 아량을 알아야 할 텐데.”

짓씹는듯한 음성이 기어 나오는 목에도 파란 힘줄이 돋았다. 능글맞게 웃으며 다니던 황자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더의 고개도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돌아갔다.

“뭐 하는 거야.”

라프넬은 어두운 나무 그늘을 지나 천천히 다가왔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새 나오는 불빛이 라프넬의 하얀 얼굴을 비췄다.

“설마 폐하의 궁 앞에서 ‘이런 짓’을 하겠다고?”

라프넬은 싸움이란 천박한 단어조차도 제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황제의 궁 주위는 모두 그의 끄나풀이란 걸 아는 마당에, 제 궁에서처럼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자님, 제국의 체통을 지키세요.”

라프넬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흘려내는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아더의 서재에서 책이라도 뒤져볼 요량으로 나온 참에 우연히 목격한 풍경이었다.

처음엔 그저 황궁 문턱이 닳도록 오가는 어느 사절단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는 아더의 표정이 미묘했다.

의지와 다르게 일어나는 균열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기 마련이었다.

“아더 메이너.”

라프넬은 조용히 아더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아더도 그 손길을 따라 순순히 손을 물렸다. 곧이어 막힌 숨을 토해내는 남자의 산발적인 기침 소리가 적막한 사위에 퍼졌다.

“무슨 일이야.”

라프넬은 속삭이듯 물었다.

아더는 바닥에 짓뭉개진 시가와 벌건 손자국이 남은 남자의 목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그렇겠지.”

충분히 예상한 대답이었다. 라프넬은 이번엔 낯선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시죠?”

“작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남자의 말투에선 미약한 브리틴 억양이 묻어났다. 이전이었다면 그저 지나쳤을 사소한 특징이었다.

라프넬은 번들거리는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브리틴?”

“그렇습니다.”

그때, 소란스러운 발걸음과 함께 알현을 마친 사절단이 궁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함께 계단을 내려와 아더를 찾는 시종의 얼굴도 보였다.

“라프넬, 돌아가.”

아더가 손목을 틀어쥐자, 라프넬은 곧바로 제 손을 털어냈다.

“그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

“라프넬.”

으름장을 놓는 듯한 말투로 라프넬의 이름을 부르던 아더는 곁에 선 남자에게 눈짓했다. 사절단과 황제의 시종까지 나온 마당에 눈길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남자는 아더를 향해 경례하곤, 라프넬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스쳐 지나가듯 밤 인사를 흘린 뒤 사라졌다.

라프넬은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아더를 향해 싱긋 웃었다.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 그는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갈 거야. 넌 가끔 보면 내게 축객령만 내리는 것 같아.”

“라프넬.”

라프넬은 미련 없이 뒤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다, 조금 전 남자의 인사를 곱씹었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분명한 브리틴어.

“…대놓고 흘리시네.”

라프넬이 모를 리 없는 인사말이었다.

* * *

“베스, 오랜만의 외출인데 일찍 돌아왔네?”

베스가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오자, 옆방에 있던 딕시가 반가운 체를 했다. 묻고 싶은 게 가득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베스는 모른 척 사 온 짐만 정리했다.

책상 위에 작은 책 하나가 놓였다.

“무도회는? 재밌었어?”

딕시는 책 따위 관심도 없는 듯 지난 무도회 얘기에만 열을 올렸다. 데베르 공작과 춤이라도 한 번 췄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그 물음만큼은 꾹 눌러냈다. 부끄럼 많은 제 친구는 살살 달래야 원하는 걸 얘기해 준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진짜 하워드 백작님은 아니지…?”

헛웃음을 짓던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만지작거리다, 저 혼자 놀라 얼른 손을 내렸다.

“짐만 정리하고 병원에 가봐야 해. 콜린스 교수님께서 부탁하신 게 있어서.”

베스는 방문 간호란 말은 쏙 빼고, 콜린스의 부탁이라는 손쉬운 핑계를 댔다.

딕시를 쫓아내듯 방에서 내보내고 난 뒤에야 베스는 사 온 책을 찬찬히 살폈다.

‘항상 들어보고 싶었어.’

그 남자가 약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날, 제게 읽어달라 부탁한 책이었다. 반쯤 술에 젖은 책은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 때마침 밝아온 새벽 미명 때문이기도 했다.

베스는 책의 중간을 펼쳤다.

미처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소년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사실 그건 핑계였다. 선택하고 싶은 길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 안에 들어주는 이 없는 베스의 목소리만이 가득 채워졌다. 한참을 읽어나가던 베스는 마지막 장을 앞두곤 책을 덮었다.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옷장 문을 열자 반듯하게 다려진 간호복이 보였지만, 잠시 고민하던 베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러곤 밋밋한 원피스 차림 그대로 숙소를 나섰다. 간호 학교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옷이었다.

“오늘 어디 가시나 봐요?”

“저녁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보지.”

의료 가방을 챙기려 들른 병원에서 베스를 알아본 환자들이 저들끼리 알은척을 하며 옆구리를 서로 쿡쿡 찔러댔다.

베스는 애매한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한 번 봤다. 오랜만에 풀어 내린 머리가 어색해 괜히 몇 번 손으로 쓸어내렸다.

요란하진 않은데.

자신이 보기에도 짙은 감색 원피스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면 너무 낡았나.

괜히 소맷자락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기까지 한 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발. 베스 제인스.”

베스는 스스로를 채근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젠 불어오는 밤바람도 차갑지 않은 완연한 봄이었다.

남자가 있는 곳은 병원에서 멀지 않았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물 앞에서 베스는 애써 태연하게 입구로 걸어갔다.

“베스 제인스 양 맞으십니까?”

문을 연 베스를 맞은 건 수행인이었다.

“공작님께선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베스 양께서 준비하신 물건은 집무실 서랍에 넣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가셨다고요?”

“일정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일정….”

베스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수행인의 말을 곱씹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꼭대기의 집무실까지 베스를 안내한 수행인은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곤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집무실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여기가 그곳이구나.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곳이었다. 베스는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주인이 없어도 환한 집무실엔 널찍한 서무용 테이블밖에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왔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안절부절못한 꼴이 우습기만 했다. 먼지 하나 없는 테이블 앞에서 손을 까딱이던 베스는 서랍을 열었다.

텅 빈 서랍에 약통을 넣은 베스는 문득 맞은편 창가를 바라봤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불이 밝혀진 제국 병원이 이정표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저렇게 밝은 곳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베스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아 다행이야.”

베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로비를 걸어 나왔다. 오늘 약을 줬으니 당분간은 방문 간호도 뜸할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베스의 시선이 깜빡거리는 가로등에서 멈췄다. 오늘따라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대의 지나가는 마차와 차만이 거리의 소음이 되어주는 어둑한 거리에 베스의 걸음이 섞여들었다.

얼마쯤 갔을까. 규칙적으로 울리던 구둣발 소리에 엇박자의 둔탁음이 끼어들었다.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던 걸음을 천천히 뗐다.

따라오고 있어.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 뒤를 한번 돌아봤지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낯선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가볍지만 망설이는 듯한 소리였다. 베스는 병원을 향하던 걸음을 반대편으로 틀어,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타닥.

그러자 따라오는 걸음도 함께 조급해졌다.

나를 따라오는 거야.

불안이 확신이 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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