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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2화 (92/206)

92화

아더의 등장은 병원의 지루한 오후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국 병원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아더는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마주친 아이네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자님도 그간 안녕하셨나요? 지난 연회에서도 뵙지 못한 것 같아요.”

아이네스도 상냥하게 대꾸하며 병원장실로 그를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는 황자를 향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멀리서부터 모여들었다.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한 태도는 뭇 미혼 간호사들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응? 아더라고?”

콜린스는 예상치 못한 아더의 등장에 활짝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거칠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서 그의 애정이 전해졌다.

“무슨 일이냐, 이 녀석아! 보아하니 몸은 더 좋아진 것 같구먼.”

“제가 할 일이랄 게 있나요.”

아더는 너스레를 떨었다.

팔자 좋은 황자란 별명, 혹은 멸칭에 걸맞게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도 이젠 익숙한 일이었다.

“벌써 석 달이 지난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마지막으로 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까….”

아더는 품에서 진단서를 꺼내며, 마지막으로 제국 병원을 찾은 날을 떠올렸다. 베스 제인스는 존재하지도, 감히 나타나리란 기대조차도 할 수 없던 시린 겨울이었다.

“이렇게 석 달에 한 번씩 아저씨를 괴롭힐 거면, 차라리 황궁 주치의가 콜린스 교수님이면 좋을 텐데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진단서를 읽던 콜린스는 그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공작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그랬겠지.”

오래전부터 제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콜린스 몰리 공작이 황제의 최측근인 주치의까지 겸한다면, 그건 정치적인 결합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더는 때때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투정 부려보지 못한 어린 날을 뒤늦게 흉내 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별다른 문제는 없나요?”

“흠….”

어릴 적부터 유전병을 앓고 있는 황제는 제 옆에 붙은 주치의도 믿지 못해, 꼭 아더를 통해 콜린스에게 이중 진료를 받곤 했다.

삼 개월에 한 번씩 새롭게 받아야 하는 약을 콜린스에게 검수받지 않으면, 그는 차라리 며칠 아플지언정 그 약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콜린스를 온전히 믿는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더는 제 형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차라리 연민으로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그래, 문제없구나. 이대로 처방 승인하마.”

처방 승인한다는 말과 달리, 콜린스는 서명란을 공란으로 둔 채 진단서를 내밀었다.

“방문 간호 핑계로 제 거처에도 놀러 오세요. 주치의가 아닌 의사의 일회성 방문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늙은 내가 네 황궁까지 가서 영양제라도 놓아주리?”

아더는 비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또 너무 늦었나요.”

“그래, 한참은 늦었다. 늙은 공작을 부려 먹으려면 십 년은 일찍 찾아왔어야지.”

“십 년이나요?”

턱없이 늦었다고 말하는 콜린스에 아더는 두 손을 들곤 항복하는 체했다. 그는 멋모르게 했을 말이었지만, 아더는 꼭 제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아더 메이너는 언제나 늦지.

그 사실이 조금은 속이 쓰렸다.

병원장실을 나온 아더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모두 각자의 일을 하러 떠난 로비는 도착했을 때와 달리 적막하기만 했다.

후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차 앞에 선 아더는 트렁크에서 몇 개의 꽃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모두를 위한 선물이라 적당히 핑계 대기 위함이었지만, 이젠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놓고 갈까.”

아더는 볼을 긁적이며 샛노랗게 만개한 튤립을 내려다봤다.

“어유, 황자님 아니십니까.”

그때, 숙소로 향하던 관리인이 아더를 발견하곤 머리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던 관리인의 눈이 꽃바구니를 향해 있었다. 확실히 다른 귀족들 것보다 화려한 기색이 풍겼다.

“말씀드리기 외람되나, 병원엔 꽃가루에 민감한 환자들이 있어서 아마-”

“필요하면 가져가겠어요?”

아더는 흔쾌히 바구니를 내밀다가, 이내 다시 제가 챙겨 들었다.

“내가 숙소에 갖다 놓을 테니 먼저 가요.”

몇 번이나 관리인이 사양했지만, 아더는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버리지만 않으면 나야 얼마든지 좋지.”

아더는 무거운 꽃바구니를 양손에 든 채 숙소를 관리하는 집사의 뒤를 따랐다. 곧 나타난 간호 숙소 마당 앞에서 관리인은 필요한 걸 챙겨오겠다 말하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멀뚱히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더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작은 화단을 보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저런 처지가 되는 건가.”

거기엔 제각기 색을 뽐내는 꽃들이 두서없이 심겨 있었다. 아마 자신처럼 병원으로 보낸 꽃바구니가 그대로 옮겨진 듯 보였다.

몇 번 발을 까딱이던 아더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맨손으로 화단의 흙을 파냈다. 보는 이도 없는 마당에 대충 체면 버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쌍한 놈. 여기서라도 잘 살아라.”

선물의 주인에게 도착했다기엔 애매한 노릇이었지만, 아더는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며 튤립을 옮겨심기 시작했다.

가득 차 있던 꽃바구니가 거의 비워질 무렵, 아더의 곁으로 작은 그림자가 졌다.

“얼마나 대단한 비료를. 아.”

능청스런 말을 지껄이며 고개를 쳐들던 아더는 그대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눈치없는 꽃은 여전히 그의 손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관리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거기엔 느지막이 병원으로 향하던 베스가 서 있었다. 잠시 문가를 돌아본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수도가 터져서 지하실로 가셨어요. 제게 전해 달라고 하셔서.”

말을 마친 베스는 가만히 손을 뻗어 화단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모종삽이 놓여 있었다.

“아, 저게 저기에. 이런.”

괜스레 볼을 긁적이려던 아더는 제 손에 묻은 흙을 보곤 또다시 멍청한 소리를 했다. 민망해진 목덜미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럼.”

간단히 인사를 한 베스가 등을 돌리려 하자, 아더는 저도 모르게 삽을 쥐어 내밀었다.

“도와주시겠어요?”

“네?”

“이런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여유가 조금 있으시다면….”

아더는 말끝을 흐리며 아직 남은 꽃바구니를 가리켰다.

무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베스는 이내 조심스레 아더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서툰 손길이었지만 묵묵히 화단을 파내는 손등에 작은 힘줄이 돋아났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긴 했지만, 베스의 실력 또한 형편없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저보다 무신경한 손길로 꽃을 갖다 심기만 하는 여자의 모습에 아더는 고개를 숙였다. 참지 못한 웃음이 새 나올 것 같았다.

“간호사님도 뭐든 잘하시진 않네요.”

장난스런 말에 여자가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더는 바닥에 누인 꽃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사교춤도 잘 추시던데, 왜 어제 무도회엔 안 오셨어요.”

애써 넉살을 피웠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음엔 제 파트너도 한번 해주세요.”

그제야 아더는 베스를 돌아봤다. 새카만 눈동자에 태연한 척 구는 제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볍게 생각하세요. 모두가 사교 철 파트너를 결혼 상대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저처럼 그저, 한철의 봄을 즐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잠시 보던 아더는 망설이던 말을 뱉었다.

“비밀을 지켜준 대가로 춤 한번은…. 너무 어려운 부탁일까요?”

종전 날 새벽, 자신을 못 본 척해달라는 여자의 부탁을 그는 빌미 삼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구차하고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처음으로 던져보는 솔직한 마음이었다.

무언가 흉내 내지 않고, 척하지 않는 말은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다.

“어려울까요?”

아더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여자의 얼굴에서 문득 데베르를 떠올렸다. 하지만 비밀이라는 말에 흔들리는 눈은 분명 데베르와 달랐다.

몇 번 달싹이던 베스의 입술 새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어려울 것 같아요.”

완곡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아더는 그조차도 충분하다 여겼다. 늘 늦는 자신에게 이 정도면 정말 충분하다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궁상맞은 짓도 끝낼 시간이 왔다.

“간호사님도 병원으로 가시죠? 저도 이젠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서.”

먼저 자리를 떠나려던 아더는 제 발치에 놓인 빈 바구니를 보곤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아더’라고 적힌 카드를 주워들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럼 살펴 가세요, 베스 양.”

아더는 마지막 인사를 하곤 차에 올랐다. 주머니 속의 작은 카드가 꼴사납게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황궁으로 가. 최대한 빨리.”

차창 밖을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 *

“아직 외교단 사절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접견실로 들어가려는 아더를 수행인이 막았다.

이 시간에 아직 외교단이 있다니. 아더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섰다.

“코바흐? 브리틴?”

“그건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내겐 항상 답해줄 게 없지.”

아더는 진단서를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황제에게 그는 늘 이런 존재였다. 홀로 아는 비밀은 쥐여줬지만, 그 나머지는 어떤 것도 공유하지 않는 사이. 그 우스운 관계를 호이든은 가족이라 구슬렸다.

아더는 시간을 죽일 겸 밖으로 다시 나갔다. 적당히 어두컴컴한 나무 그늘에서 시가라도 태워볼 요량이었다.

불을 붙이려 고개를 숙일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황자님.”

커다란 인영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낯선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아더는 입에 문 시가를 다시 손에 쥐었다. 전장을 질리도록 뒹군 덕분에 낯선 인영의 얼굴만 보고도 그가 넥서스인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황자…?”

비릿한 실소가 새 나왔다. 아더 메이너는 제국민이 아닌 이들에게 사령관 또는 공작으로 불려야 했다. 황자라는 호칭은 선대를 기억하는 제국민들의 애칭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감히 자신을 황자라고 부르다니.

그 건방진 작태에 푸른 눈동자가 일순 가라앉았다.

“소속을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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