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화들짝 놀라 움츠러든 베스의 어깨가 뻣뻣해졌다. 뭐라 할 틈도 없이 닿은 입술이었다.
반쯤 내리뜬 데베르의 눈과 잔뜩 커진 베스의 눈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베스는 닿은 입술보다, 맞춰진 시선이 더 낯 뜨거워 재빨리 남자의 어깨를 밀쳤다.
데베르는 손을 뻗어 베스의 눈가를 톡 건드렸다.
“봐. 노려보지 않으니까 훨씬 낫잖아.”
그 말을 하며 다시 베스의 팔을 잡아당긴 데베르가 다시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베스?”
낡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딕시의 목소리에 베스가 얼른 그의 입술을 제 손으로 가렸다. 낮은 숨이 베스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베스? 벌써 도착했나?”
그사이 벌써 딕시가 숙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는데,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베스가 문을 막기 전, 먼저 일어난 데베르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잠금쇠를 밀자마자, 문고리가 철컥거리며 돌아갔다.
“어? 잘못 들었나?”
몇 번 문고리를 돌리던 딕시는 이내 하품을 하며 제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침대에 풀썩 쓰러졌는지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소리가 베스의 방에서도 꽤 선명히 들렸다.
“이 빌어먹을 건물은-”
욕을 중얼거리는 데베르에 베스는 기겁을 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잔뜩 경악에 찬 얼굴은 좀 전의 입맞춤은 벌써 잊은 게 분명했다.
곧 관리인도 숙소로 돌아왔는지 마감이 벗겨진 복도를 거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병원으로 갈걸.
베스는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괜히 병원 사람들 사이에서 공작과 함께 있었다는 소문이 돌까 봐, 위험해도 숙소를 택한 거였는데. 어떻게 된 게 이 남자와 있을 때마다 아둔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데베르는 이런 베스의 어지러운 속내는 알지 못하는 듯, 좁은 책상 위의 물건을 이것저것 건드리다 작은 램프를 발견하곤 가슴팍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자 딱 작은 책 한 페이지 정도만 밝힐 불이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났다.
이내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은 데베르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베스도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나치게 협소한 공간에서 서로의 발끝이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틈을 가지고 마주 봤다.
베스는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몰래 숙소 밖으로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쳐다보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뛰어내리기엔 높아.”
남자를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긴 전장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불현듯 그를 숙소 창문 밖으로 쫓아냈던 때가 떠오르긴 했지만, 전방의 낮은 이 층짜리 숙소를 삼 층짜리 웨인의 숙소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옷도 저번 무도회와는 달리 슐이 달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설마 전쟁이 또 발발했나.
베스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지자, 이내 남자는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을 열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늘어지는 남자의 그림자에 베스가 흠칫 몸을 물렸지만, 그는 책상 위의 노트 하나와 펜을 쥘 뿐이었다.
자리에 다시 주저앉은 그가 손을 놀리자, 궁금함을 담은 베스의 상체도 자연스레 앞으로 기울어졌다.
[본격적인 사교철이 되면 남자들은 제복이 예복이야.]
내민 노트엔 그와 닮은 적당히 날카로우면서도 반듯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왜요?”
베스의 물음에 이번엔 데베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펜으로 벽을 가리켰다. 조용히 하란 뜻에 대번에 시무룩해지는 얼굴이 희미한 빛에 비쳐 보였다.
[그러게.]
데베르는 이유를 알면서도 답해주지 않았다.
전쟁의 공을 가장 크게 쳐주는 넥서스답게 본격적인 구혼 철이 되면 남자들은 연미복으로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으레 여인들이 그 모습을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인정하기 때문이었지만, 적어도 이 여자에겐 아닐 것이다.
데베르는 가만히 베스의 모습을 바라봤다. 급하게 왔냐는 물음에 여자는 대번에 아니라고 쏘아붙였지만,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며, 병원에서와 똑같이 요령 없이 하나로 묶기만 한 머리카락은 데뷔탕트를 하던 하워드 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베스 제인스와는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잘 어울리네.”
제게 조용히 하랄 땐 언제고, 자기는 마음대로 목소리를 내는 데베르에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가락으로 노트를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고만 있긴 아까워.]
그러나 곧 건너온 낯간지러운 편지에 조금 전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구는 남자였다. 어쩌면 가끔이 아니라 항상일 수도 있지만.
베스는 노트를 돌려주지 않고, 꽉 쥐었다.
적막한 방 안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딕시도 벌써 잠들었는지 옆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틈을 보던 데베르는 조용히 입술을 뗐다.
“마지막이야.”
마지막이라니. 베스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데베르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군복이야. 이젠 보고 싶어도 못 봐.”
그는 능글맞은 말을 무던한 목소리로 잘만했다.
“군대장을 사임했거든.”
데베르는 브로치가 없는 제복 가슴팍을 만지작거렸다.
군대장을 사임했어. 더 이상 그 꼴로 살지 않을 거야.
언젠가 이 여자에게 꼭 제 입으로 해보고 싶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취해 있어도, 그 말을 듣는 여자의 얼굴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본 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마른 웃음이 묻어나는 말에 베스는 얼른 제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할 말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했다.
익명의 후원자로 나타나 구원자 행세를 해보고 싶었다 빈정거리던 말도, 군대장을 사임했음을 고백하는 말도, 결국은 모두 청혼과 같은 말이었다.
데베르 클리프는 그의 방식으로 매 순간 청혼을 뱉고 있었다.
베스도 이젠 그를 조금이나마 알았다.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지금이라도 이 남자의 착각을 깨트려야만 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다르게 보는 이 남자의 다정한 눈이 못 견디게 좋았지만, 더는 안 된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멍한 머릿속을 다시금 지겨운 그 소리로 일깨웠다.
“알아.”
하지만 예상과 다른 대답에 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가라앉은 남자의 눈에 장난기는 없었다.
“내가 그리 순진하진 않아서.”
데베르는 손에 쥔 펜을 툭 바닥으로 던졌다.
“만약 네가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 그럼 아마 우린 지금처럼 마주 볼 수 없겠지.”
촉을 세운 펜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어내렸다.
“베스 제인스가 그날 내게서 도망친 게 아니라. 긴 외출을 했다 생각하고 지금을 견디는 중이야.”
문에 고개를 기댄 데베르는 핏대가 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지금도 가끔 눈앞에 환영이 나타난다는 건 이 여자에겐 비밀이었다.
들킨 건 꼴사납게 떨리던 손 하나로 족했으니까.
“그러니 좋은 사람이니 뭐니 건방진 소리 하지 마.”
협박 같은 말을 하면서도 희미하게 끝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제 눈썹을 긁적이던 데베르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창밖은 날이 밝으려면 멀기만 했지만, 그는 잠금쇠를 밀었다.
“지금은….”
“지금 잡으면 안 돼.”
데베르는 목을 옥죄는 단추 하나를 풀었다. 목덜미에 열기가 올랐다.
“무슨 뜻인지 알잖아.”
그 한마디에 후다닥 달아오르는 여자의 귓바퀴가 보였다. 그러면서도 행여 그가 들킬까 안절부절못해 일어난 모습이 제 가슴께 어딘가를 간질거리게 했다. 그게 결국은 뻔한 욕정일지라도 말이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데베르는 성큼 다가가, 여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몰래 나가는 건 너보다 내가 능해.”
마지막 말과 함께 태연히 방 밖으로 사라졌다.
베스는 그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좁은 방안에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 *
아더는 따사로운 오후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비쳐드는 느지막한 햇살은 늦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아더는 신음을 내뱉으며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지난밤 무도회에서 답지 않게 과음을 한 게 원흉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이와 춤추는 게 달갑지 않아 애꿎은 술잔을 축내며 사내들과 어울리다 보니, 눈을 떴을 땐 이미 제 침실이었다.
아더는 고개를 반쯤 틀어 침실 한편에 놓인 꽃바구니를 바라봤다.
황자의 이름으로 웨인의 미혼 영애들에게 보내지는 꽃 선물은 이미 도착한 지 오래였다. 그건 사교 철을 맞으면 늘 하는 아더의 행사 중 하나였다. 모두에게 보내는 꽃은 결국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건 매년 돌아오는 구혼 철을 빠져나가는 저만의 궁책이었다.
“너무 속보이나….”
아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었다.
준비했던 수많은 꽃바구니 중, 제 눈앞에 있는 단 하나만이 색이 달랐다. 그 속에 담긴 노란 튤립은 그의 기억 속 잔상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여차하면 황가의 상징색이라고 둘러대지, 뭐.”
아더는 부스스한 몸을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제법 괜찮은 변명까지 떠올리고 나자, 깨질 것 같던 머리도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달랑거리는 설렁줄 소리마저도 꼭 새의 지저귐처럼 들릴 정도였으니.
“외출을 준비할까요, 황자님?”
곧이어 들어온 시종은 자연스럽게 협탁 위에 놓인 꽃바구니를 손에 들었다.
욕실로 걸어가던 아더는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시종이 든 꽃바구니를 가리켰다. 뭔가 망설이듯 주춤거리던 그는 이내 씩 웃었다.
“카드의 서명을 아더 메이너가 아닌, 아더로 바꿔 주겠어?”
그건 바람결에 들려오는 종소리보다도 청량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