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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0화 (90/206)

90화

붉은 석양빛이 너른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베스는 빛을 등진 채, 벽에 걸린 석판에 제 이름을 써넣는 중이었다.

“베스, 오늘 나이트를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석판을 흘깃 보던 아이네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이트 근무 칸엔 생뚱맞게 베스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은-”

“알아, 무도회 날인 거.”

베스는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며, 정말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가지 않을 거야.”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아이네스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무도회를 꺼리는 베스의 입장도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가는 참이었다.

베스라고 자신을 은근히 배척하는 사교계의 분위기를 모를 수 있을까. 아이네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자신을 먼저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한 병동은 이르게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정리를 마친 환자 기록서를 아무도 없는 병원장실에 둔 베스는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바깥은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 불빛과 뒤늦게 무도회장을 향하는 차의 헤드라이트를 빼면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베스의 시선이 병원 너머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늘 불이 켜져 있던 꼭대기도 오늘만큼은 어둠에 잠겨 캄캄하기만 했다.

벌써 연회장으로 간 걸까.

‘난 무도회에서 베스 제인스를 기다릴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베스는 더 이상의 상념이 떠오를세라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누구 기다려?”

딕시였다.

갑작스런 인영의 등장에 화들짝 어깨를 떤 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뭐지….”

잔뜩 상기된 베스의 얼굴을 본 딕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처럼 크게 웃는 일도,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없던 애가, 요즘 따라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문가를 자주 쳐다보는 게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바깥에 누가 있던데.”

그 말에 베스는 누구라고 물을 새도 없이, 병원 정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녀를 반기는 것은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 맞네.”

딕시는 자신을 돌아보는 친구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워드 백작님을 기다리는 건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매일 보는 나를 찾는 것도 아닐 테고.”

딕시는 손가락을 접으며 몇 명의 이름을 더 꼽았다. 모두 병원 사람들이었다. 그러더니 석판 앞으로 가, 태연하게 베스의 이름을 지웠다.

“마냥 기다리는 거 애타지 않아?”

딕시는 베스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어느 연회장에 홀로 서 있을지도 모를 데베르를 떠올렸다.

순간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떠오른 잔상에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미안해, 딕시. 하루만 부탁할게.”

내지르는듯한 말을 마지막으로 베스는 병원 후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머지않아 보이는 숙소로 뛰어 들어갈 때는 인사를 건네는 관리인에게 눈인사 한번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칠한 나무 난간에 손바닥이 스쳐도 아픈지를 몰랐다.

베스는 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쾅 소리가 날 만큼 거칠게 옷장을 열었다. 거기엔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마지막이야. 마지막.”

정신없이 그 말을 중얼거리며 드레스에 몸을 욱여넣었다. 단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은 드레스인데도 맞춘 듯 몸에 딱 맞았다.

넥라인을 자잘한 보석 장식이 둘러싸고 있어, 목걸이를 하지 않아도 꼭 한 것처럼 보이는 드레스였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틈도 없었다.

베스는 그대로 숙소 바깥으로 뛰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하워드의 차가 이 근처에 있을 게 뻔했다.

역시나 곧 모습을 드러낸 운전사를 본 베스는 재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연회장으로 가주세요.”

운전사는 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머리를 연회장 방향으로 돌렸다.

베스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마지막이란 말을 되뇌었다.

모르지 않았다. 데베르와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자신 때문이라는 걸.

내칠 수 있는 순간은 언제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가시 돋친 가지를 뜯어낸 남자가 피가 흐르는 손을 내밀었을 때. 숙소 밑 창가에서 자신을 불렀을 때. 정신을 잃은 그가 제게 고개를 기댔을 때.

매정하게 굴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회를 멀어지는 순간이 아닌, 함께하는 순간으로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힘없는 말일지언정 베스는 오늘 밤, 그 말에 기대보기로 했다.

결말이 뻔하다 해도, 적어도 그 남자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 마지막 욕심을 지금 부려보는 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린 베스는 환하게 빛나는 황궁 연회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도회가 시작하고 한참은 지난 후라, 바깥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시종과 시녀들만이 서 있었다.

베스가 계단을 올라오자 연회장 문가를 지키던 황궁 소속 시종이 베스의 손목에 작은 종이를 걸어주었다. 다음 춤의 상대를 미리 선점하는 예약지였다.

시종이 열어주는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베스는 문득 시커먼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곁에서 시종이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베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음악 소리가 멀어질수록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가본 적 있는 길이었다. 이 길 끝에서 그를 만났으니까.

복도는 인적이 드문 황궁 후원으로 이어졌다. 온갖 향기로운 꽃향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매캐한 시가 향을 흘릴 남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왔네.”

데베르 클리프.

이 정신 나간 남자.

익숙한 나무 등치 곁에 선 그가 보였다. 흉터가 있어도 매끈한 손끝에서 짙은 시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다린 보람이 있군.”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웃어 보였다. 그 유연한 모습에 베스는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애써 눌러 내렸다.

“급하게 왔어?”

“아니요.”

다정한 물음에도 팩 쏘아붙이는 여자에 데베르는 시가를 문 채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여자의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예약지를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거기에 덜떨어지는 이름이 쓰여 있진 않겠지.”

남자를 피해 베스가 얼른 손목을 뒤로 감추려 했지만, 제국의 군대장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미끈하게 손을 빠져나간 예약지는 남자의 커다란 손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텅 빈 예약지가 꽤 마음에 드는 듯 몇 번 제 손바닥 위에서 종이를 퉁기다,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잠시간 남자가 하는 양을 보던 베스도 이내 의중을 깨닫곤 팔을 뻗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나무 등치에 예약지를 대곤 빼곡하게 제 이름을 써나갔다.

마침내 끝장까지 제 이름을 박아 넣고 나서야 데베르는 예약지를 주인에게 건넸다.

베스는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데베르를 노려봤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시가를 베어 물 뿐이었다. 시가를 쥔 왼손에 얼핏 덜 아문 상처가 보였다.

왼손에 성기게 쥐고 있던 시가를 튕겨낸 데베르는 빈손을 에스코트하듯 정갈하게 내밀었다. 이전보다 더 벌어진 상처를 베스가 몰라볼 리 없었다.

“대체 뭘 했길래-”

“정해.”

데베르는 느긋한 눈짓으로 연회장 복도를 가리켰다.

“귀족 영애로서 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클리프 공작하고만 춤을 추던지, 아니면 자애로운 간호사가 되어 환자를 돌보던지.”

데베르는 답을 재촉하듯 내민 손을 까딱였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이곳을 벗어날 방안은 두 가지였지만, 잡을 손은 하나뿐인 상황이었다. 가만히 남자의 손을 노려보던 베스는 뭔가 이전과 다른 것을 발견하곤 한 걸음 다가갔다.

피가 맺혀 있다고?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없던 상처가 몇 개 더 생겨난 것도 모자라 희미하게 핏방울도 맺혀 있었다. 꼭 금방 상처가 생긴 모양새였다.

베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얼핏 눈에 걸린 푸른 꽃을 보곤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당신 정말 미쳤구나.”

“실수였어.”

혼잣말 같은 베스의 탄식도 데베르는 놓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어서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손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남자의 뜻대로였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간호 숙소 멀찌감치에서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베스는 데베르를 향해 손짓했다. 잔뜩 조심스러운 손짓이었지만, 느긋하게 걸어오는 남자는 그녀와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이제 곧 화단으로 나오실 거예요.”

베스는 이젠 제법 이 남자 앞에서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흘깃 남자의 손목을 쳐다보자, 그는 기꺼이 셔츠를 거둬 시계를 내밀었다.

그 눈치 빠른 모습이 얄미워 베스는 또 슬쩍 남자를 흘겨봤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숙소 문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지금!”

겨우 모습을 보인 관리인이 뒤뚱거리며 화단을 돌아 숙소 구석으로 사라지자, 베스는 얼른 남자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열린 숙소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이면 나이트 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이 도착하기엔 아직 먼 시간이었고, 바깥에서 일 층을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진 걸 이미 봤기에 베스는 얼른 계단으로 올라가라고 손을 팔랑거렸다.

관리실에서 꺼낸 의료 상자를 훔치듯이 품에 안은 베스는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널찍한 등을 밀었다. 대체 왜 이렇게 굼뜨게 구는 건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남자의 등이 몇 번 들썩이더니, 큰 선심 쓴다는 듯 의료 상자를 뺏어 들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그 요란한 소리에 울상을 짓는 건 또 베스였다.

“왜 이러세요?”

제 방문을 닫자마자 베스는 작게 쏘아붙였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소독약과 거즈를 꺼내 들었다.

데베르는 마치 제자리인 양 베스의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내밀었다.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방문 간호가 길바닥 아니면 후미진 숙소에서 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는데.”

그 말에 베스는 소독약이 흠뻑 젖은 거즈를 상처에 세게 문질렀지만,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디 그래서 아프겠어?”

되레 빈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베스는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하던 일에만 골몰했다. 소독을 마친 베스는 잡고 있던 남자의 손끝을 바라보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어둠을 힘입은 용기였다.

불도 못 켠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야.

그 다짐을 떠올리며 잡은 손끝을 놓으려는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노려보지 좀 마.”

그 말을 끝으로 익숙한 온기가 입술에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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