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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87화 (87/206)

87화

말을 마친 베스는 곧바로 등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하워드 또한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 있던 하워드는 제 무릎께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거짓말을 하진 않았구나, 루카.”

하워드의 옆자리엔 루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른 체구의 루카가 커다란 책상 뒤에 쭈그리고 있으니, 베스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도 내겐 본 그대로 진실만을 고해야 한단다. 알겠니?”

낮게 깔린 하워드의 목소리는 밖에서 덕망 있는 백작 흉내를 낼 때와 비슷했다. 루카는 그 이질감에 더 몸서리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야지.”

“네….”

“아가씨가 네게 이름도 지어주고, 널 꽤 귀하게 여기지 않니.”

어린 루카 정도는 하워드의 손안에 있는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베스가 이 저택을 힘들어해서 간호 숙소로 갔다는 걸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니?”

하워드는 기르는 개를 칭찬하듯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카의 목이 잔뜩 접혀 들었지만, 끈덕진 손길은 떠나지 않았다.

“숙소로 가야 하는 온갖 같잖은 변명을 했지만, 내겐 우습지. 넌 아가씨를 잘 보필해야 한단다. 그게 베스의 숨통을 잠깐 열어준 것에 대한 조건이야.”

하워드는 클리프 군수회사의 무역 건을 담은 신문을 들여다봤다. 색이 바랜 눈동자에 감추지 못한 탐욕이 번뜩였다.

* * *

“주제도 모르긴.”

라프넬은 응접실 안을 가볍게 거닐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 때마다, 뻗은 손가락 끝에 생화의 미끈한 꽃잎이 스치는 게 느껴졌다.

응접실에는 사교 철을 맞은 귀족 자제들의 선물을 빙자한 구애의 꽃이 넘쳐났다. 다들 공주의 심미안을 맞추려 꽤나 노력했는지, 넥서스의 갖은 꽃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응접실을 한 바퀴 돈 라프넬은 등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여린 줄기가 파들파들 떨렸다.

“건방지게.”

하지만 라프넬의 시선은 제 말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는 한철의 꽃들이 모두 그녀를 향해 있었다. 라프넬은 그 선망이 녹아든 구애를 받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데베르가 사교계에 제대로 얼굴을 비추자, 오히려 저를 향한 흠모 어린 눈은 더 많아졌다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그리고 라프넬은 이 모순을 사랑했다.

“다 한철의 즐거움일 뿐이지만….”

라프넬은 붉은 장미가 가득한 바구니 한쪽에 꽂힌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제국의 공주를 향한 찬탄 어린 시구가 적혀 있었다.

라프넬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까지 퍼져나갔다.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였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 고백도 해가 지나면 다른 여인을 향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지. 한 번쯤은.”

라프넬은 빼곡히 바닥을 채운 그녀의 작은 정원을 둘러봤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서 작은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가장 구석에 세워진 바구니엔, 꾸밈을 위한 안개꽃도 없이 오직 샛노란 꽃만이 가득 차 있었다.

노랗다 못해 황금빛을 띠는 꽃.

그 꽃은 브리틴의 상징이자, 선대 황후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라프넬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꼭 그녀의 온실 정원에 들이고야 마는 꽃이었으니까.

라프넬의 손이 황금색 꽃 더미 속에 마치 일부러 숨겨놓은 듯한 작은 카드를 쥐었다.

“라프넬…. 하.”

감히 공주의 칭호도, 황가의 성도 없이 제 이름만을 적어놓은 건방진 카드에 라프넬은 헛웃음을 지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이 불현듯 카드 끄트머리를 긁자, 습자지 같은 종이가 한 꺼풀 벗겨졌다.

라프넬의 눈이 가늘어졌다.

“브리틴어…?”

브리틴어에 능하지 못한 라프넬은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대충 읽어보려 했지만, 그 뜻을 알긴 어려웠다.

응접실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카드를 노려보던 라프넬은 창밖을 내다봤다. 비록 황궁에서 가장 작은 궁이긴 했지만, 넥서스의 영광은 그녀의 궁에서도 온전히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선대가 만든 것이지.

라프넬이 설렁줄을 흔들자, 공주의 축객령에 바깥에 서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들어왔다.

“너희 중에 브리틴에서 온 애가 누구지?”

눈치를 보던 몇 중 하나가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접니다. 공주님.”

“읽을 줄도 아니?”

“조, 조금은요.”

라프넬이 티테이블 위에 카드를 툭 던지자, 공주를 흘깃 본 하녀가 얼른 다가와 카드를 들여다봤다.

“‘가,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고?”

“거짓말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공주님. 어투가 조금 틀릴 수는 있지만 내용은 틀림없습니다.”

하녀는 새파래진 얼굴로 손사래까지 치며 공주에게 제가 번역한 문장의 뜻을 재차 얘기했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아더가 들으면 식겁하겠네.”

라프넬은 바람 빠진 웃음을 뱉으며, 속 내용이 드러난 카드를 들여다봤다.

누가 이런 건방진 내용을 보냈을까.

라프넬의 머릿속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졌다.

동그란 티테이블 위엔 아더가 갖다 놓은 푸른 향이 피어나고 있었다. 푸른 연기를 내며 피어나는 향을 잠시 바라보던 라프넬은 카드의 귀퉁이를 불씨에 갖다 댔다. 그러자 희미한 불꽃이 조금씩 카드를 좀먹기 시작했다.

상념을 날려준다는 향에, 상념을 더해주는 탄내가 섞여들었다.

“조심해야지.”

아더가 늘 제게 습관처럼 하던 말을 읊조렸다.

“벨을 불러와.”

태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바쁜 하루가 저문 제국 병원엔 간간이 환자들의 담소와 몇몇 나이트 근무자들이 오가는 발걸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병원으로 돌아온 베스도 로비 데스크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웬 말쑥한 청년 하나가 쭈뼛거리며 병원으로 들어섰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면회하실 수 없으세요.”

먼저 청년을 발견한 아이네스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청년의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베스도 눈앞의 청년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뵌 분 같은데…. 혹시 병원에 오신 적 있으세요?”

아이네스도 마찬가지였는지, 환자 명단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청년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제가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증상이 어떻게 되시나요?”

“증상이랄 건 없고, 아니, 아프지 않은 건 아닌데 그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청년을 보던 아이네스와 베스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베스는 슬며시 긴급 상황에 울리는 설렁줄을 쥐었다.

“영양제를 맞으면 될 것 같아요!”

“영양제요…?”

한밤중에 영양제를 맞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을 향한 의심 어린 시선이 더 짙어졌다. 베스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여차하면 숙소의 관리인이라도 불러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계획은 우습게 무너졌다.

“딕시 콜먼 간호사님께 영양제를 맞으면 될 것 같습니다!”

튀어나온 이름에 긴장이 맥없이 풀렸으니까.

“혹시, 전방 병원의 이병…. 맞으신가요?”

베스는 기억을 더듬어, 전방 병원에서 딕시에게 들꽃을 꺾어 내밀던 청년을 떠올렸다.

“어? 혹시 그 배에서?”

아이네스 또한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청년을 가리켰다.

청년은 민망한 지 제 귓가를 연신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셨어요. 간호사님들.”

병동 한쪽에 앉아 있는 청년을 향해 환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들었다. 잠들기엔 이른 밤, 적절한 먹잇감이 나타난 거였다.

“다시 생각해.”

환자 하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딕시 간호사가 입담은 좋은데 주사는 영 아니야.”

“그래, 청년. 내가 혈색 좋은 자네가 안타까워서 그래. 아니, 지금 수간호사가 멀쩡히 두 분이나 계시는데 하필.”

청년은 씩 웃었다. 앞선 간호사들을 대할 때보단 한결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전 좋은걸요.”

그런 청년을 보는 환자들의 표정은 더없이 착잡하게 변했다. 가끔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는 젊은 놈들이 있다니까. 그들은 혀를 끌끌 찼다.

“딕시, 저기.”

졸지에 간호 숙소에 있다 불려온 딕시는 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주사기와 지혈대를 챙겨 들었다.

베스와 아이네스는 재미난 구경거리에 잔뜩 장난스런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어, 세 분이나.”

때마침 등장한 세 명의 간호사의 기세에 눌린 청년이 다시 홍당무 같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야간학교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답지 않은 딕시의 엄한 말투에 아이네스는 웃음을 풋 터뜨렸다. 베스가 웃지 말라는 듯 아이네스의 등을 툭툭 쳤다.

“어… 그런데 영양제를 맞으면 더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마?”

베스는 설익은 풋내가 풍기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봤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향이 풍긴다면, 막 익어가는 복숭아 향이 나지 않을까.

이어지는 얘기를 듣자 하니, 종전 이후 둘은 인연을 꽤 길게 이어온 것 같았다. 딕시의 외국행에도 같이 오른 걸 보면 생각보다 관계가 깊나 싶었지만, 누구든 친구 삼는 딕시를 보면 꼭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다들 딕시의 입담을 자장가 삼아 하나둘씩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베스도 벽에 기대선 채 나른한 눈을 깜빡였다. 지금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귀를 찢는 것 같은 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슨 소리야?!”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딕시가 벌떡 일어났다.

“설렁줄이야.”

모두 급히 로비로 뛰어나갔다.

“클리프?”

설렁줄을 흔드는 시종의 로브를 알아본 아이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로브 가슴팍엔 클리프 인장이 새겨진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시종의 눈이 무리의 맨 앞에 선 베스를 향했다.

“긴급한 방문 간호입니다.”

에둘러 표현한 뜻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전담 간호사분을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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