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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86화 (86/206)

86화

“뭔데?”

누워있던 딕시가 무릎을 세워 일어서자, 베스는 얼른 창문부터 닫았다.

“다른 층인가 봐. 여긴 방음이 잘 안 되잖아.”

베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지만, 등은 판판하게 창에 붙였다. 심심한 베스의 반응에 금방 흥미가 식은 딕시는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나 잠시 일 층에 갔다 올게. 방문 기록지 넘긴다는 걸 깜빡했어.”

적당한 핑계를 댄 베스는 기록지를 손에 쥐곤 일어섰다. 그곳엔 오늘 간호 숙소의 손님이었던 데베르의 경위가 적혀 있었다.

“금방 돌아올게.”

그 인사를 끝으로 베스는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얼핏 시계를 보니, 지금쯤이면 관리인이 위층을 순찰할 시간이었다.

베스는 층계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다, 잽싸게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급하게 내려갔는지 숙소 입구 문을 열었을 땐, 훅 끼쳐오는 차가운 바람마저도 제법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나온 높은 목소리에 베스는 얼른 제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잔뜩 찡그린 눈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 이렇게-”

말을 하려다 말고, 베스는 얼른 데베르에게 뛰어갔다. 그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작은 손이 힘껏 그를 어둠 속으로 밀었다.

데베르도 기꺼이 그 미약한 힘을 따라 움직여 줬다.

“교대 시간이에요.”

베스는 맘껏 그를 밀어낸 게 미안했는지, 작은 변명을 덧붙였다. 그녀의 말대로 지친 얼굴의 간호사 몇이 간호 숙소를 향해 짝을 이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베스는 홱 고개를 꺾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손엔 여전히 작은 조약돌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조약돌은 관리인이 아끼는 화단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숨어야 해?”

한 손에 쥔 조약돌을 장난감처럼 굴리던 그가 던지듯 물었다.

베스도 순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겨우 입을 뗐다.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 얘기를 들은 남자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얘기가 꽤 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왜?”

짧은 물음에서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호기심과 기어코 이 질문의 답을 듣겠다는 호승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추문이 생기니까요.”

“꼭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네.”

베스는 말아 넣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제멋대로야. 말하고 싶을 땐 쏘아붙이고, 말하기 싫을 땐 입 다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조약돌을 화단으로 던졌다. 잠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사위가 고요해졌다.

둘 중 누군가 입을 열지 않으면 이 침묵은 해가 뜰 때까지도 이어질 것만 같았다.

“왜 오셨어요. 후원자 접견 시간도 끝났는데.”

“그러게. 후원자 접견 시간도 끝났는데.”

밤과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베스는 행여나 제 마음이 또다시 물러질세라, 조약돌이 던져진 화단만을 고집스럽게 내려다봤다. 던져진 조약돌 몇 개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앞으로 남자가 내민 건 뜯은 지 얼마 안 된 연고였다. 베스는 내민 연고를 쳐다보기만 했다.

“병원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답답하게 굴지 마.”

데베르는 베스의 손을 낚아채 그 위에 연고 통을 놓았다. 베스는 제 손을 감싼 손에서 느껴지는 거칠한 붕대 조각을 바라봤다. 성기게 감긴 모양새로 봐선 혼자 한 게 분명했다.

“혼자 하셨어요?”

“그럼 누가 해줬을까 봐?”

아까부터 말꼬리를 잡으며 빙글거리는 남자에 베스가 잔뜩 눈을 찌푸렸다.

이 여자의 이런 얼굴은 나만 알겠지.

기묘한 만족감에 데베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음부턴 가문 주치의에게 가세요.”

대답 없는 그를 슬쩍 흘겨본 베스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벗기기 시작했다. 금세 드러난 상처는 아직 아물 시간이 필요했다.

“이 상처는 붕대로 압박하기보다는 적당히 바람이 통하는 편이 나아요. 손 쓸 일이 많다면 붕대를 감으셔야겠지만…. 다행히 왼손이네요.”

“기억하네.”

또 이러지. 베스는 이젠 정말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간지러운 선을 넘나드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상처는 그렇게 낫는 거면, 다른 상처는.”

“네?”

데베르는 찰나의 틈을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등에 있는 흉터는. 어떻게 해야 낫는데.”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찔러서 비집고라도 들어가면 됐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왜. 이젠 전쟁도 끝났으니까 그냥 모른 척하려고?”

장난도, 빈정거림도, 그렇다고 애타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무심한 말투가 오히려 베스의 어딘가를 찔렀다.

죄책감.

데베르가 베스의 틈에서 읽은 건 그것이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 모르지 않잖아.”

베스는 눈을 떨궜다. 그러나 그곳엔 여전히 남자의 손이 있었다. 가시에 찔린 자국과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가득한 손이.

언젠가 이 남자의 향이 무겁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협탁을 넘어오는 매캐한 시가 향이 그러했고, 곁에 서면 은은하게 풍기는 서늘한 체향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무거운 건 이 남자의 시선이구나.

순간, 남자의 손이 경련하듯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베스가 깜짝 놀라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재빨리 등 뒤로 손을 감췄다.

제길. 데베르는 튀어나오는 욕을 참기 위해 혀끝을 깨물었다. 제 의지와는 별개로 경련하는 손을 쥐어짜듯 움켜쥐자, 상처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연고들이 꼴사납게 짓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데베르는 말을 끊었다.

“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한 남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데베르는 고개를 꺾어 제 머리 위를 한번 올려다봤다. 별 하나 없이 캄캄한 하늘이 아득할 만큼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넌 이런 순간에만 날 보지.”

그 사실이 조금은 허망하면서도, 또 못 견디게 그를 안도하게 했다.

“엇.”

별안간 뚝 떨어진 남자의 몸통에 베스가 손을 뻗기도 전, 그의 숨이 목덜미에 먼저 닿았다. 쓰러지듯 베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데베르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무게를 못 이겨 몇 걸음 뒷걸음친 베스의 등 뒤로 울퉁불퉁한 벽돌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숨을 쉬고만 있었다.

베스의 시야를 가린 너른 어깨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오르내렸다.

포옹도 부축도 아닌 모양새로 얼마나 있었을까.

남자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등 뒤로 감췄던 손도 제자리로 돌아온 채였다.

“가볼게.”

베스는 걸어가는 데베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건넬 인사가 없었다. 건네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차에 오른 그의 시선이 잠시 제게 닿았다고 느꼈지만 찰나였다. 베스는 멀어지는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잠시 미끈한 손을 꼼지락거리던 베스는 숙소 입구로 다시 걸음을 돌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눈에 익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아가씨.”

베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어붙은 듯한 입술을 달싹여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죠?”

“지금 가셔야 합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주저 없이 그림자 사이사이를 밟으며 숙소 바깥으로 걸어갔다.

의료 보급차 사이에 세워진 차 한 대에 베스를 태운 남자는 자연스레 하워드 가로 향했다.

“내일 제가 직접 가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제 착각인가요.”

“‘예외’가 있을 땐, 바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예외….”

예외. 베스는 그 말을 곱씹으며 지겹기만 한 하워드 저택 입구의 작은 정원을 노려봤다. 이국적인 꽃과 덤불로 가득 채워진 정원은 하워드의 취향을 말해주고 있었다.

베스는 아직 제 손에 묻어있는 연고를 거칠게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뚜벅뚜벅 계단을 오를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죽은 것만 같은 저택이었지만, 복도 곳곳을 돌아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시종과 하녀들이 서 있었다.

베스는 구역감을 참으며 하워드의 서재 앞에 섰다.

채 숨을 고르기도 전, 두드리지도 않은 문이 먼저 열렸다.

“부르셨어요.”

베스도 이젠 적당히 유순한 얼굴을 흉내 낼 줄 알았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니 예외가 있었나 보군.”

하워드는 입술을 한번 씰룩이더니, 다시 제 서무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쌓인 서류들엔 하워드가의 인장이 즐비하게 찍혀 있었다.

“진척은 있는 거니?”

“그 남자가 숙소 앞으로 찾아왔어요.”

“그리고.”

내리깐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옛날얘기를 했습니다.”

“옛날? 흠, 종전 직전을 얘기하는 건가?”

하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베스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숙소로 드레스를 보냈는데.”

베스는 브로치에 찔린 흉터가 남은 손끝을 아프게 쥐어뜯었다.

“신사의 도리를 다하시는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특별한 말을 한 건 없고?”

하워드는 무도회에서 연방 베스에게 청혼할 것만 같던 데베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

“흠.”

하워드의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몇 번 쿡쿡 찍자, 고인 잉크 방울이 종이의 결을 타고 퍼져나갔다.

“우리의 계획대로 될 것 같니?”

하워드는 의견을 묻는 이가 아니었다. 이 질물은 그저 명령을 다른 모양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나의 계획대로 돼야 한다.

하워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러고 싶으시다면….”

베스는 커다란 방 끝에 앉아 있는 하워드를 과녁처럼 노려봤다. 꼭 단 하나의 표적인 것처럼.

“저도, 그 남자도 재촉하지 마세요.”

“재촉?”

베스의 눈썹이 들썩였다.

“네, 재촉이요. 그 남자에게 저는 그저 찰나의 흥밋거리 정도뿐이니까요.”

단단한 목소리가 날아갔다.

“사라졌다 나타났기에 조금 더 관심 가지는 것일 뿐. 언제라도 시선을 거둘 남자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네게 시선을 두고 있단 뜻으로 들리는군.”

하워드는 노련하게 숨은 뜻을 알아채곤 킬킬 웃었다.

베스는 애써 미소 지었다.

“길가의 주인 없는 개를 조금 귀여워하는 정도입니다.”

거짓말은 언제고 능숙해지지 않았으니까.

“그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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