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베스는 문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데베르의 구두 끝이 베스를 향했다.
“그런 차림으로 일하시는 줄은 몰랐는데.”
남자의 시선이 발목 위에서 달랑거리는 원피스 끄트머리로 떨어졌다. 무감한 눈빛이었지만, 베스는 그 시선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느껴져 얼른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이리 급히 오신 걸 봐선.”
공주의 티파티를 모를 리도 없으면서, 남자는 천연스럽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데베르는 꽤나 너그러운 공작 흉내를 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타이 없이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모두가 상상한 연식 있는 거부 후원자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후원을.”
어떻게 이런 거액의 후원을 하게 되셨는지, 입에 발린 칭찬이라도 해야 했지만, 그 당사자가 데베르 클리프란 걸 안 이상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지금 이 순간을 재밌는 놀이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글쎄. 구원자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나 보죠.”
자리에서 일어난 데베르는 한 걸음 베스에게 다가갔다. 면담실에 첫발을 들이자마자 굳어버린 베스에게 뒷걸음질할 공간은 없었다. 금세 등 뒤에 닫는 뭉툭한 손잡이에 베스는 어느새 숨까지 참고 있었다.
데베르의 고개가 조금 숙어지자, 베스의 귓가 언저리에서 얼핏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달칵.
그 긴장이 무색하게 등 뒤로 시원한 공기가 닿았다.
“병원부터 보겠습니다.”
문고리를 쥔 데베르가 먼저 복도로 나섰다.
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저 남자 앞에서 바보가 되는 건 또 자신뿐이었다.
이미 늦었는데 옷이라도 갈아입을걸.
때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남자를 따라가는데, 문득 그가 뒤를 돌아봤다.
“잘 어울리시네요.”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데베르는 눈짓으로 원피스를 가리켰다.
“베스 양의 미감은 아닌 것 같지만.”
픽 웃은 데베르는 본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복도를 걸어갔다.
갈아입고 왔어야 했는데.
베스는 다시 한번 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종종걸음쳤다. 저 남자의 걸음이 빠른 게 조금은 다행이었다. 시뻘건 얼굴을 들키는 것보단, 차라리 뒤처지는 게 나았다.
제국 병원은 웨인에서도 손꼽히는 신식 건물 중 하나였다.
베스가 이리저리 층을 돌며 병동과 수술실, 약제실 등을 소개했지만, 남자의 관심은 병원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창 대꾸가 없다 싶어 슬쩍 옆을 올려다보면, 그는 베스가 설명하는 공간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더 둘러보고 싶으신 곳 있으신가요?”
데베르는 그제야 가만히 모아쥔 베스의 손을 내려다봤다. 작은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한때는 목숨줄처럼 펜과 종이를 쥐고 있었으면서.
데베르는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간호 숙소로 가죠.”
커다란 손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 또한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베스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병원 후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병원과 숙소는 한 블록 정도 옆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던 데베르는, 외벽 벽돌이 얼기설기 튀어나온 간호 숙소를 보자마자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쏟아부은 돈이 이곳까진 가지 않았나 보군요.”
아, 당황한 베스가 얼른 숙소를 가리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어쨌건 지금 그는 유의미한 후원자였고, 자신은 몰리 부인을 대신해 병원을 대변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아직 사람들이 사는 숙소를 대번에 헐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내부는 틈틈이 보수를 해서 아주 깨끗해요. 음, 간호사들의 만족도도 높고요. 좁긴 해도 개인 방이 있거든요. 항상 관리인이 계셔서 혼자 사는 간호사들의 신변도 안전합니다. 그리고.”
무언가 더 숙소를 칭찬하려던 베스는 연신 눈을 굴리며 척 보기에도 낡은 숙소를 흘깃 쳐다봤다.
그 사이, 한걸음 뒤에 있던 데베르가 베스를 앞질러 갔다.
“어이쿠, 공작님이.”
주저 없이 숙소로 들이닥친 이방인을 본 관리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웨인에서 뼈가 굵은 이상, 그의 머리카락 색만 보고도 클리프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나이가 찬 이들은 잿빛 머리를 보면 데베르보다는 카시우스를 여전히 더 선명하게 떠올렸다.
“후원자 접견 날이에요.”
베스가 방문 목적을 알리자, 관리인은 벽에 달린 철제 상자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베스의 방 열쇠였다.
제 방을 보여줘야 하는 게 석연치 않았지만, 다른 도리도 없었다. 주인도 없는 방을 맘대로 보여 줄 순 없으니.
계단 위에 한 칸 올라선 베스가 데베르와 눈을 마주쳤다.
“따라오세요.”
남자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와 함께 관리인도 올라왔지만, 이내 울린 전화벨 소리에 급하게 로비로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베스는 맨 꼭대기 끝방으로 걸어갔다. 걸어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소리가 요란했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은 모두 똑같습니다.”
베스는 작은 방문을 활짝 열고, 문가에 붙어섰다.
데베르는 한눈에 보이는 좁은 방안을 죽 훑었다. 볼 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손바닥만 한 침대 옆엔 그보다 반절은 작은 크기의 책상이 들어가 있었고, 복도의 나무판자와 똑같은 색의 옷장이 한편에 세워져 있는 게 전부였다.
데베르는 침대맡의 창을 열었다.
“조금 높네요.”
의미 없는 말을 한 그는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보세요.”
또 저번처럼 가까이 오란 소리에 베스가 고개를 젓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창밖을 가리켰다.
“제게 가까이 오란 뜻이 아니라, 여길 보란 뜻이었습니다.”
베스는 후다닥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은 평범했다. 늘 그렇듯이 관리인이 가꾸는 화단이 있고, 나무 몇 그루가 곁을 지키고 있는 그저 그런 풍경.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베스가 남자를 올려다보자, 데베르가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겠어요?”
“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냐고.”
“제가요?”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잔뜩 혼란스런 얼굴로 밖을 내다보는 게, 이 쓸데없는 질문을 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데베르는 결국 제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베스 제인스는 여전하다.
이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면서 묘한 충동질이 올라왔다.
잔뜩 날을 세우고, 자신은 이전과 다르노라 단단한 체하려 해봐도 제가 기억하는 베스는 변함없었다. 수가 뻔한 놀림에도 새빨개진 얼굴로 몰리 공작 내외를 두둔하고, 같잖은 연기에도 결국 속아 넘어가 제게 기쁨을 주는 나의 베스 제인스.
“농담입니다.”
농담이라는 말을 하기엔 지나치게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베스는 기가 막혀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숨기지 못한 감정이 말간 눈동자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결국엔 애석한 입술만 깨물 수밖에 없었다. 선을 넘는 데는 도가 튼 남자였으니까.
“접견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
베스는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데베르는 책상 위에 놓인 책 몇 권을 들썩였다.
“계속 입 다물고 지냈으면 억울할 뻔했겠어.”
그는 손쉽게 익명의 후원자와 여자가 아는 데베르 클리프 사이를 오갔다.
농담인지, 비꼬는 것인지 모를 말에 베스는 저도 모르게 창턱을 세게 쥐었다.
“안 했네.”
순간, 미온한 손가락이 노란 원피스 칼라 언저리에 닿자 베스는 얼른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불순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듯 담백하게 손을 물렸다. 친히 먼저 문가로 걸어가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스는 밋밋한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브로치가 달린 목줄은 예상치 못하게 그가 병원으로 찾아온 이후, 책상 서랍 깊숙이 숨긴지 오래였다.
“잘했어. 어울리진 않더라.”
눈치 또한 귀신같은 남자였다.
* * *
“그 후원자가 데베르 공작님이라고? 와, 그럼 이중으로 후원한 거잖아.”
딕시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클리프가의 후원은 후원대로 하고, 개인적인 익명 후원도 그렇게나 많이 했다고? 돈이 진짜 넘치시나 봐.”
“그러실 수도 있지.”
딕시의 채신머리없는 소리에 아이네스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그런데 왜 브리틴 은행을 통해 주셨을까?”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네스의 물음에 이번엔 딕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브리틴 은행이 비밀 유지 하나는 끝내주잖아. 그건 폐하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익명으로 거액의 돈을 움직이기에 브리틴보다 좋은 곳이 없긴 하지.”
딕시는 벌러덩 뒤로 누운 채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피 뽑는 것보단 돈 뽑는 게 더 적성에 맞는데.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이젠 너희를 만나기도 어려우니.”
딕시는 우는 체를 하며 아이네스와 베스의 팔에 제 얼굴을 비볐다.
“혹시 어느 날 내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나를 잊어선 안 돼. 알겠지?”
“베스, 얘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내가 요즘 틈틈이 사업을 구상 중이거든? 혹시 고매한 영애들께서도 이 사업에 동참할 생각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사양할게.”
아이네스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시 한번 방안에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좁은 방 안은 세 명이 앉기도 여의찮아 딕시는 침대에, 아이네스는 책상 의자에, 베스는 창턱에 올라앉아 있었다.
탁.
그때, 작은 파열음이 베스의 귓가에 꽂혔다. 얼핏 뒤를 돌아봤지만 새카만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베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이어지는 딕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탁.
“어디서 자꾸 탁탁거리는 거야? 밑층인가?”
이번에는 딕시도 들었는지 작은 방안을 휙휙 돌아봤다.
탁.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베스는 얼른 창문을 열었다.
“뭐 있어?”
딕시의 물음에 베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곳엔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 겨울날과 똑같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