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 순간, 테라스 양단에 세워진 가로등 전구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지지직거리던 가로등은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어둡던 사위를 밝혔다.
베스는 차갑게 식은 손을 제 치맛자락에 문질렀다.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온전히 보였지만, 고요한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둥근 테이블 끄트머리에 있는 체스판을 끌고 왔다.
가만히 기물을 정렬하던 데베르가 체스를 둘 줄 아냐는 뜻을 담아 퀸을 흔들자,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손이 상아로 다듬어진 기물을 반듯하게 정렬했다.
순식간에 서로 마주 본 기물이 대결하듯 체스판의 양쪽에 있었다.
“전투를 앞두면 내가 뭘 하는 줄 알아?”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 베스에게 넘어왔다. 베스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젓자, 데베르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눈썹만 들썩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상상해.”
남자의 손이 기물 하나를 움직였다. 느릿하지만 주저 없는 손길은 아군과 적군을 번갈아 오갔다.
“생길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수를, 밤이 새도록 떠올려.”
작은 기물들이 서로의 킹을 노리며 오가는 모습은, 흡사 작은 전쟁을 위에서 직관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때, 새카만 킹이 남자의 손 아래에서 쓰러졌다.
“나는 내 상상 속에서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죽어있어.”
데베르는 어지러이 얽힌 기물을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조금 전의 패전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새카만 킹은 의연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럼 다시 상상해. 내가 죽을 때까지.”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기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한 번 쓰러졌던 킹은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다 진짜 전투에 나가면 헷갈려. 이게 내 상상 인지, 실제인지. 내가 산 건지, 죽은 건지.”
남자의 손가락이 체스판 위에 쓰러진 킹을 도로록 굴렸다. 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기물을 베스는 말없이 바라봤다.
“내가 지나치게 태연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나긋한 목소리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사랑을 속삭인다고 착각할 만큼 달콤하게 그는 속삭였다.
“가난한 평민 간호사가, 갑자기 백작가의 양녀가 되어 나타났는데. 심지어 막혀있던 말문까지 트였는데 말이야.”
베스는 테이블 아래 숨긴 손을 맞잡았다. 배어 나온 땀에 미끈거리는 손이 연거푸 미끄러졌다.
그새 대열을 갖춘 기물은 다시금 남자의 손에 놀아나기 시작했다. 벌써 세 번째 판의 시작이었다.
“난 널 수천 번, 수만 번 상상했어. 그 속에서 죽은 게 누구일 것 같아.”
데베르는 홀로 하는 체스를 이어가다 말고, 대뜸 킹부터 쓰러트렸다. 규칙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아직 백색의 기물은 그가 쓰러트린 킹에게 다가오지도 않았으니까.
“보호구역, 정신 병원, 하물며 그저 내 환각 중 하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 그런데 고작 넥서스 귀족의 양녀쯤이야.”
데베르의 시선이 고집스럽게 닫힌 작은 입술을 응시했다.
“말문이 트인 건 상상했던 수에 없긴 하지만.”
데베르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자신이 엎어버린 판을 말끔히 정리했다.
“이제 마지막 판이야.”
항상 백색 말부터 먼저 움직이던 그는 처음으로 흑색 말로 첫수를 두었다. 규칙에 어긋난 것이었지만, 베스는 알지 못했다.
앞선 판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기물들이 어지럽게 얽혀 서로를 죽이고, 죽어 나가기를 반복했다. 한참의 접전 끝에 남자의 손끝이 백색의 킹을 짚었다.
체스를 모르는 베스도, 이젠 그 백색이 저와 이 남자 중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나 여러 번 죽어줬는데.”
그의 손가락에 걸쳐진 새하얀 킹이 쓰러질 듯 말 듯 위태롭게 까딱였다.
“너도 한 번쯤은 내게 져 줘야지.”
마침내 백색의 킹이 뚝, 체스판 밑으로 떨어졌다.
“우린 이 사교 철이 끝나기 전에 결혼할 거야.”
틈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집요한 말은 맹세와도 비슷했다.
베스는 가로등 빛에 그늘진 남자의 눈을 마주 봤다. 그 음울한 시선은 한때는 두렵다고도 느꼈던 것이었다.
“여긴 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왔어. 너와 나도 다를 바는 없지.”
그제야 베스는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남녀의 얼굴을 무도회에서 얼핏 봤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긴, 이 시간에 여유롭게 체스나 두며 차와 술을 마시는 이들이 평민일 리는 없었다.
테라스 너머로 제 가문의 젊은 주인을 기다리던 차들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내뿜으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그 속에 섞여들었다.
“웨인에 여름이 올쯤엔, 넌 베스 제인스가 아니라 베스 클리프일 거야.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천박한 걸 주는 건 유감이군.”
그 말을 뱉으며 데베르는 처음으로 식어 빠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선들한 밤바람이 불기 시작한 테라스엔 데베르와 베스뿐이었다.
데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밍밍해진 위스키잔 위로 내민 손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베스는 쥐어짜듯 맞잡은 손을 펴지 않았다. 어차피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웨인의 사교 예절 따위 언제든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데베르는 기어코 그 주먹 쥔 손마저도 제 손으로 감쌌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예우를 지켜야지. 베스 제인스 양.”
끝까지 사교 예절을 물고 늘어지는 남자였다.
차에 탄 베스는 묵묵히 차창 밖의 풍경만 바라봤다. 낮에는 낯설던 웨인이 이제야 익숙하게 보였다.
“거절할 수도 있나요.”
저 멀리 불이 켜진 간호 숙소 건물이 보일 때에서야, 베스는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베스는 데베르를 돌아봤다. 꽤 날카로운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베스를 보지 않은 채, 제 손가락으로 핸들만 툭툭 쳤다.
“원하신다면.”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하지만 그 실없는 말투가 더 완강하게 들린다면 착각인 걸까.
베스는 한숨을 삼키며 간호 숙소 앞에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잽싸게 내렸다. 으레 습관처럼 인사를 하려던 입술이 맥없이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또 봐요. 잘 가요. 오늘 감사했어요. 그 어떤 인사도 남자와 자신 사이에선 이젠 어색하기만 했다.
그때, 핸들에 고개를 기댄 채 여자를 보던 데베르의 손이 까딱였다.
“와 봐.”
불현듯 들려온 강압적인 명령에 베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데베르는 어쩐지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꼭 그 겨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면 조금 우스우려나.
“말 안 해준 게 있어. 안 들으면 후회할 거야.”
그 말에 여자가 다시 제게 주춤주춤 다가오는 게 또 퍽 그의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베스 제인스는 여전했다.
“공식 청혼은 청혼서가 도착하고 나서야. 지금 거절해봤자 지레 설레발이라고 망신당할 수 있어.”
지레 설레발. 망신. 그 말에 베스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미 망신은 당신이 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는 얼굴이 귓바퀴만큼이나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망신당할 수는 없잖아.”
그 순간, 베스는 얼른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제 안에서 기묘한 안도감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예전처럼 놀리고, 그때처럼 웃어 보이는 이 남자에게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으니까.
구두코를 바닥에 쿡쿡 내찌르던 베스는 재빠르게 읊조렸다.
“제가 알아서 해요. 안녕히 가세요.”
진작 안녕히 가라는 말이나 할걸.
괜히 머릿속에 떠오른 낯간지러운 인사말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게 내심 억울했던 베스는 성큼성큼 숙소 문으로 걸어갔다.
숙소 문을 열 때까지도 길게 뻗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발끝에 닿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복도의 불빛에 달아오른 얼굴이 들킬세라 얼른 위층으로 뛰어 올라간 베스는 제 방문을 굳게 잠그고 나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려 커튼부터 치려는데, 침대 위의 못 보던 상자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
상자를 연 베스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넥서스 군복의 감색 빛을 닮은 드레스.
으레 동봉되는 짧은 카드 한 장 없어도 보낸 이를 모를 수는 없었다.
밤하늘을 닮은 감색 드레스 가슴팍에 넥서스 금장 브로치를 놓을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 * *
어두컴컴한 계단을 작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다. 복도 등불에 그늘진 그림자에 얼핏 짧은 머리가 비쳤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방금 숙소로 들어가시는 걸 봤습니다.”
작은 두 손을 모은 루카는 제 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감히 저 앞에 있는 하워드 백작을 마주 볼 용기는 없는 듯 커다란 눈만 연신 깜빡였다.
“이른 오후에 집사라는 자가 찾아와서 아가씨를 모시고 갔습니다.”
“어디로.”
무심한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이 전해졌다.
“그, 그건. 제가 뒤늦게 따라가서.”
루카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놨지만,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하워드 앞에서 핑계라니. 막막한 두려움에 눈물이 불쑥 삐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하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 집사만 홀로 먼저 돌아와 어떤 상자를 맡겨놓고 가셨어요. 그리고 한 세 시간쯤 지나고 나서 공작님과 돌아오셨습니다.”
“더 본 건 없고?”
“네?”
“더 볼만한 게 있었냐고 묻지 않니.”
볼만한 것? 하워드의 인내심이 닳기 전에 얼른 답을 해야 하는데. 루카는 연신 머릿속에 볼만한 것의 뜻을 헤아렸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공작이 아가씨에게 입을 맞춘다거나, 안는다거나 그런 것 말이다.”
하워드는 애써 미소 지으며 루카의 대답을 독촉했다. 그제야 백작의 말을 알아들은 루카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것은 일절 없었습니다!”
루카는 죄라도 지은 것 같은 얼굴로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쯧. 하워드는 짧게 혀를 차며 보던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앞으로도 네 아가씨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을 떼지 말렴. 그게 목숨을 저당 잡힌 네 역할이니.”
문가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자 하나가 문을 다시 열었다. 루카는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진 알겠지.”
지독한 음성은 질기게도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