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81화 (81/206)

81화

‘다음엔 신사의 도리를 챙겨 찾아뵙죠.’

그 말이 이 뜻이었나.

베스는 난감한 얼굴로 마주 잡은 제 손에 힘을 줬다.

“저는 괜-”

“괜찮다고 말씀하셔도, 꼭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데베르 공작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드럽게 베스의 말을 끊은 집사가 덧붙였다.

“일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데뷔탕트니까요.”

만약 눈앞에 있는 이가 그 남자였다면 주저 없이 돌아가라 할 텐데. 베스는 세월의 흐름이 묻어나는 집사를 바라봤다.

어쩌면 제 약한 부분을 알고 집사를 보냈을지도.

베스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내디뎠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죠?”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타고 가시죠.”

베스는 잠자코 집사가 이끄는 길을 따라갔다. 그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검은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주는 집사를 향해 베스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차는 웨인 중심가를 빠르게 지나갔다. 차창 너머론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베스는 그 모든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항상 컴컴한 밤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길과 같은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웨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실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차는 중심가 끝자락에 있는 의상실 앞에서 멈추어 섰다.

“공작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베스 제인스 양.”

집사의 말에,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겉보기엔 가시 돋친 꽃가지를 우악스럽게 쥐어뜯던 남자의 집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온화한 이였지만, 그도 클리프 가의 사람이긴 한 모양이었다.

기어코 베스 제인스란 이름으로 저를 불렀으니 말이다.

의상실 입구로 이어지는 몇 안 되는 계단 앞에서 베스는 잠시 멈추어 섰다.

낮에 그 남자를 만나는 게 얼마 만인 걸까.

하지만, 그 상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문이 먼저 열렸다.

“대체 밖에서 뭘 하는 거야.”

입구를 다 가릴 기세로 서 있는 데베르는 마치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오라 고개를 까딱였다.

“역시. 집사를 보내길 잘했네.”

설마 하던 생각이 들어맞았단 생각에 베스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남자를 올려봤다. 그러나 그런 여자의 반응에도 데베르는 천연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갔으면 네가 왔을까?”

맞는 말만 골라 하는 남자였다.

베스는 찌푸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틀었지만, 데베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꼬았다.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니까.”

남자는 꽤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을 한 사람치곤 금세 등을 돌렸다. 맞은편 소파에 여유롭게 걸터앉는 그를 보는 사이, 베스의 앞으로 빼빼 마른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이 분이신가 보군요.”

날카로운 안경테를 코끝에 걸친 재단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베스를 한 번 죽 훑고는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세요.”

종이에 뭔가를 끄적인 재단사는 커튼 뒤에서 커다란 행거를 들고 나타났다. 그곳엔 갖은 드레스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이런 쪽에 둔한 베스라도, 그것들이 값비싸단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베스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소파에 앉은 데베르를 돌아봤다. 동그란 티테이블에 턱을 괸 데베르는 여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데베르는 뒷말은 잇지 않은 채, 베스의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새 그녀의 곁엔 보랏빛 드레스를 든 재단사가 서 있었다.

그는 빙글거리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꽤나 인상적이어서. 보라색이.”

필시 가면무도회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 남자가 기억하지 못 하리라 생각진 않았지만….

몇 번 입술을 깨물던 베스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감상용 꽃이 아니에요.”

“그러면.”

데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온 공작에게 자연스레 드레스를 넘긴 재단사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평생을 귀족 중의 귀족에게만 의상실 문을 연 자답게 눈치껏 행동할 줄 알았다.

“이렇게 하면 좀 신사다울까?”

데베르는 손에 든 드레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손짓을 따라 가슴팍에 자잘하게 새겨진 보석 장식이 조명을 반사했다.

미약한 웃음기마저 사라진 남자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그건, 언젠가부터 베스가 잊은 눈빛이기도 했다.

“감상용 꽃이 아니다, 라.”

데베르의 시선이 느릿하게 여자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억 속 전장에서보다 조금 더 고집스럽고, 조금 더 불안한 얼굴이었다.

“하워드와는 생각이 다른가 보군.”

그는 드레스를 근처 소파 언저리에 툭 던졌다. 맥없이 널브러진 드레스에 베스의 시선이 꽂혔다.

하여간에 쓸데없는 것들엔 눈길을 잘만 주지.

데베르는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워드는 늙은 나이에 본 양녀를 팔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거 같던데. 내가 착각한 건가.”

“…….”

“그럴지도. 그저, 제 딸에게 찾아오는 남자들이 신사이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지.”

데베르는 제 건방진 의견을 가볍게 일축하곤 재단사에게 눈을 돌렸다. 재단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커다란 의상실에 데베르와 단둘만 남게 된 베스가 불안스레 재단사가 사라진 곳을 뒤돌아봤지만, 남자는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문가로 향했다.

“갈 곳이 있어.”

“싫어요.”

들어왔을 때처럼 먼저 문을 연 데베르는 문기둥에 기대섰다. 느긋한 모양새였다.

“잘 모르나 본데, 가문의 집사가 상대의 집으로 찾아가는 건 가장 공식적인 데이트 신청이야. 그보다 신사답고 정중한 데이트 신청은 없어.”

‘신사’에 힘을 준 데베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게 웨인의 사교 예절인데…. 미처 그것까진 배울 시간이 부족했나?”

놀리는 뜻이 다분한 말투였다.

“내일 소식지에서 하워드의 양녀가 클리프 공작을 면전에서 퇴짜 놓았단 얘기가 보고 싶어?”

데베르는 재단사가 사라진 방을 한번 가리키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어. 어차피 단골 인사라.”

그리곤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가 아는 베스 제인스라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 말로.

“하지만 넌 아니겠지. 양아버지에게 폐를 끼칠 만큼 대범하진 않잖아.”

싫다는 대답이 무색하게 베스는 남자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런 남자와 말싸움하려 했다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베스는 여전히 의상실 앞에 세워져 있는 차로 걸어갔다. 집사며 운전사는 모두 사라진 채였다.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여는 남자의 뒤로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베스는 그 햇살을 핑계 삼아, 뻔뻔한 공작의 얼굴을 잠시 노려봤다.

“노려봐도 법도가 달라지진 않아.”

그조차도 의미 없는 짓이긴 했지만.

베스는 지나가는 풍경에만 눈을 고정했다. 하지만 클리프 공작가의 차를 알아본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탓에 금세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풍경은 어느새 베스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지만, 남자에게 여기가 어딘지 묻지는 않았다.

몇 대의 마차와 차가 늘어선 건물의 테라스 앞에서 차는 멈췄다. 얼핏 보이는 종업원과 트레이 위에 올려진 잔으로 봐선 찻집 내지는 남자들이 애용하는 바인 듯했다.

종업원은 홀에 들어선 공작을 금방 알아보고는 커다란 테라스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적당히 햇살이 끼쳐 들어오는 테라스 곳곳엔 여러 쌍의 남녀가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다가온 종업원은 데베르의 앞엔 진한 빛깔의 위스키를, 베스의 앞엔 옅은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놓았다.

“술은 좀 늘었어?”

여태 날 선 모습으로 응수하던 데베르는 부드럽게 물으며 위스키잔을 여자에게 밀어주었다. 그리곤 그 앞에 놓인 찻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황으로 물든 베스의 얼굴을 보던 데베르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차를 가리켰다.

베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냉기가 묻어난 위스키잔을 만지작거렸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거라곤 희미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정도뿐이었다.

찻잔의 김이 모두 식고, 위스키의 얼음이 모두 녹을 때쯤에서야 데베르는 입을 열었다.

“말해 봐.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마주 본 남자의 뒤로 석양이 물드는 게 보였다.

“그 정돈 얘기할 수 있는 사이 아니었던가.”

완고한 남자의 표정은 대답을 지나칠 생각이 없다 말하고 있었다.

베스는 물기가 묻어난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들은 그대로예요.”

“내가 뭘 들은 줄 알고.”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하워드 백작님의 사촌 여동생이셨어요. 뒤늦게 저를 찾으셨고, 그날은….”

그날을 말하던 베스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은 제가 데베르의 곁을 도망치듯 떠난 날이었으니까.

“그날은 급하게 편지가 왔어요.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지금 바로 항구로 온다면 함께 배에 오를 수 있다고….”

베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잃어버렸던 어머니와의 재회와 그녀의 죽음을, 그리고 목소리를 다시 내기 위해 외국을 전전하던 시간을 얘기했다.

가만히 그 입술만 보던 데베르는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삼촌과 코펠은.”

그것까진 기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베스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매끄러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콜린스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어릴 적에 보호구역에 잠시 있었어요. 그곳에서 소위 삼촌이라 불리는 사람이 제게 어머니가 있다고 했어요. 절 낳다가 그렇게 됐다고….”

그새 얼음이 모두 녹은 위스키 위로 베스의 얼굴이 불투명하게 비쳤다.

“제가 간호 학교에 갔단 걸 알고, 병든 어머니의 안위를 들먹이며 콜린스 공작님 몰래 가끔 돈을 요구했어요.”

“그게 전부에요.” 속삭이는 듯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빠르게 지는 노을은 어느새 짙은 감색 빛을 띠고 있었다. 기억 속 이 남자의 군복도 이와 비슷했는데. 하지만 저와 비슷한 색을 뒤집어쓴 남자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에 팔을 괸 데베르의 손가락 끝이 그의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코앞의 사냥감을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하는 듯한 시선이 번뜩일 때마다, 새카만 눈동자가 순진하게도 깜빡이는 모습이 비쳐 보였다.

결국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깜찍하기도 하지.

“거짓말을 하네.”

이 거짓말이 통하리라 생각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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