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미쳤어.
베스의 눈이 선혈의 끝자락을 타고 올라갔다. 주춤거리던 시선은 붉게 물든 푸른 꽃잎에서 한 번. 힘줄이 불거질 만큼 거세게 가지를 움켜쥔 남자의 손등에서 한 번.
마지막으로 침잠하는 잿빛 눈동자에서 한 번 멈췄다.
“틀리지 않았잖아.”
베스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유독 붉은 그 입술에 데베르의 시선이 머물렀다.
“말해 봐.”
선득한 눈동자가 베스를 바라봤다. 벗어날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지독한 시선이었다.
“이젠 말할 줄 알잖아.”
남자는 여전히 가시를 움켜쥐고 있었다. 유난히 억센 푸른 꽃나무의 가시는 굳은살 박인 손을 헤집기 충분했다.
그는 보란 듯이 만개한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꺾었다. 허공을 나풀거리던 꽃 잎사귀가 맥없이 바닥에 추락하고, 마침내 모든 꽃이 그 손아귀 아래에서 생을 다할 때까지도 남자는 무자비한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해요.”
베스는 차마 붉은 선혈로 물든 남자의 손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비껴간 시선을 따라 데베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베스는 애써 무던한 목소리를 내며 약제실 선반을 뒤졌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전방 병원과 달리 이곳엔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중 황궁으로도 납품되는 연고 하나와 소독약을 꺼내 들었다.
데베르는 제게 다가오는 베스를 낱낱이 눈에 담았다. 작은 손이 가시 돋친 가지를 잡아당기자, 그는 순순히 손을 펼쳤다.
나긋하게 들려오는 숨결과 제 손에 닿는 미온한 촉감에 데베르는 숨을 참았다.
“넌 상처 받아 빌빌거리는 새끼만 돌아보니까.”
베스는 말없이 헝겊에 소독약을 부었다. 손바닥에 엉겨 붙은 피를 조심스레 닦아내자, 고작 소독약으로는 지워낼 수 없는 이 남자의 흉터들이 드러났다. 못 본 척 그 위에 연고를 덧발랐다.
얌전히 내맡겨져 있던 데베르의 손이 부지런히 연고를 바르는 하얀 손끝을 붙잡았다. 그리곤 어젯밤 황궁 무도회에서 발견한 베스의 상처를 훑었다. 질척한 연고가 손안을 미끈하게 맴도는 느낌에 베스는 손을 오그라뜨렸다.
바닥엔 피에 젖은 꽃잎이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손안에 잡히는데도 왜 나는 네가 미덥지 않을까.”
창가에 걸터앉은 데베르와 그 앞에 선 베스의 눈이 같은 위치에서 맞닿았다.
데베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네 향이 느껴지고.”
그리곤 스스로 상처 낸 손을 들어 베스의 뺨 언저리를 감쌌다.
“이렇게 만져지기도 하는데.”
“…시간이 늦었어요.”
“미친 듯이 답답하게도 굴고.”
마지막 말을 하며 데베르는 건조한 웃음을 뱉었다. 제 환영은 이런 소리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됐어.”
몸을 일으킨 데베르의 기다란 그림자가 베스를 완전히 덮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던 새카만 눈동자가 불안스레 그를 올려다봤다.
미친놈.
데베르는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다. 제 어둠에 물들어 겁먹은 이 얼굴마저도 꽤 사랑스럽다 느낀다면, 자신은 미친 게 분명하지 않은가.
베스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꿎은 연고만 꽉 쥐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남자 앞에선 결국 시린 바람이 불던 전장 겨울의 그 날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 순간, 목덜미에 갑작스런 온기가 끼쳐 들었다.
곧게 뻗은 남자의 손가락이 베스의 목덜미를 지나 빗장뼈 언저리를 맴돌더니, 슬쩍 간호복 아래로 들어갔다. 이방인의 침입에 매끈한 살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데베르는 딱 새끼손톱 하나만큼만 베스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틈엔 베스가 숨겨온 비밀이 걸려들었다.
딱 그의 예상대로.
낡은 줄에 매달린 브로치.
상황을 깨달은 베스가 얼른 뒤로 물러나 브로치를 간호복 아래로 숨겼지만, 이미 허사였다.
“환영은 아니네.”
데베르는 여자의 손에 들린 연고 통을 제 손에 쥐었다.
“내 거잖아, 이젠.”
눈치 없이 살랑이는 봄바람이 또다시 둘 사이를 파고들자, 데베르는 이마로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적어도 제게 있어선.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베스 제인스 양. 갑자기 찾아온 환자인데도 이리 친절하게 봐주시고.”
데베르는 담백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여자는 미련스러울 만치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고집스럽게도 저를 피하는 여자만을 좇았다.
끝나지 않는 시선의 술래잡기였다.
“다음엔 신사의 도리를 챙겨 찾아뵙죠.”
베스 제인스 양. 끝까지 데베르는 베스를 베스 하워드가 아닌, 자신이 기억하는 베스 제인스라고 불렀다.
어떻게 찾아온다는 걸까.
남자는 애매한 의문만 남긴 채,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 * *
“아가씨가 간호 숙소로 떠나시면 저는 어떡해요.”
루카는 시무룩한 얼굴로 짐가방을 챙겨 들었다.
“걸어서도 오갈 수 있는 거리인걸?”
베스는 생긋 웃으며 울상이 된 루카를 다독였다. “그래도요.” 루카는 연신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기어코 간호 숙소로 거처를 옮기는 제 아가씨를 못내 아쉬워했다.
“물론 여기보다야 그곳이 훨씬 좋으실 테지만….”
처음 만났을 땐 깡마르기만 했던 루카도, 일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짧았던 머리도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 있었고, 삐쭉하던 얼굴에도 제법 살이 올랐다.
“그래도 제게는 자주 연락해주세요.”
“영영 떠나는 것처럼 구는구나.”
루카도 베스를 말릴 수는 없었다. 제 역할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워드의 눈이 되어야 하는 자신은 아가씨의 곁에서 멀어질수록 좋은 일이었다.
“낭독도 꼬박꼬박할게.”
베스는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얼마 되지도 않는 짐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때, 길 너머로 커다란 짐마차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백작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베에에에스!”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딕시였다.
마부 곁에 앉아있던 딕시는 튀어 오르듯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베스의 품에 안겼다. 그 반동을 못 이긴 베스의 몸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그걸 신경 쓸 딕시가 아니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딕시는 베스의 어깨를 붙잡곤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이젠 얼굴을 이곳저곳을 열심히 뜯어봤다.
“베스 아가씨 정신없게 무슨 짓이람.”
루카가 그새를 못 참고 투덜거렸다.
“어? 너는 누구야? 이 쥐방울, 아니. 쥐방울이라기엔 키가 좀 크네.”
“루카야. 나와 항상 함께 다니는.”
“너 정말 말도 하고….”
베스가 말을 하다니. 딕시는 감격에 차 중얼거렸다. 불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너 정말 백작가 영애가 된 게 맞구나.”
딕시는 새삼스럽게 몇 번이고 전해 들은 소식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베스의 짐가방을 보곤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도 짐이 이게 전부라고?”
영문을 모르는 베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딕시의 얼굴이 황당함을 넘어서 흥분으로 붉어졌다.
“하워드 백작님 돈도 많으시잖아. 세상에, 넥서스 시골 남작도 너보단 옷이 많겠다! 난 아무리 추려도 짐이 저만큼인데.”
딕시의 손가락이 짐마차 가득한 제 가방을 가리켰다. 베스는 저절로 벌어진 입술을 슬며시 다물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군용차를 빌릴 순 없으니까. 조금 느리더라도 마차로 가는 수밖에.”
딕시는 그 뜻을 한참은 잘못 헤아렸지만 말이다.
간호 숙소로 향하는 내내 딕시는 베스가 사라지고 난 후, 자신이 무얼 했는지에 대한 얘기를 쫑알거렸다.
“우리 모두 널 얼마나 열심히 찾았는지 알아? 하워드 백작님과 외국에 가 있을 줄은 에도 몰랐지만. 나도 계속 넥서스 바깥을 돌았는데, 어쩌면 한 번쯤은 서로 스치지 않았을까?”
베스는 애매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하워드 백작님이 좀 보수적이신가 봐? 아이네스가 결혼할 때까지 우리 셋이서 살 집도 이미 사 놨는데. 그래도 뭐, 간호 숙소라도 되는 게 어디야. 그치?”
딕시는 베스의 대답이 없어도 잘만 대화를 이어갔다. 말하지 못할 때처럼 여전히 말수가 적은 베스였지만, 딕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휴, 이번에 다시 제국 병원으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이번엔 꼭 귀족 영식을 꾀라고 신신당부하더라니까. 나 참, 어디 번듯한 귀족 놈이 있어야 말이지.”
말을 하다 말고 딕시는 갑자기 베스의 눈치를 봤다. 눈에 띄게 쭈뼛거리는 딕시에, 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게일 백작님처럼 멋진 분도 계시지. 그리고.”
주근깨 섞인 광대가 방긋 솟아올랐다.
“데베르 공작님도.”
또 무슨 소리라고.
베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느릿하게 지나가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방 무슨 말을 더할 것처럼 벙긋거리던 딕시의 입술이 이내 다물렸다.
밤은 기니까. 딕시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얼마 만이니? 베스, 아니. 이젠 하워드 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베스라고 불러 주세요.”
“어쩜 목소리도 꾀꼬리 같고. 소식은 들었단다.”
나이가 지긋한 숙소 관리인이 반갑게 베스를 맞이했다. 그러다 뒤따라온 딕시를 보곤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딕시 콜먼 양! 숙소에 주류는 금지인 거 기억하죠?”
“…네.”
“딕시 콜먼 양까지 숙소로 돌아온다는 소리를 듣곤 내가 정말 놀라서-”
“가자, 베스.”
딕시는 얼른 짐가방을 질질 끌면서 숙소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간호 학교 시절과 똑같은 풍경이 그들을 반겼다. 전장의 간호 숙소와 소박한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다른 점은 좁긴 해도 각자의 방이 존재한단 것이었다.
“곧 아이네스도 오기로 했어. 아이네스까지 옆방에 들여놓으면 딱인데.”
딕시는 연신 입을 놀리며 부지런히 옷 가방이며 장신구 가방을 풀어놨다.
전장의 라디오라는 별명에 걸맞게 딕시는 언제고 제 친구를 웃게 했다. 요 며칠 계속 긴장해 있던 베스도 결국엔 말간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때, 관리인의 노크 소리가 둘이 앉아있는 방을 울렸다.
“베스. 밑에 찾아온 분이 계시는데.”
찾아온 분? 딕시를 돌아봤지만, 그녀도 어깨를 으쓱하며 저도 모른다는 뜻을 내비쳤다.
“어디 또 얼빠진 남자 하나가 찾아온 거 아니야? 무도회의 베스를 보고?”
딕시의 능청스러운 말에 베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그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를 찾으신다고요.”
베스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베스 제인스 양.”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년의 신사가 희끗한 머리를 숙였다.
“저는 클리프 공작가의 집사, 올리버입니다.”
클리프.
날카로운 발음이 베스의 혀끝을 맴돌았다.
“공작님께서 무례를 범한 신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무례요?”
뜻 모를 소리에 베스의 눈이 설핏 접히자, 집사는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데뷔탕트 드레스를 망친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공작님께서 직접 베스 제인스 양의 다음 무도회 드레스를 선물하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