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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79화 (79/206)

79화

“불청객이네.”

라프넬은 제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하녀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티끌만 한 손짓에도 하녀들은 잽싸게 공주의 뜻을 알아채고는, 방문을 굳게 닫고 나갔다.

동그란 금발의 뒤통수는 라프넬의 목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침부터 불청객을 만날 줄이야.”

어깨의 숄을 바닥에 던진 라프넬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신랄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기운이 빠진 목소리였다.

티 테이블에 앉아 향을 피우는 데 열중하던 아더가 흘깃 뒤를 돌아봤다. 새하얀 이불보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머리카락이 사늘한 바람에 나풀거렸다.

“폐하 앞에서 불쌍한 체라도 해보려고 그런 차림으로 간 거니?”

아더는 멀건 라프넬의 실내복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의 손에서 피어난 향이 푸르스름한 연기를 내며 테이블 위로 퍼져나갔다.

“향이 좋네.”

평소와 달리 잠잠한 라프넬의 반응에 아더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다. 나부끼는 머리카락에 가린 작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픈 거야?”

그 물음에 라프넬의 입에서 픽, 작은 웃음이 새 나왔다.

“아픈 건 너겠지.”

라프넬은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주 본 아더의 목덜미에 시퍼런 손자국이 선명했다.

“데베르는 미치지 않았어. 아니, 미친 새끼긴 매한가지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았단 뜻이야.”

“말조심해, 라프넬.”

아더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향이 퍼지도록 램프를 비틀었다.

“고아한 공주님께 어울리는 언사는 아니니까.”

“속없는 새끼.”

라프넬은 흐트러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정리하며 아더의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아더는 라프넬이 오든 말든 상관없이 피어오르는 향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애가 돌아왔어.”

아더는 굳게 닫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등장으로.”

라프넬은 저와 닮은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내가 동요하지 않아도 될까?”

봄바람에 실려 온 꽃잎 하나가 나풀거리며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아더는 작은 바람에도 이내 날아가 버릴 여린 꽃잎을 조심스레 손안에 담았다.

“왜, 아더 너도 그 애가 신경 쓰이는 거니?”

자신이었다면 미련 없이 눈앞에서 치워 버렸을 고작 꽃잎 하나를 뭐라도 되는 양 매만지는 아더가 꼴사나웠다.

“그럴 리가.”

이제껏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더가 작게 읊조렸다.

거짓말. 라프넬은 뱉지 않을 한마디를 입안에서 굴리며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찾아온 봄은 작년 종전 직후의 봄보다 더 화려하게 만개하고 있었다.

아더는 제게서 시선을 뗀 라프넬을 흘깃 쳐다보곤 다시 손안의 꽃잎을 느리게 매만졌다. 매끈하던 꽃잎이 그의 손길 몇 번에 귀퉁이가 삐죽 찢어졌다.

“젠장.”

붙잡고 있던 잎사귀 귀퉁이를 놓자, 찢어진 꽃잎은 이내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사라졌다.

아더는 뻐근한 목 언저리를 손으로 감쌌다. 최악의 전투 속에서도 티끌 하나 없어 저를 부끄럽게 하던 몸이 뒤늦게 엉망이었다.

“남의 숨통을 쥐는 데 도가 튼 남자니, 어쩌면 정말…. 머리털 하나라도 발견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라프넬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워드 백작가의 양녀라니….”

말을 뱉던 라프넬의 눈썹이 돌연 찌푸려졌다.

“뭐라도 알고 있는 거야?”

아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맥없이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연기를 보며 아더는 제 모습을 떠올렸다.

데베르만큼이나 저 또한 종전 이후 지난한 한 해를 보냈다. 원래라면 진저리쳤을 황제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외국을 전전할 만큼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넥서스보다 훨씬 낙후된 지역을 돌 때면, 늦어지는 황궁과의 연락을 핑계 삼아 훨씬 오래 그곳에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종전을 만끽하고픈 저만의 순수한 여유였을까.

아더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제발 모른 척해주세요.’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넥서스에서 멀어질수록 베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이 떠올랐다. 그 언젠가 어둠이 몰려오는 막사로 뛰어오는 베스를 발견한 건 저였다. 데베르가 아니라.

하지만 그 새카만 눈동자가 향한 곳은 제가 아니라, 데베르였다. 그의 손바닥 위에 연거푸 무언가를 적어대던 작은 뒷모습을 기억했다.

“쓸데없는 것만 기억하지….”

처음엔 그저 흘러가는 가십에 불과했다. 모든 걸 갖추고도 살아남기 어려운 전장에 말 못 하는 간호사가 있다고 하니까.

그다음은 호기심이었다. 요동이라곤 없을 것 같던 데베르에게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게 제게도 느껴졌으니.

아더는 작게 입바람을 불어 향을 꺼뜨렸다.

“바람이 부는 건 나였나.”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베스의 마지막 모습을, 도망치듯 떠나는 그 뒷모습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일 년 내도록 이방인의 신세로 타국을 전전하면서도 그 질문에 대한 답만큼은 할 수 없다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진 않았다. 그러나 작은 가정을 떠올리는 순간은 있었다.

만약, 그 숲길에서 데베르가 아닌 나를 먼저 만났더라면.

어느 이름 모를 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이가 데베르 클리프가 아닌, 아더 메이너라면.

하지만 이번에도 그 여자를 먼저 발견한 건 데베르였다. 멀찍이서 둘을 지켜보다, 데베르가 여자의 손에 입 맞출 때 뻣뻣하게 돌아서던 제 모습이 기억에 선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아더는 웃음을 터뜨렸다. 빼곡한 상념 새로 끼어든 라프넬의 말이 꼭 제 속마음 같았으니까.

라프넬은 처음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보단 한결 가벼운 얼굴로 일어섰다. 사뿐히 화장대 앞으로 가 앉은 라프넬은 바람에 이리저리 얽힌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향이 좋더라. 내 방에도 갖다 둬.”

방을 나서려던 아더는 이미 꺼진 푸른 향을 툭 건드렸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엔, 넥서스의 그 어떤 여인도 홀릴 것만 같은 근사한 미소가 걸쳐졌다.

“얼마든지.”

아더는 그 언제고 미소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 * *

“베스!”

“오, 신이시여!”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친 몰리 부인과 아이네스가 탄식을 내질렀다. 어리둥절한 환자 몇이 돌아본 곳엔, 낯선 간호사 한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니?!”

몰리 부인의 비명 같은 외침에 아이네스가 얼른 부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뛰어오던 콜린스 공작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멈추어 섰다.

“얘야.”

어젯밤, 황궁 무도회에 등장한 베스를 보곤 몰리 공작 내외는 밤이 새도록 베스에 관해 얘기했다. 하워드 백작의 말조차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그 애가 하워드의 양녀가 된 건지, 그간 모습 한 번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그 애가 맞긴 한 건지. 수많은 물음에 답해 줄 수 있는 이는 결국 베스란 걸 알면서도 쏟아지는 질문을 지우지 못했다.

“넌 정말…!”

“우선 병원장실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네스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병원장실의 테이블에 넷이 둘러앉을 때까지도, 다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베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앗, 너 이제 말을….”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펜과 종이를 내밀던 아이네스의 손이 멈칫했다. 소문엔 그 누구보다 빠른 딕시 덕에, 무도회에 참석지 못한 아이네스도 동이 트자마자 서신을 받은 터였다.

“하워드 백작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흘러나온 목소리에 테이블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듣는 베스의 목소리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목소리는…. 그간 외국을 돌면서 여러 의사를 찾았어요. 정말 멀리 간 적도 있고요.”

베스는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찬찬히 처음부터-”

성급하게 되묻는 몰리 부인의 손을 콜린스가 감싸 쥐었다. 무엇이 되었건 돌아왔으면 됐다. 조급한 질문이 또다시 아이를 궁지로 내몰까 봐 콜린스는 짐짓 태연한 체를 했다.

“그래, 이젠 정말 돌아온 거지?”

장난스레 눈을 부라려도, 황금빛 눈동자의 따뜻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오면 아주 호되게 혼내려다가 말하는 게 기특해서 봐주는 거다, 이 녀석아.”

“저…. 여전히 이곳의 간호사죠?”

희미한 미소로 답하던 베스는 아까부터 묻고 싶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잔뜩 쥐어뜯긴 치맛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또다시 찾아온 침묵에 베스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잔뜩 막힌 목구멍 새로 억눌린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많이 공부했어요. 항상 연습했어요. 잊은 건…. 정말 하나도 없어요.”

한참의 침묵을 깨고 콜린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좀 보소! 너만 한 간호사를 병원장인 내가 놓칠 줄 알고? 당장 오늘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그렇게 알아두렴. 자자, 이제 다들 일어나자고! 베스도 돌아왔고, 우린 여전히 할 일이 산더미니까.”

연신 무언가 더 묻고 싶어 입을 벙긋거리는 몰리 부인을 피해 콜린스가 눈을 찡긋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틈을 타 아이네스도 살며시 베스의 손을 잡아 왔다.

베스는 그제야 예전처럼 웃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으니까.

“베스, 정말 괜찮겠어? 내가 같이 있어 줄까?”

베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이네스를 문가로 밀어냈다.

일 년 만이었지만 낯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베스는 늘 그 자리에 있던 이처럼 능숙하게 일해 나갔다.

“우리 나눌 얘기가 많은 거 알지? 절대 피할 생각하지 마.”

제법 눈을 홉뜬 아이네스는 그렇겠노라는 베스의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병원을 나섰다.

베스는 인적이 드문 복도를 바쁘게 오갔다.

새벽이 깊어지자 하나둘씩 병원의 전등이 꺼지기 시작했다. 으레 전력이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둑한 약제실에서 등불에 의지해 부지런히 차트를 기록해나가던 베스는,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밖으로 은방울처럼 매달린 푸른 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

얼마 만에 느끼는 안도감일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봄밤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있는데, 순간 꽃나무의 풀 향과는 다른 향이 바람에 실려 왔다.

고요하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복도 너머로 나직한 발걸음이 들려온 게 언제부터였더라.

서늘한 향에 느슨해져 있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어쩌려고 넋이 나가 있어.”

이 향의 주인을 모를 수 없었으니까.

“나 같은 새끼 만나면 어쩌려고.”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은 베스를 지나쳐 창가로 향했다. 베스는 굳은 듯이 달빛을 등진 채 창턱에 걸터앉는 남자의 그림자만 바라봤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말문이 트이더니 눈은 먼 건가.”

아, 비식 웃던 남자의 그림자가 창가까지 뻗은 꽃가지를 향했다. 베스는 느릿하게 이어지는 그림자를 숨을 죽인 채 바라봤다.

그곳엔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센 가시가 가득한데.

“내가 잊고 있었네.”

남자의 손이 우악스럽게 가시 돋친 가지를 잡아 뜯었다.

“넌 이래야 날 봐주지.”

뚝. 뚝. 여린 꽃잎을 물들인 선혈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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