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환청인가.
이젠 확신보다 의심이 더 익숙해져야만 했다.
데베르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천천히 비틀었다. 어지러운 그의 머릿속으로 들려온 이름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주려는 듯, 문을 지키는 시종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영애의 이름을 재차 외쳤다.
“베스 하워드 양이 오늘의 마지막 데뷔탕트 영애이십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데베르는 활짝 열린 황금빛 문 사이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검은 머리통을 바라봤다.
“아니.”
옆에 선 아더도 말문이 막힌 듯 예상 밖 인영의 등장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얼굴 위로 정리되지 못한 물음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데베르.”
아더는 얼른 제 옆에 선 데베르를 돌아봤다. 난간을 쥔 데베르의 손등에 솟아난 힘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베스의 등장에 놀란 건 아더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장 구석에서 다른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던 몰리 부인 또한 망연한 얼굴로 가까워지는 베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콜린스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 저 애가 그 양녀인가 봐요.”
“피가 섞이긴 한 거예요?”
“그렇게 꽁꽁 감추더니. 뭐 대단한 애라고 마지막에 등장시키는지.”
적당한 질투와 호기심이 담긴 물음들이 여인들 사이를 술렁이게 했다.
애초에 전장 병원의 베스 제인스를 아는 귀족은 그곳에 다섯 명을 제외하곤 없었다. 데베르, 아더, 몰리 공작 내외, 마지막으로 라프넬까지.
라프넬은 거짓 미소를 띨 생각조차 잊은 채로, 제 기억 속에 새겨지듯 박혀있던 촌스럽고 답답한 간호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베스…?”
하지만 어떻게 하워드 백작과.
그때, 티 타임에서 흘려들은 귀부인들의 가십 얘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그 양녀가….”
베스는 자신을 향한 주목을 의식한 듯 새카만 속눈썹을 내리뜬 채, 연회장의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밤중의 버진로드.
넥서스는 데뷔탕트가 이뤄지는 사교 시즌의 공식적인 무도회를 그렇게 불렀다. 성공적인 혼사를 위한 무도회이니만큼 그보다 잘 어울리는 별명 또한 없었다.
그리고 그 버진로드를 걸어오는 하얀 드레스의 베스는 그 누구보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여인이었다. 뭇 사내들의 탄성 내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지만, 베스는 죽은 듯 까마득한 시선을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웨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늦는 결례를 범했네요.”
하워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아시는 분도 계실 것 같지만, 이제 저희 딸이 된 베스 하워드입니다. 자식 없이 살다 늦은 나이에 본 큰 딸이다 보니 걱정이 많습니다. 부디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워드는 베스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손길과 인자한 미소가 친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자면, 베스는 제 사촌 여동생의 딸입니다.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선 연락이 끊겼는데, 하필 전쟁이 나는 바람에….”
하워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말을 멈췄다.
“쓸데없는 사족이 길었네요. 베스의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베스?”
하워드의 부름에 베스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간단히 무릎을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잠시 멈춰졌던 선율이 다시금 연회장을 흘렀다.
“내가 가볼까?”
“아서라. 네 놈이 무슨.”
“뭐, 어때. 혼자 있잖아.”
사내놈들 몇이 구석으로 걸어가는 베스의 뒤를 따랐다. 데베르는 제 발치로 점점 다가오는 까만 머리통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한순간에 맑아지기 시작한 머리는 이젠 쨍할 정도로 선명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내놈 중 하나가 베스의 주위를 얼쩡거리다 어물쩍 말을 걸었다.
“파트너가 없으십니까.”
베스는 무감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 없이 제 드레스 자락만 바라봤다. 이에 사내놈이 샐쭉이 웃으며 제 친구들에게 눈짓했다. 베스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영애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베르는 협탁 위에 놓인 잔에 와인을 가득 부었다.
“뭐 하는 거야.”
아더가 낮게 일렀지만, 데베르는 말없이 와인잔을 손가락에 걸쳤다. 곧 넘칠 듯한 와인이 위태롭게 찰랑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베스에게 정신이 팔린 사내놈들은 그들의 머리맡 이 층에 누가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양팔을 난간에 걸친 데베르의 손가락 사이에서 와인잔이 곧 떨어질 듯 말 듯 까딱거렸다.
실실대던 놈이 제 손을 내밀 때였다.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 억! 제길! 이게 뭐야!”
이 층 발코니에서 추락한 와인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베스와 사내놈 사이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깨진 엷은 유리잔 파편이 어지럽게 바닥으로 흩어졌다.
사위에 정적이 찾아왔다.
순백의 드레스를 타고 오르는 붉은 와인 자국에 누군가 힉, 숨을 들이켜는 게 들렸다.
고개를 든 베스와 이 층 난간에 기대선 데베르의 눈이 마주쳤다. 얼마간 그 얼굴을 바라보던 데베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아직 미친 건 아니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사내놈은 사건의 원흉이 데베르 공작임을 알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잔뜩 씨근덕거리고 싶은 입술이 들썩거렸지만, 감히 데베르 공작의 눈 밖에 날 수는 없었으니까.
데베르는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사람들이 길을 텄다.
어쩌면 이번 사교 시즌 최고의 가십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득 찬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데베르는 오직 베스만을 바라보며 붉은 잔흔으로 엉망이 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가 봐.”
길가의 개새끼를 쫓듯 데베르는 와인으로 척척한 바지를 털어대는 사내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 드넓은 연회장에서 어디로 사라지란 건지도 불분명했지만, 공작 앞에서 자존심 따위 내세울 수는 없었기에 사내는 비칠거리며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데베르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역한 향수 내음들 사이로, 황궁 후원에서 맡은 이 여자의 향이 다시금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비 맞은 개새끼처럼 널 찾아다녔는데.”
베스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시선을 맞춰보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던 데베르는 베스가 구두를 신은 탓에 전방에서보다 키가 더 커진 것을 발견했다.
“많은 게 달라졌네.”
제 발끝만 쳐다보던 베스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데베르는 내밀던 손을 멈칫했다.
영원히 들려올 리 없으리라 생각한 이 여자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왔으니까.
“공작님.”
끝이 떨리는 부름이었다.
“저를 지나치세요.”
나직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 언젠가 낡아빠진 약품 창고에서 이 여자의 글씨를 보며, 그 목소리도 이와 닮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잠시간 굳어있던 데베르의 입가가 픽 올라갔다.
“못 본 새 말도 트였군.”
습관처럼 베스에게 제 손바닥을 내밀려던 데베르는 뜻을 바꿨다. 또다시 도망치게 둘 바엔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 단단히 옭아매는 게 나았다.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죠.”
넥서스에서 첫 번째 에스코트와 춤 신청을 거절하는 전례는 없었다. 행여 다섯째 부인을 찾는 팔십 먹은 노인이 와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절은 상대 가문에 대한 모욕이었고, 저보다 높은 귀족에게 모욕을 선사할 만큼 어리석은 이도 존재치 않았다.
아마 아까 전의 아둔한 사내놈도 그 전례를 힘입어 접근하였을 것이다.
모두가 숨죽인 채 데베르의 손끝을 바라봤다.
“베스 하워드 양이 설마 전례 없는 무례를 행하진 않으시겠죠. 그것도 데뷔탕트부터.”
데베르는 나른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얼른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끝의 흉터가 베스의 시선을 붙잡았다. 꼭 알고 그러는 것처럼.
“베스.”
하워드 백작이 뒤편에서 조용히 베스를 불렀다.
결국 마지못한 손이 데베르의 위로 겹쳤다.
“이런 영광이.”
데베르는 베스의 손을 잡아 연회장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미약한 주춤거림이 느껴졌지만, 데베르의 힘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완벽한 한 쌍이 연회장의 정중앙에 서자, 오케스트라는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채우는 음악 소리에 데베르는 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춤에 능해 보이진 않았는데.”
이끄는 건 데베르였지만, 베스도 꽤 능숙하게 보조를 맞췄다. 베스는 지독하게 입을 다문 채 제 앞의 가슴팍만 바라봤다.
“날 봐.”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에 베스의 어깨가 움칠했다.
“날 보라고.”
명령을 하는 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한 미소를 짓는 데베르를 무리가 힐긋거렸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밀어를 나누는 무도회의 연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잡힌 손을 빼내려 비트는 여린 손목을 데베르는 단단히 움켜쥐었다.
선율에 맞춰 정갈하게 발을 움직이던 데베르가 멈추어 섰다. 모두가 움직일 때, 유일하게 시간이 멈춰선 공작을 향한 시선이 더 많아졌다.
새카만 눈동자는 여전히 데베르의 옷깃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시체처럼 굴더니.”
동요하는 베스의 얼굴을 보던 데베르의 입꼬리가 뱀의 꼬리처럼 휘어졌다.
데베르는 움켜쥔 손목에 씌워진 장갑 끝을 꼬집었다. 얇은 레이스 천이 손바닥을 미끄러지는 촉감에 베스가 얼른 손가락을 굽혔지만, 데베르가 조금 더 빨랐다.
“역시.”
말갛게 드러난 손바닥 가운데에, 날카로운 것에 찢어진 자국이 선명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였다.
“너였군.”
데베르는 자신의 오만을 상기했다.
이 여자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시커먼 머리색 따위 붉은색으로도 금발로도 변할 수 있고, 보호구역에도 정신 병원에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입만큼은 다물려 있을 것이라고.
얼마나 아둔한 오만이었나.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넌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났지.
“날 보라고 했잖아.”
데베르는 보란 듯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대장의 무릎은 넥서스의 황제를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낮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주군을 향해 군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
그 의미를 아는 이들이 경악에 찬 얼굴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공작을 지켜봤다.
온전히 모든 걸 낮추고 나서야, 이 여자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게 보였다.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고. 이젠 저 목소리마저 잊을 수 없겠지.
“우리 사이엔 철회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잖아?”
데베르의 입술이 상처 난 베스의 손바닥에 느릿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예를 들면 내 청혼이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