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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74화 (74/206)

74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데베르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는 가주의 뒤로 집사 올리버가 얼른 따라붙었다.

수많은 사용인이 숙소로 돌아간 클리프 저택의 밤은 적막하기만 했다.

“오늘 저녁에 ‘그것’이 도착했습니다.”

“그렇군요.”

집사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클리프의 젊은 가주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조금씩 비틀려가고 있었다. 비워지는 술병의 개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금기되다시피 잠겨있던 약 서랍도 어느 날부턴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어떤 손님도 받지 않는 클리프 저택을 이름 모를 밀매꾼들이 드나든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집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데베르의 가십을 궁금해하는 호사가들에겐 입을 다물고, 그의 주인을 대신해 밀매꾼들을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공작님. ‘그분’을 찾는 자들이 지금은 코바흐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디 걱정은 접어두시고, 콜린스 공작님께 몸의 증상을-”

“그저 수면제입니다.”

데베르의 일언에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전장에서 포화 속에 잠드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오히려 고요할 때 잠들지 못해서요.”

데베르는 나이 든 집사 올리버에게만큼은 유하게 굴었다. 답지 않은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넥서스의 병원을 전전하기엔 낯부끄러워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뿐입니다.”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뱉을 만큼 거짓말에 이골이 났지만, 바짝 마른 얼굴은 숨길 수 없이 거칠했다.

“무도회 참석 명단을 올리세요.”

“지난번 가면무도회 말씀이십니까?”

뒤돌아선 데베르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나이 든 집사가 뒤처지는 건 당연했다. 어느새 계단참에 올라선 데베르를 향해 집사가 급히 외쳤다.

“아시다시피 가면무도회는 공식적인 명단이 존재치 않습니다.”

데베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사교 시즌을 여는 공식적인 무도회는 귀족가 영애들의 데뷔탕트가 이뤄질 때였지만, 비공식적인 시작은 가면무도회였다. 가면으로 가린 채 서로를 마음껏 탐색하라는 다소 노골적인 의도가 깃든 무도회였다.

“한 명도 빠짐없이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사견은 듣지 않겠다고 부드럽게 일침하는 가주의 말에, 집사는 희끗한 머리를 숙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집사의 구두 소리가 희미해질 때에서야, 데베르는 휘청이는 몸을 난간에 위태롭게 기댔다. 집사 앞에서 애써 차분하게 고르던 숨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윽….”

데베르는 비틀거리며 사 층의 제 침실로 걸어갔다. 황량한 복도에 길게 그림자 진 그의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였다.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던 침실의 눅눅한 공기가 데베르를 내리눌렀다. 덜덜 떨리는 손은 몇 번 헛돌고 나서야, 문의 잠금쇠를 밀어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데베르의 머리통이 바닥에 처박혔다.

“읏.”

뒤집히는 속과 울렁이는 머리 탓에, 부딪힌 몸뚱이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데베르는 기듯이 협탁 앞으로 다가가 집사가 말한 ‘그것’을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밋밋한 약통이 자꾸만 손안에서 미끄러졌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 모습은 오직 데베르 자신만이 봐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마개가 열린 위스키병이 데베르의 어깨에 치여 협탁 위로 쓰러졌다. 데베르는 그걸 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 몸을 기울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알코올을 입에 담았다.

“빌어먹을…!”

더 센 것을 가져오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기어코 별스러운 것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작은 알약을 삼키자마자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데베르는 점점 나른해지는 몸을 소파 다리에 기댄 채, 곧 나타날 인영 하나를 기다렸다.

“베스….”

사랑스러운 허상이었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취할 수밖에 없는.

거친 손길에 뜯겨나간 단추 몇 개와 함께 새하얀 목걸이가 드러났다.

“네 거잖아.”

인영은 말이 없었다.

황궁 후원에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 향을 맡은 순간부터 데베르는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베스를 찾고 싶어 하는 건지, 그 향을 갈구하는 건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데베르는 목마른 짐승처럼 그녀의 자취를 더듬었다. 비록, 그게 만질 수 없는 환영일 뿐일지라도.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한 번은 그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왜 베스 제인스가 아니면 안 될까, 왜 그리도 그 여자를 욕망할까, 하는.

“짐승은 태어나 처음으로 본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는다고 들었어.”

어떻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걸 믿는다는 건지. 눈앞의 거짓은 베스가 아닌 줄 알면서도, 데베르는 고백을 이어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데베르의 손에 쥐어진 약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갔다.

“하지만, 난 이제 믿어.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본 건 너니까.”

베스는 유일한 빛이었다.

때론 그 낡아빠진 간호 숙소의 낮은 이층조차 닿지 못할 곳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환한 여자였다.

‘더 좋은 거요.’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세요.’

그의 삶에 건방지게도 더 좋은 것을 주겠다며 다가온 그 여자를, 나쁜 기억을 온통 제 기억으로 덮어버리고 도망친 그 여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넌 그 책임을 져야 해.”

어리고 아파하는 짐승을 쓰다듬고 사라진 나의 사랑스런 구원자를.

“나를 견뎌.”

네 바람대로 나쁜 기억은 모두 잊은 채, 네 기억으로만 채워 넣었으니까.

* * *

“공작님께서 오늘 밤 가면무도회에 참석하신다는 것은 소식통을 통해 전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교계에 파다하게 소식이 퍼졌을 겁니다.”

데베르는 집사의 얘기를 들으며 연미복을 입은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봤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제가 보기에도 전장에서 흙바닥을 뒹굴 때와 비슷했으니까.

말끔하게 뒤로 넘긴 앞머리 탓에 훤히 드러난 얼굴은 여문 청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먼저 차를 대기시키세요.”

집사를 먼저 방에서 보낸 데베르는 침대 옆에 걸린 제 군복 앞으로 다가갔다.

무감한 얼굴로 여전히 비어있는 군복 가슴팍을 응시했다.

“안녕.”

데베르는 입안에 작은 약 하나를 집어넣었다. 씁쓸하게 혀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을 온전히 느끼고 나서야 그는 침실을 나섰다.

“바로 황궁 무도회장으로 가.”

“네, 공작님.”

잽싸게 운전사가 차의 뒷문을 열었다.

데베르는 차에 타려다 말고, 봄기운이 완연한 그의 정원을 한 번 둘러봤다. 작년, 정원을 꾸미라는 그의 명령을 집사는 충직하게도 지켜나가는 중이었다.

너도 곧 이걸 보겠지.

데베르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차에 올랐다.

어둑한 연회장 입구를 밝히는 건, 호세가들이 타고 온 금빛 마차와 젊은 귀족들을 태운 자동차가 내뿜는 헤드 라이터뿐이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것은 저들뿐이라 말하려는 듯, 화려한 치장을 한 채 들어서는 치들을 데베르는 가만히 응시했다.

가면에 숨은 채 마음껏 서로를 훔쳐보라는 가면무도회의 속뜻처럼 연회장은 밤하늘보다 새카맣게 꾸며졌다. 색색의 작은 전구를 휘감은 꽃들이 드높은 천장을 별처럼 수놓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복도 곳곳엔 도금된 램프가 걸렸다.

데베르는 모인 이 중, 가장 수수한 검은 가면을 쓴 채 연회장으로 입성했다. 검은 나비 모양의 가면은 그의 눈과 콧대 근처를 가리긴 했지만, 선이 뚜렷한 턱까지 가려주진 못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 저기 데베르 공작이에요.”

“세상에, 저번에 그 난리를 피우더니 이번엔 제대로 된 모습으로 왔는걸요?”

“정말 이번 사교 철에 결혼할 건가 봐요.”

얼굴 전체를 가린들 그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작은 소란은 알지 못한다는 듯 데베르는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트이는 길을 따라 공작의 걸음이 향했다.

“데베르.”

연회장 중간에서 샴페인을 들이켜던 아더가 놀란 얼굴로 데베르를 반겼다.

“못 볼 거라도 봤나 보지.”

데베르는 가벼운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시종이 들고 있는 트레이에서 샴페인 잔 하나를 들었다.

“네가 올 줄은.”

아더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교 시즌에도 데베르를 보지 못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내 의무를 다해야지.”

“무슨 의무.”

“이를테면 후사를 잇고, 가문을 지키는?”

영 데베르답지 않은 말에 아더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헛소리야.”

“너도 비슷한 의무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잖아. 아닌가? 아더 메이너는 그저 유흥을 즐기는 사내여서 이 자리에 있는 건가?”

가면 아래로 드러난 데베르의 입꼬리가 얄궂게 휘어졌다.

“젠장. 맘대로 놀려 먹어라.”

아더가 제 머리를 흐트러트리자, 엷게 이국적인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데베르는 역한 기운에 몸을 반대로 돌렸다.

나란히 서 있는 아더 황자와 데베르 공작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섣불리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무도회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다들 짝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기에, 사업 얘기를 핑계 대며 친한 척을 하던 귀족 놈들도 다들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이었다.

“데베르, 또 이상한 데로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난 한번 나갔다 와야겠으니까.”

아더는 황자로서의 체면치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몇 번 이름 모를 영애들과 가볍게 춤을 추고 돌아왔지만, 데베르는 그저 굳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술잔만 축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올 수 있는 여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춤출 파트너가 없으신가요.”

다가온 라프넬은 제 머리색과 닮은 금빛 사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아래에 드러난 붉은 입술이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반짝였다.

“아니면 찾는 이가 있으신가요.”

“공주께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핑계로 라프넬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한 데베르는 다시 수많은 인파가 섞여든 무도회장을 바라봤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 라프넬의 푸른 눈동자도 옮겨 갔다.

“참 지루하죠.”

아무 말 없는 데베르를 바라보던 라프넬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당신도 거짓말은 못 하시는군요.”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선율에 묻혀, 그들의 대화는 멀리서 힐끔거리는 구경꾼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라프넬은 그 시선을 느끼며 다시 입을 뗐다.

“폐하께서 초대장을 직접 보내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제가 그러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도…. 냉철한 분이시긴 하지만, 유일한 여동생인 제가 겉도는 게 신경 쓰이셨나 봐요.”

한창 입바른 소리를 지껄이던 라프넬의 입술이 다물렸다.

“데베르…?”

데베르의 눈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이제껏 허공을 맴돌던 시선이 아닌,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오직 한 곳에만 초점이 맞춰진 시선이었다.

데베르는 손에 들린 잔을 살며시 내려놨다.

“데베르.”

아까 전보다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데베르는 귀라도 막힌 것처럼 비식거렸다.

데베르의 눈동자에 이전과 다른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찾았다.”

지독하게도 저를 환영으로 이끈 보랏빛 나비가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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