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73화 (73/206)

73화

“누구신, 엇.”

문밖의 인영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 나오던 집사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간혹 병원 가기를 꺼리는 나이 든 귀족들이 해가 지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공작님이십니까?”

집사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다시 한번 철창문 너머의 인영을 확인했다. 정갈한 슈트 차림의 데베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몰리 저택의 정문이 열리자, 데베르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용인들이 얼른 고개를 숙여 손님에 대한 예를 표했다.

“부인을 뵈러 왔는데. 안에 계시는가.”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망설임 없는 발걸음은 부인이 없으면 올 때까지라도 기다릴 기세였다.

집사는 얼른 데베르를 뒤따르며 응접실로 향하는 길을 알렸다.

“때마침 오늘 귀부인들의 모임에 다녀오셨습니다. 아직 주무시지 않을 테니 여쭤보겠습니다.”

데베르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아는 시종들이 그를 힐긋거리며 저들끼리 수군거렸지만, 데베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처럼 응접실 밖의 풍경만을 응시했다.

참으로 이곳도 변한 게 없는 곳이었다. 어릴 적 기억 그대로였으니까.

소박한 몰리 공작 내외의 성품을 닮아서인지, 커다란 저택의 정원도 화려하기보단 수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에 피는 꽃 몇 송이만이 유일한 장식이었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공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몰리 부인을 기다리는 사이, 앞에 찻잔이 놓여도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입 안이 써서 뭐라도 집어넣었다간 토악질을 할 것만 같았으니까.

약 탓인가.

데베르는 밀려오는 피로감을 애써 눌러 내리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판판한 셔츠 밑의 열쇠가 여린 살을 갉작이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데베르!”

응접실로 들어오자마자 몰리 부인은 탄식을 뱉었다.

“대체 얼마 만인 거니?!”

“부인께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데베르는 말끔한 얼굴로 일어서 부인이 앉을 의자를 빼냈다. 부인은 그의 에스코트를 따라 티 테이블에 앉으면서도 데베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모습보다 조금 더 야윈 것 같긴 했지만, 그는 소식지의 소문이 진짜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갈한 공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간 약은, 아니. 몸은 좀 어떤가요, 데베르 공작.”

부인은 애써 밀려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며 젊은 공작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데베르는 식어 빠진 찻잔을 살짝 기울이며 예사롭게 답했다.

“전 늘 같습니다.”

부인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겨우 얼굴이라도 본 데베르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묻고 싶은 대로 묻기엔, 눈앞의 공작은 자신을 숨기는 데에 너무 능했으니까.

차라리 콜린스라도 함께 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진즉 병원에서 돌아와야 했을 이가 오늘따라 늦는 게 애석할 뿐이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온 건지.”

“물을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물을 거?”

몰리 부인을 마주 본 데베르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쳐졌다. 칼처럼 굴던 전장에서의 기억이 마지막이던 부인은 예상치 못한 데베르의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데베르 공작이 늙은 제게 물을 거라니. 긴장-”

“베스 제인스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씀해 주시죠.”

애써 웃음으로 상황을 풀어보려 하던 부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제야 겨우 잠잠해진 그 이름을 다시 들쑤시다니.

“베스…. 말이니?”

“네. 부인이 아시는 그 베스 제인스요.”

데베르는 차가운 찻잔 입구를 매만졌다. 군데군데 전장의 흉터가 새겨진 손가락이 새하얀 잔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꼭 작은 새를 쓰다듬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갑자기 베스라니. 조금 당황스럽구나.”

“몰리 공작 내외께서도 베스를 찾느라 애쓰신 걸 알고 있습니다.”

맞다. 작년 봄부터 베스의 묘연한 행방을 찾기 위해 얼마나 바빴던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작 내외는 베스가 사라진 것 또한 그 아이의 선택일 수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보호구역 뒷골목에서 짐마차로 뛰어 올라왔듯이, 전쟁이 끝나고 나선 제 나름의 삶을 위해 또다시 어딘가로 간 것이라고. 어쩌면 얌전한 그 아이는 꽤 모험가의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웃어넘기며 아이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만이 그들의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작년 건국기념일 이후론 더 이상 베스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인 보이지 않잖니. 어쩌면 이곳이 아닌 다른-”

“제가 봤습니다.”

“뭐?”

데베르의 눈동자가 시커먼 정원 어딘가로 옮겨갔다. 그곳에 꼭 베스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한곳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베스 제인스를 봤습니다. 제가.”

부인은 할 말을 잊은 채, 응접실 문가에 서 있는 제 남편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오려다 멈춘 콜린스의 표정 또한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허공에서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콜린스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요한 티를 내지 말란 뜻이었다.

“그러니? 혹시 어디에서 봤니? 우리도 볼 수 있을까?”

“황궁 후원입니다.”

데베르는 속삭이듯 답했다.

몰리 부인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손에 들린 찻잔을 테이블에 올렸다. 황궁 후원이라면 얼마 전 소식지가 말한, 공작이 무언가에 잔뜩 취해 엉망으로 쓰러져 있던 곳이었다.

‘이름 모를 것’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게 단순한 술 얘기가 아님은 넥서스의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다.

“하하.”

저처럼 비워지지 않은 부인의 찻잔을 본 데베르가 가볍게 웃었다. 적막한 응접실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부인께선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차마 부인 앞에서 셔츠 단추를 풀 수는 없었기에, 데베르는 그저 갑갑한 단추 끝을 한번 건드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부인이 자신을 그저 단순한 광증 정도로 볼 것이란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고, 군대장이 된 이후 내내 그의 약 처방을 전담했으니까.

복도 바닥을 울리며 가까워지다 어느 순간 멈춘 걸음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겠지.

“콜린스 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미쳤다니! 넌 노상 미친놈 아니었니?”

콜린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귀 하나는 귀신같이 밝은 놈 같으니라고! 그래, 베스를 봤다고? 잘됐구나. 내 이번에 그놈을 만나면 호되게 혼쭐을 내야겠어. 키워놨더니 편지 한 장 없이 내빼고 말이야.”

콜린스는 이미 식은 찻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베스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하라고? 잠깐 기다려봐라. 나이가 들면 기억을 더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다. 여보, 당신은 내 서재에서 책 좀 찾아줘요.”

“네? 엇, 네. 그래요. 잠시만요.”

부인은 얼른 일어나 복도로 사라졌다.

몰리 부부 사이에서 ‘서재’와 ‘책’은 일종의 은어였다. 자칭 고매한 귀족 나리 중에선 병원에 오는 걸 꺼리는 이도 많았고, 약 먹는 걸 수치스러워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은밀히 부부를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공작 내외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 몇몇 약품들을 제 저택 서재 안에 보관하곤 했는데, 그게 오늘 빛을 발할 때였다.

그 상대가 데베르라는 게 속이 쓰리긴 했지만.

부인이 사라지고 나자, 콜린스는 한결 편하게 데베르를 마주 봤다.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도 베스에 대해 많은 걸 알진 못한단다.”

“괜찮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세요.”

데베르의 목소리에 초조함은 없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연하기만 했다.

“번트 보호구역에 의료 봉사를 갔을 때 처음 만났지. 거기서 도둑고양이마냥 항상 훔쳐보고 있더라고. 쪼끄만 게 제가 무슨 의사라도 되는 양 꼼꼼히 쳐다보더라니까.”

콜린스는 허허 웃으며 그때의 기억에 잠겼다.

“도망쳐서 짐마차에 뛰어오를 정도면 그 출생이 알만하다 생각했어.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고, 그런데.”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졌다.

“언젠가 한 번 그 아이 앞으로 생전 없던 편지가 하나 도착했는데, 그것도 간호 기숙사를 통해서. 난리였지. 발작을 하고, 쓰러지고.”

“발신인이 삼촌인가요.”

“그래, 삼촌.”

콜린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데베르가 그것도 알 줄은 몰랐기에, 감추지 못한 감정이 튀어나온 거였다.

“아무래도 베스를 처음 본 곳이 보호구역과 이어지는 뒷골목이다 보니, 다이애나와 나는 혹시 포주 같은 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본인이 아니라 하더라고. 몰래 돈이라도 부치는 걸 보면 참견이라도 할 텐데, 편지만 어쩌다 주고받는 게 전부이니 믿는 수밖에. 그 편지조차도 몇 년에 한 번꼴로 왔으니, 원.”

“그저 애먹이는 가족 정도로 치부했지.” 콜린스는 뒷말을 흘렸다.

“우리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작년 봄에 번트 보호구역부터 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네가 조금 더 빨랐어. 그 뒤는….”

이미 소식지가 전한대로였다.

여자를 찾으러 영지의 보호구역까지 뒤진 데베르 클리프는 허탕을 쳤고, 넥서스의 그 어떤 보호구역에서도 베스라는 여자는 찾지 못했다는.

“그렇군요.”

데베르는 예의 사교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원찮은 대답에 데베르가 불만스러워하리라 생각한 콜린스는 되레 당황스럽기만 했다.

미끈하게 재단된 슈트를 차려입은 눈앞의 데베르는 그저 완벽한 공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박한 소문과 멀끔한 겉모습이 만들어내는 괴리감에 콜린스는 침음을 삼켰다.

저 번번한 모습의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과거 따위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찾아뵌 거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데베르는 흐트러진 슈트 단추를 채우곤,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작별 인사를 했다.

“부인께선 아직 제 약을 챙기시나 보군요.”

“아니, 그건.”

콜린스는 얼른 변명을 덧붙이려 했다. 지난 일 년간, 기를 쓰다시피 부인의 처방을 피하던 데베르였기에 행여 줄행랑이라도 칠세라 선수를 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데베르는 콜린스의 예상을 빗나갔다.

“제 거처로 보내주십시오.”

데베르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조금은 망연한 표정의 콜린스를 바라보며, 뾰족하게 다듬어진 제 송곳니를 혀로 슬쩍 눌러 내렸다.

“제가 병원으로 갈 수도 있고요. 아니-”

기어코 짓씹힌 혀끝에서 비릿한 쇠 맛이 올라왔다.

데베르는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진심 섞인 웃음이었다.

“제가 곧 갈 것 같군요. 제국 병원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