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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72화 (72/206)

72화

“이번 시즌에 볼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요.”

귀부인 한 명이 입을 뗐다. 그녀의 한마디에 옆에 앉아있던 부인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동의를 표했다.

중년의 낙이라곤 해마다 이뤄지는 사교계의 가십뿐이던 그녀들에게 작년 한 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해였다. 늦은 가을에라도 결혼하지 않을까 했던 라프넬 공주와 데베르 공작 사이에선 이렇다 할 얘기도 없었고, 그들의 즐거움이 되어주는 아더는 사교 시즌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황제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외국으로만 돌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새로운 봄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공작이 무도회에 나오기라도 했잖아요. 뭔가 일이 진척되려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누군가 은밀히 속삭였다.

“맞아요. 아더 황자도 돌아왔잖아요. 늘 붙어 다니는 둘이니 혼처도 함께 찾을 수 있죠.”

그들은 저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공주에게까진 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가벼운 입을 마음껏 놀렸다.

“그러고 보니 일 년 만에 몰리 부인께서도 나오셨네요. 아마 작년 봄에 뵙곤 처음인 것 같은데….”

“아프지 않으면 부인의 얼굴 뵙기도 어려워서야. 사교계의 기틀을 잡아주시던 몰리 부인이 계시지 않아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에요.”

기다란 티 테이블 상석에 앉은 몰리 부인은 애써 미소 지으며 차만 들이켰다.

“하긴. 부인께선 자식들의 혼사 따위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니 사교 시즌이 지루하긴 하시겠어요.”

순간, 뼈 있는 농담이 테이블을 넘어왔다. 작년 봄, 티 타임에서 몰리 부인에게 한 소리를 들은 부인이었다.

몰리 부인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아직도 자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을 책잡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콜린스 공작님도 연로해지시는데 수양딸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짐짓 걱정하는 척 가증스런 말을 뱉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머, 제가 실수했나 봐요. 죄송해요, 부인. 후사가 없으면 조카를 자식으로 들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셔요.”

“기분 나쁘다니요.”

금테 안경 속의 눈동자가 인자하게 휘어졌다. 따스하면서도 냉철한 그 모습은 어딘가 콜린스 공작과 닮아있었다.

“몰리 공작가를 위하는 남작 부인의 충정이 고마울 따름이에요.”

몰리 부인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후사가 없는 것도 걱정스런 일이지만, 정확한 후사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죠. 안 그런가요, 부인?”

조금 전까진 기세등등했던 남작 부인의 안색이 금세 시퍼렇게 질렸다. 짙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모멸감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호색한인 그녀의 남편에게 혼외 자식이 줄줄이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몰리 부인은 쓴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제가 실언했나 보군요. 용서하세요, 부인. 나이가 드니 자꾸만 주책맞아지네요.”

고작 남의 치부를 흔드는 것 따위로 응수해야 한다는 게 못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몰리 부인은 모든 걸 들으면서도 듣지 않은 체했다. 그러다 지금처럼 누군가 선을 넘는 순간, 가장 적절한 패를 꺼내 들었다. 때론 지금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패일지라도 말이다.

몰리 부인은 들이켜는 차 속에 나직한 한숨을 흘려보냈다.

이 아둔한 꼴들을 또 한 철이나 봐야 한다니.

이제 막 시작된 사교 철이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중간에서 눈치를 보던 부인 하나가 대뜸 끼어들었다.

“누, 누구든 적법하게 가문을 이어받기만 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들으셨어요? 하워드 백작이 양녀를 들였다는 거?”

“하워드 백작이요?”

“백작이 넥서스로 돌아왔나요?”

화제는 금방 옮겨갔다.

“늘 외국으로만 나도시는 분이잖아요. 소식지도 양녀 얘기는 없던데…. 확실한 거 맞아요?”

“허, 지금껏 무자식으로 살던 자유분방한 분이 갑자기 양녀라니. 양자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소식지도 잠잠한 거 보면 그저 뜬소문 같은걸요.”

새로운 가십을 물어온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뜬소문이라뇨! 저희 시녀장이 웨인에서 하워드 부인 옆에 웬 아가씨 하나가 있다고 했다니까요?”

“하워드 부인의 친척 조카쯤 되겠죠.”

피식, 누군가 비웃음을 날렸다.

“뿌리도 정확하지 않은 하워드 부인에게 무슨 친척이 있나요? 웨인으로 온 지금까지 외톨이 부인인데. 그리고 백작 내외가 웨인에 도착했으면 그 부인도 이 자리에 있어야죠. 하긴, 늘 건강 핑계를 대며 부인들의 모임에는 빠지니까.”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부인.”

참지 못한 몰리 부인이 결국 입을 뗐다.

“하워드 부인이 내성적인 분이어도, 심성이 곱다는 건 모두가 알 텐데요. 지금껏 코펠의 수많은 병원을 후원해 온 가문이 하워드 가인 걸 잊으셨나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하워드 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가벼이 말씀하시는 것도 이젠 조금 지겹군요. 하워드 백작이 가문을 이어받은 것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어요. 이방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까지 넥서스를 위해 헌신하셨고요.”

부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말씀하신 것처럼 적법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양자도 아닌 사촌 동생 정도면 가문을 이을 자격이 있지 않나요? 왜요? 이번엔 넥서스에서 줄곧 나고 자라지 않아 안 된다고 하실 건가요?”

답지 않게 뾰족한 말을 쏟아부을 만큼 부인의 심기는 불편했다. 사교 시즌 준비는 공작부인의 의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지만, 지겨운 장단에 맞춰주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휴….”

웬만해선 언성을 높이는 일 없는 몰리 부인이었기에 다들 입을 다물고 부인의 눈치만 살피는 게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비록 자식은 없을지언정, 넥서스 공작부인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서 해왔으니까요. 이번 사교 시즌에도 부족함 없이 해낼 생각입니다.”

차갑게 식은 찻잔에 조금은 지친 기색의 얼굴이 비쳤다.

“하워드 부인은 오늘 아침 일찍이, 웨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을 추스르는 중이라고 기별을 보내셨어요. 다음 모임에 참석하시겠다고요. 그리고 양녀는….”

후,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부분까진 저도 모르겠군요. 부디 이 자리가 애꿎은 소문이 퍼져나가는 근원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화려한 꽃들과 그 색깔을 닮은 디저트들이 즐비한 티 테이블 위로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맴돌았다.

슬그머니 누군가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롭게 들어온 양장점 가보셨어요?”

몰리 부인의 바람과는 달리, 일 년 만에 제대로 된 사교 시즌을 앞둔 부인들의 들뜬 티 타임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 * *

아이네스는 짠내가 풍기는 부둣가에 서서 들어오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선두로 들어오는 거대한 선박 갑판 위의 붉은 점이 점점 가까워졌다.

“딕시!”

아이네스는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종국엔 머리 위로 팔을 바짝 든 채로 휘두르느라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휘날리는 빨간 머리카락이 뭐라 소리 지르는 게 보였지만, 곳곳에 도착한 화물선이 내는 뱃고동 소리와 인부들의 소음에 제대로 들려오는 건 없었다.

“아이네스!”

갑판 위에서 홀로 방방 뛰는 아가씨를 향한 시선들이 꽂혔지만, 딕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바다에 뛰어들 기세로 난간에 몸을 기대 손을 흔들던 딕시는 배가 정박할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입구로 달려나갔다.

“아이네스! 어멋!”

닻이 모랫바닥에 닿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딕시가 미끄러질 뻔하자, 누군가 얼른 딕시의 팔을 붙잡았다.

“조심하세요.”

남자는 귓바퀴가 시뻘게져서는 얼른 손을 뗐다.

아이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선착장에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어딘지 익숙했다.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는 아이네스의 앞에 주홍색 눈동자가 성큼 다가왔다.

“아이네스! 무슨 생각해!”

“깜짝아!”

아이네스의 새된 비명에 딕시가 킬킬 웃었다.

“왜 이렇게 숙녀답지 못하니?”

샐쭉 흘겨보는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딕시는 아이네스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나 원 참, 숙녀다운 게 뭔지 도통 모르겠군. 설마, 딕시 콜먼을 놀리는 거냐?”

딕시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흉내 냈다. 특유의 괄괄한 말투와 장난기 어린 농담을 몰라볼 리 없었다.

“콜린스 교수님 흉내 그만해. 재미없어.”

아이네스는 재미없다고 말하면서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부둣가를 걸어갔다.

근 일 년 만의 만남이었다. 몰리 부인을 따라 제국 병원으로 들어간 아이네스와 달리, 딕시는 외국에서 사업을 배워보겠다며 결혼한 제 언니들을 따라갔다.

간간이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소식이 전해지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이네스 너, 올여름에 결혼한다며? 넥서스는 여름도 별로 덥지 않으니 괜찮긴 하겠다.”

“어떻게 알아? 만나면 얘기해 주려고 편지에도 안 적은 건데.”

“편지보다 소식지가 더 빨라. 웨인의 소문은 틈틈이 다 섭렵했지.”

양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걸어가던 딕시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그녀의 시선은 벌써 멀어진 화물선에 가 있었다.

거대한 화물선들의 몸체엔 하워드 아니면 클리프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콜먼 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넥서스 무역은 하워드 백작이랑 데베르 공작이 다 해 먹는구먼.”

저도 모르게 데베르를 입에 담은 딕시는 순간 흠칫하며 아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데베르 공작님은 좀 괜찮으셔?”

소식지를 본 이상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만, 혹시나 해 묻는 것이었다. 행여 공작을 통해 사라진 베스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해서.

“음, 늘 철저한 분이시니까. 소식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난 사교계 모임도 잘 안 나가잖아. 이번에도 결혼 준비를 핑계 대고 여기로 왔는걸?”

지극히 아이네스다운 답변이었다.

“혹시…. 베스 소식은 들은 거 있어?”

“베스….”

애써 웃던 아이네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덩달아 방방 떠 있던 딕시의 기운도 함께 축 늘어졌다.

“들렸으면 좋겠다.”

아이네스는 가만히 속삭였다.

“너도 웨인으로 왔으니 베스만 있으면 완벽한데. 기억나? 네가 베스한테 결혼식까지 같이 살자고 했잖아.”

“왜 기억이 안 나? 그 집 아직도 비어있어. 오늘이라도 베스 제인스를 발견하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들어가야지!”

딕시는 부러 밝은 체하며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 모습에 아이네스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하늘이 눈부셨다. 그 속절없는 아름다움이 그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만든다는 걸, 사라진 베스는 알까.

“멀리 있지 않을 것 같아.”

뭉게뭉게 흘러가는 구름에 나직한 바람이 실렸다.

“그런 느낌이 들어. 베스를 곧 만날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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