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끝을 모르고 침잠하던 데베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아는 새카만 눈동자는, 제 마음을 이토록 선득하게 만드는 눈동자는 베스가 유일했다.
하지만 너는 여기에 없는데. 또다시 환영인 걸까.
데베르는 눈앞의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그 지독한 무력감에 허탈함이 치고 올라왔지만, 입술 새로 나오는 건 뜨거운 숨뿐이었다.
데베르의 시선이 보랏빛 나비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칠흑 같은 눈동자를 느리게 좇았다. 그러다 픽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흘렸다. 이젠 환영조차 진짜처럼 느끼다니.
미쳐가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진즉에 밟았어야 할 전철을 따르는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데베르는 이 기꺼운 환영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술을 들이붓고, 약을 집어삼켜도 나타나지 않던 베스와의 재회였으니까.
“숨이 막혀….”
아무리 네가 가짜라도 베스 제인스라면 나를 돌아보겠지.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베르는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로…. 숨이 막혀.”
거짓말을 달고 산 벌일까.
갑자기 목구멍이 터질 듯이 조여왔다. 데베르의 미간이 좁아짐과 동시에 시야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렁였다.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빛과 여자의 보라색 가면이 어지럽게 얽혔다.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흰 손이 다가왔다.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순간, 툭 튀어나온 목울대에 여자의 손이 스쳤다. 데베르는 손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이미 눅진해진 약 기운은 손 쓸 틈 없이 그를 수마로 빠뜨렸다.
단 한 번만 닿을 수 있다면 알 텐데.
어떤 생생한 환각도 제 손이 닿는 순간이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닿지 못한 것이 조금은 기뻤다. 사라지는 게 아닌, 멀어지는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
사라지는 건 끔찍했다.
나무 등치에 기대 있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가지 마.
전하지 못한 말이 입 안을 쓰게 맴돌았다.
“베스….”
닿지 못할 이름은 닳지도 않았다.
거칠한 흙이 잡히던 손에 부드러운 실크가 감겨들었다. 이국적인 향냄새에 데베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일어났어? 주정뱅이 공작?”
익숙한 목소리에 데베르의 고개가 다시 침대 위로 처박혔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으로 들어선 아더의 손엔 푸른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이 들려 있었다. 금방 씻고 나왔는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대롱거렸다.
“동방에 갔을 때 유명한 상인한테서 사 온 거야.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달래기에 좋다고 해서 냉큼 샀는데, 꽤 효과가 좋더라고.”
침대 머리맡 협탁 위에 향을 올린 아더는 쓰러진 데베르를 흘깃 쳐다봤다. 뭐에 취했는지 인사불성인 상태로 황궁 후원에 널브러져 있었으면서도, 시종이 몸에 손을 댈라치면 매섭게도 쳐내는 통에 그는 아직도 흙투성이인 몰골이었다.
“내가 어제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
아더는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흉내 냈다.
“사교 시즌 첫날부터 데베르 공작이 뭘 처먹고 저러냐고 수군거려서 나도 같이 취한 척하느라 난리였잖아. 우리 둘이 대작했다고 하니까 다들 그러려니 하더라고.”
덜 마른 머리를 털던 아더는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피로감이 밀려왔다.
“내가 너 구해준 거다.”
부러 내는 생색에도 데베르는 대꾸가 없었다. 아더는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에 마른 웃음을 뱉었다. 갑자기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젯밤엔 왜 그러고 있었어?”
물음 끝에 숨길 수 없는 한숨이 묻어났다.
“어젯밤….”
설핏 찌푸린 눈을 뜬 데베르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지끈거리긴 해도 말끔해진 머릿속으로 어젯밤의 환영이 겹쳤다.
데베르는 여전히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이젠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을 눈앞에서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거북스러워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타이가 목을 조여서.”
“뭐라고?”
성의 없는 대답에 아더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데베르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속이 뒤집혀 휘청거렸지만, 아더는 눈치채지 못했다.
“데베르, 씻고 옷 갈아입고 가. 소식지가 온통 네 얘기뿐인데 기름 붓지 말고.”
아더는 짜증이 치민 얼굴로 피어오르는 향을 꺼트렸다. 고작 향 따위로 상념을 날린다는 건 오만이었나.
“어떻게 일 년 남짓을 외국으로 나돌아도, 네 소식이 적힌 그놈의 황색지는 빌어먹게도 쫓아오는지! 네가 소식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적당히 몸 좀 사려.”
몰리 부인과 콜린스 공작까지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뒷말은 삼킨 채였다. 아더는 거칠게 제 눈가를 문질렀다.
“내 궁에선 목욕 시중드는 이따위 없으니까 그런 줄 알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데베르는 반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치며 침실에서 이어지는 욕실로 걸어갔다.
웨인의 제 침실과는 달리, 아더의 황궁 침실은 천장까지 뻗어 올라간 모든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데베르는 어둑한 욕실로 들어서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이어 셔츠 단추를 풀려던 손이 멈칫했다. 타이가 사라져 밋밋한 목 언저리에서 무언가 만져졌다.
황량할 만큼 커다란 욕실을 걸어가는 발소리가 질척했다. 거울 앞에 선 데베르는 꼴사나운 제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미 풀려 있는 단추 하나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아래로 향했다. 단추 두어 개를 더 풀자, 자잘하게 새겨진 흉터 사이로 새하얀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턴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잊고 있던 목걸이였다.
그 가운데 매달린 낡은 열쇠에 데베르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손에 닿는 거칠한 촉감, 벗겨진 칠 사이로 스며든 피까지. 온전히 느껴지는 그 모든 감각에 데베르는 집중했다.
“이렇게 만져지는데.”
데베르는 그대로 김이 피어오르는 욕탕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에 젖은 바짓단이 척척하게 다리에 들러붙고,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릿속이 더 달아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몸을 내던지듯 물속으로 빠뜨렸다. 순식간에 사위가 먹먹해지고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폐부가 터질 듯 잔뜩 부풀어 금방이라도 귓구멍을 통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머리를 들진 않았다.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데베르는 고요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데베르는 한순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보라색 가면. 새카만 눈동자. 흰 손. 풍겨오던 향.
그래, 그 향.
물 밖으로 솟구친 몸통과 함께 심장이 빠르게 뜀박질했다. 참았던 숨을 들이켜기 위해 팽창한 가슴팍이 급하게 오르내렸다.
“향….”
이제껏 온갖 환영에 시달렸지만, 그 모든 건 가짜였다. 손에 닿으면 부서진다는 것 말고도 그를 절망케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베스의 환영은 그 어떤 향도 풍기지 않았으니까.
데베르가 단 한 번도 환영에 속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어제는 달랐다. 정말 제가 미쳐가는 게 아니라면, 분명히 베스의 향이 제게 닿았다.
뻗은 콧대와 각이 진 턱 밑으로 뜨거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물방울이 욕탕에 떨어질 때마다 적막한 욕실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불현듯 노상 굳어있던 입꼬리가 휘어졌다.
데베르는 그대로 침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데베르 클리프…!”
소파에 걸터앉아 신문을 보던 아더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다가오는 데베르를 마주 봤다.
“말해 봐.”
데베르는 축축한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아더는 대꾸조차 잊은 채 반쯤 미친 제 친구를 바라봤다. 욕실로 들어갔을 때보다 더 엉망인 꼴로 기어 나온 것도 모자라, 의중을 알 수 없는 말까지 지껄이고 있는 데베르 클리프를.
“정신 차려!”
“네가 아는 베스 제인스에 대해.”
“뭐라고?”
아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름에 말문이 막혔다.
몇 달 전 겨울, 종전 후 일 년 남짓을 외국으로 나돌다 넥서스로 돌아온 그 날. 데베르의 저택 응접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스 제인스를 입에 올린 게 마지막이었다. 베스의 이름은 둘 사이에서 하나의 금문율이 되었으니까.
데베르도 그 이후론 베스의 이름조차 말하는 일이 없었고, 소식지도 그가 술과 약으로 미쳐간다는 소문만 흘릴 뿐, 그가 찾는 여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베스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저처럼 계속 떠올리는 이들 또한 있었지만.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서 뭘 알아?! 제발 정신-”
“머리가 금발이었나? 금발이었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눈동자는 조금 붉었던 것 같은데, 안 그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더가 고함을 내질렀다. 데베르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계속해서 베스 제인스와는 정반대의 얘기들을 줄줄 읊어댔다. 그의 손가락과 젖은 셔츠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아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너 미쳤어?! 그 여자를 잊은 거야, 아니면 아직도 취해 있는 거야?”
“말해 봐. 네가 본 베스 제인스에 대해.”
잿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금발은 또 무슨, 하. 새카만 머리카락이잖아.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는?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데베르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제 말에 대한 확신과 불확신이 어지럽게 얽힌 얼굴은 베스 제인스란 인물 자체를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광증으로 돌아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렵사리 대답을 뱉는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눈동자도 머리카락처럼 까매. 얼굴은 하얗고. 데베르, 일단 내가 안정제를 가져올 테니까-”
“맞아.”
데베르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크게 들썩였다. 아더는 못 볼 걸 보는 이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데베르를 응시했다.
데베르는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보다 하얗게 웃어 보였다. 세상의 온갖 어둠은 다 간직한 얼굴로, 그토록 새하얗게 웃다니.
그 소름 끼치는 부조화에 아더는 내쉬던 숨마저 참았다.
“아더 네가 말한 게 다 맞아. 베스 제인스는 그래. 역시.”
데베르는 협탁 위에 놓인 소식지를 들어 올렸다. 새벽 동이 터오기가 무섭게 새로운 소식지는 황궁뿐 아니라 웨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오늘의 소식지엔 황궁 후원에서 이름 모를 것에 취해 쓰러져 있던 공작에 관한 얘기가 한가득 쓰여 있었다. 그게 자신의 얘기란 걸 모를 수 없었다.
데베르는 홀가분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환영이 아니야.”
말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베스 제인스가 돌아왔어.”
생기를 잃은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