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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70화 (70/206)

70화

“아더, 오랜만이구나!”

콜린스가 응접실로 들어서는 아더를 껴안았다. 웨인에 도착하자마자 몰리 공작의 저택으로 간 아더였다.

“잘 지내셨죠?”

“녀석아! 편지 한 통 없이 어딜 그리 쏘다니다 오는 거야?!”

“폐하가 넥서스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도와야죠.”

“잘 왔다. 잘생긴 놈이 없으니까 웨인이 영 심심하더라고.”

“여보, 너무 주책맞게 굴지 마세요.”

차를 따르던 몰리 부인이 남편을 나직이 나무랐다.

콜린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아더에게 종전 이후 주변국의 상황을 물었다. 아더는 유연하게 답하며 차를 들이켰다.

근 일 년 남짓한 시간을 외국으로 떠돌다 돌아온 아더는 좀 더 신사다운 분위기가 흘렀다.

“이젠 정말 메이너 공작이라 불러야겠어.”

“허울뿐인 공작이란 걸 모두 아는걸요. 지금처럼 아더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훨씬 좋으니까요.”

아더가 가볍게 웃었다.

“버르장머리없는 놈 같으니라고.”

콜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내를 돌아봤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작은 종이를 부인에게 건네고 있었다.

소식지였다.

빼곡하게 적힌 활자를 읽어나갈수록 부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부인?”

아더의 물음에도 부인은 대답 없이 차만 들이켰다. 티 테이블 위에 소식지를 내려놓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데베르가, 데베르가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데베르가요?”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지가 온통 데베르 얘기야. 안정제를 다시 먹기 시작한 것 같은데, 병원 기록은 없고. 대체 어디서 뭘 가져오는 건지…!”

“다이애나.”

“당신도 알잖아요. 데베르에게 ‘그런 위험’이 농후하다는 걸. 지금 소식지가 온통 떠들어대요. 데베르가 무언가에 중독되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이에요?!”

부인은 분통을 터뜨렸다.

“저택에 손님이라곤 들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건 천박한 가십뿐이고. 데베르의 상태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콜린스도 이번엔 침음을 삼켰다.

맞는 말이었다. 갈수록 데베르에 대한 자극적인 소문은 부풀어져만 가는데, 데베르는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클리프가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올리버 집사도 입을 굳게 다문 채, 클리프 공작은 건강상의 이유로 외출을 즐기시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래, 아더 너라면 데베르도 만나줄 거야.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부인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베르의 상태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필요할 법한 약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콜린스와 둘만 남은 자리에서 아더는 무거운 침묵을 깼다.

“베스 제인스는 여전히 소식이 없나요?”

“아직.”

“참 잘 숨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콜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골목에서 도망치던 아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쫓아가서라도 잡았어야 했다고 마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후회했었는데. 다시 같은 후회를 하게 될 줄이야.

좀 더 그 아이의 말을 들어줬어야 했다.

“똑똑한 아이니 잘 있겠지.”

콜린스는 간절한 바람을 뱉었다.

* * *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커튼이 쳐진 침실은 어둑하기만 했다.

곳곳에 빈 약통이 나뒹굴고 있었고, 걸음을 조금이라도 떼면 깨진 술병에서 흘러나온 위스키가 발을 적셨다.

데베르는 소파 언저리에 쓰러져 있었다.

울렁거리는 머릿속으로 자꾸만 환영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약한 새끼.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새끼가 내 자식이라니.'

자신과 닮은 중년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귓가에 채찍 소리가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겨울바람 소리와도 비슷했다.

데베르는 형형한 빛을 띠는 눈에 힘을 줬다.

“제길! 죽여버리겠다고 했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데베르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파편 하나가 볼에 스치자, 종이에 베인 것 같은 미미한 통증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카시우스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희미한 인영이 나타났다. 베스였다.

“안 돼. 안 돼. 사라지지 마. 안 돼.”

데베르는 손을 뻗었다. 잡아 줘. 하지만 인영은 안개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술병을 쥐었다.

더 마시면, 더 취하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무자비하게 때려 부은 술이 입술부터 턱까지 흘러내렸다. 풀어 헤쳐진 셔츠는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반병이나 비우고 난 뒤, 데베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나타나야 하는데. 눈을 가늘게 뜨자, 흐릿한 여체가 다시 나타났다.

“베스….”

벌떡 일어난 데베르의 기다란 몸이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그렇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문밖에 서 있던 집사는 침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응접실엔 아더가 도착해 있었다.

“황자님, 아무래도 공작님을 오늘 뵙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들어가도 될까요?”

“외람되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아더는 부인이 부탁한 데베르의 약 뭉치를 내려다봤다.

“데베르가 깰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건 괜찮겠죠?”

“그건.”

“전 괜찮으니 가서 일 보세요.”

아더는 미소 지으며 벌써 두 번째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웨인이었다. 이 지독한 곳은 반갑지 않았지만, 제 유일한 친우를 위해 아더는 기꺼이 기다림을 택했다.

데베르가 나타난 건 자정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데베르, 꼴이 아주 볼 만한데?”

장난기 섞인 안부 인사에도 데베르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반대편 소파에 눕듯이 기댔다. 하인이 쟁반에 위스키 한 잔과 하얀 알약을 가져왔다.

아더는 오랜만에 보는 데베르를 눈에 담았다. 못 본 새 얼굴의 각이 더 뚜렷해지고, 한결 날 선 기운이 풍겼다.

“왜 왔어?”

“퉁명스러운 말투는 여전하구나. 안부 물으러 왔다, 이 자식아.”

아더는 약 뭉치를 툭 던졌다.

데베르는 잠시 약 뭉치를 보더니 하인이 들고 있는 빈 쟁반 위에 올려보냈다.

“소식지는 네 얘기로 가득하던데.”

아더 또한 소식지에서 데베르에 대한 소문을 봤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공작은 그런 천박한 소문이 진짜일까 싶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예전처럼 회사에 눌어붙어 있진 않았지만, 깔끔하고 진취적인 일 처리 또한 똑같다고 들었다.

“뜬 소문인가 싶을 정도로 멀끔하군.”

데베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먹을 쥐어 제 입을 가렸다. 밀려오는 토기에, 당장이라도 금방 마신 술과 약을 게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데베르. 네가 연극에 능하다는 건 알지만, 더는 너를 갉아먹어선 안 돼.”

아더는 빈 찻잔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몰리 공작 내외도 베스를 찾지 못하고 있어. 이쯤 되면 너도 내려놓는 게 맞는 거 같다.”

“베스…?”

데베르는 그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 반문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건 아더였다.

베스 때문에 이 꼴이 났으면서.

“그래, 베스 제인스 말이야.”

“너도 베스를 봤구나.”

뜻 모를 소리에 아더의 단정하던 표정에 금이 갔다.

데베르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꼭 그 모습이 웃는 것처럼 보여 더 기묘했다.

“너도 베스를 봤어.”

“데베르 클리프! 정신 차려!”

“사실 좀 두려웠거든.”

데베르가 고개를 기울이자, 한쪽 끝이 올라간 입꼬리가 갈고리처럼 휘었다.

“그 여자를 본 게 전부 내 환영인가 싶어서.”

홀가분한 얼굴로 일어난 데베르는 창밖을 쳐다봤다. 벌써 또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데베르, 거의 일 년째야. 정신 차려.”

“좀 있으면 눈도 내리겠어.”

응접실을 나가는 데베르의 뒤로 그를 잡아먹을 듯한 시커먼 그림자가 따랐다.

아더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시간은 감정을 모른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얼마나 간절한 바람과 애틋한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넥서스의 겨울이 깊어지고, 가장 큰 축제인 건국기념일이 지나가고, 이른 봄꽃이 다시 필 때까지도 데베르의 저택은 황량하기만 했다.

모든 생명이 죽어버린 그곳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띠는 건 클리프 부인의 방뿐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화병엔 부지런히 제철 꽃이 만개했고, 한 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침구에선 항상 좋은 향이 풍겼다.

“공작님, 폐하의 초대장입니다.”

집사는 서류와 술병이 가득한 테이블의 빈 곳에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놓았다.

“이번 사교 시즌엔-”

“확인할 테니 나가보세요.”

어느 날부턴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데베르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부풀어져 가기만 했다.

황제가 직접 보낸 사교 무도회 초대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공주를 일 년 동안이나 버려뒀으니, 이젠 그의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었다.

황제는 초대장을 직접 보냄으로써 초대가 아닌 명령을 하고 있었다.

“갈 테니 준비하세요.”

“네.”

서류에 서명을 하려던 데베르의 손이 순간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젠장.”

데베르는 마개가 열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집사는 금방 무도회용 슈트를 가져왔다. 데베르는 옷을 갈아입고, 차에 올라타면서도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황궁 연회장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발작 같은 두통 때문에 한참을 차 안에 있었다. 차 바닥에 돌아다니는 약을 털어 넣은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세상에, 공작이에요.”

“이번 시즌엔 나오나 봐요.”

“공주와의 결혼 때문이겠죠?”

데베르는 자신에게 꽂히는 화살 같은 시선을 견디며 연회장 안으로 느릿하게 걸어 들어갔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연회장에서 가면을 쓰지 않은 건 데베르가 유일했다.

“빌어먹을 꼴들이군.”

그 순간, 훅 끼쳐 오르는 약 기운에 크게 비틀거렸다. 애써 참은 토악질이 또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데베르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연회장의 오케스트라 선율과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위태로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황궁의 후원이었다.

마침내 고요가 찾아온 그 자리에 데베르는 풀썩 쓰러졌다. 커다란 나무 등치에 쓰러진 그의 모습은 황궁 안에선 보이지 않았다.

“헉, 헉.”

데베르는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온몸은 늘어지는데 숨은 갈수록 가빠지기만 했다.

타이를 맴돌던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지고 시야가 점멸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잠들면 안 돼요.”

짙은 보라색 가면 속의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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