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번 사교 시즌엔 이렇다 할 결혼 소식이 들리지 않네요.”
어느 부인의 눈치 없는 소리에 티 테이블에 적막이 찾아왔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잡힌 웨인 귀부인들의 티파티였다. 그들의 미혼 영애들과 라프넬 공주까지 끼어 있는 자리는 웨인의 가십이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늘은 좀처럼 참석지 않는 몰리 부인까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종전만으로도 이번 봄은 벅차죠, 부인.”
몰리 부인은 부드럽게 일침을 가했다.
다들 이번 사교 시즌이 넥서스 역사상 가장 화려하리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사교계 가십의 중심에 서 있는 데베르 클리프는 건강상의 핑계를 대며 무도회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는 무례를 당당하게 저질렀고, 아더 황자는 일을 핑계로 외국으로만 나돌고 있었다.
올해는 공작과 공주의 결혼이 기어코 성사될 것이라 입을 떼던 호사가들도 입을 딱 다물었다. 데베르는 건강을 핑계 댄 게 우스울 만큼 일 중독자처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클리프가의 군수 사업은 공격적인 기세로 커져 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도 그의 집무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아이네스도 올봄엔 결혼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째 소식이 안 들리는구나.”
“앗, 네…. 백작님께서 충분히 회복되시면 하려고 미뤘어요.”
“세상에! 다리가 아직 그 모양이니?”
“부인.”
결국은 또 몰리 부인이 나섰다.
“게일 백작은 열심히 재활 치료에 매진하고 있어요. 소파에 앉아 떠드는 가벼운 입처럼 쓸모없는 게 없죠.”
몰리 부인은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 물어뜯을 게 뭐가 있나 호시탐탐 노리면서 가시 섞인 말을 툭툭 내뱉는 거 하며, 쓸데없는 가십까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이네스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다.
“그이는 목발 없이 자기 힘으로 걸어서 식장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요. 저도 얼마 전까지 전장에 있었더니, 결혼 준비도 너무 버겁고요. 조금 쉬었다가 내년쯤에 할까 해요.”
다행히 그 말엔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봄이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어수선하기만 했다.
아이네스는 제 약혼자를 돌보는 틈틈이 몰리 부부 내외와 베스를 찾았다. 딕시가 외국에서 사업을 하며 사는 제 언니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어디에도 베스는 없었다. 정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아이네스의 손을 라프넬이 잡았다. 말로 펜싱을 하는 것 같은 귀부인들의 티파티에서 오늘만큼은 공주도 별수 없었다.
“클리프 공작은 무슨 생각이신지 몰라요.”
누군가의 말에 라프넬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느라 입이 막힌 꼴이라도 보여줘야 더 캐묻지 않을 테니까.
“설마 후계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
“에이, 클리프가인 걸요.”
“사실 선대 부부도 사이는 좋지 않았잖아요. 클리프 부인은 겉만 번지르르했지, 남편하고는 영.”
“그래도 그만한 인물이 없긴 했죠. 다들 카시우스와 결혼할 때 그러려니 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명줄이라는 건 참 알 수 없어요, 그죠?”
죽은 사람에 대해 입을 떼는 건 너무도 쉬웠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이 바로 클리프가의 사람들이었다.
몰리 부인이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올려놨다.
늘 남루한 간호복만 입고 있다가 오랜만에 차려입은 몰리 부인은 넥서스 유일한 공작부인의 품위가 흘러넘쳤다. 황후가 없는 현 넥서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클리프 부인은 지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어요. 내가 직접 부인을 간호했으니, 더 이상의 유언비어는 듣기 힘들군요. 망자에 대한 모독도 더는 못 참겠고요.”
몰리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시다시피 병원 일이 바빠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부인들께선 좀 더 다과를 즐기다 오세요.”
따라 일어선 부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몰리 부인의 등 뒤에 꽂혔다.
“같은 공작부인이라고 편드는 것 좀 보세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거죠.”
만개한 꽃잎이 그림처럼 휘날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는 티파티였다.
* * *
“공작님, 이젠 눈을 붙이셔야 합니다.”
집무실 문가에서 집사가 말했다.
자정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온 공작은 여느 때처럼 서재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언제 마지막으로 서재 불이 꺼졌는지조차 긴가민가할 정도로 데베르는 일에만 파묻혀 있었다.
며칠 밤이고 새우다가 쓰러지듯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게 유일한 수면이었다. 그조차도 깊이 잠들지 못해, 눈가엔 늘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노곤한 피로조차 데베르는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의 공간 안에서만, 그것도 서재와 침실에서만 데베르의 느슨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라는 소리에 데베르의 손이 멈췄다. 두꺼운 서류철을 덮은 그는 손짓했다.
“가져오세요.”
테이블 위에 또다시 두툼하고 얼룩진 봉투가 올려졌다. 집사는 몇 번째 이 편지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편지가 도착했을 때, 공작은 번트로 향했다. 그리고 똑같은 편지 봉투가 도착할수록 저택엔 낯선 손님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공작은 갖은 핑계를 대며 넥서스의 여러 지방으로 사라졌다.
클리프 공작의 묘연한 행방과 자극적인 가십은 소식지를 통해 넥서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분을 찾으시는 겁니까?”
“알면서 물으시는군요.”
데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종이 뭉치를 넘겼다. 그곳엔 베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이젠 베스와 발음이 비슷한 이름까지 포함된 채였다.
종이를 반쯤 넘겼을 무렵, 데베르는 뻐근한 눈가를 몇 번 눌렀다. 그는 습관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위스키 한 병이 비워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벌써 바닥이 보이는 병을 바라보던 집사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오늘 저녁에 심부름꾼이 찾아왔습니다.”
“뭐라 하던가요.”
“그게, 말씀드리기 외람되나….”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잔의 얼음을 느릿하게 돌리며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보호구역보다 더한 곳에서라도 발견했나 보죠?”
“그것이.”
“말하세요.”
웃음기 사라진 목소리가 명령했다.
“웨인 외곽에 있는 정신 병원에서 자신을 베스라고 말하는 여자가 있다고 합니다. 검은 머리에, 미인이라고.”
“정신 병원.”
데베르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보호구역보다 더한 곳에서 그 이름이 들릴 줄이야.
“시정잡배 같은 심부름꾼의 얘기를 모두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치들은 돈만 쥐여주면 거짓말엔-”
“동트기 전에 출발할 테니 준비하세요.”
공작은 집사의 말을 잘랐다.
다시 태연한 얼굴로 서류철을 여는 공작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조금 전 잠깐의 동요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전 이사회가 있기 전에 다녀와야 합니다.”
데베르는 그 말을 지켰다.
동이 트지도 않은 캄캄한 새벽, 잔뜩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걸어오는 공작은 평소보다 살벌한 기운을 풍겼다. 그 모습은 웨인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번트로 떠나겠다고 말할 때와 비슷했다.
차는 번트와 웨인 사이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요양병원과 정신 병원이 가득한 곳이었다.
갑작스런 공작의 행차에 병원 사람들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스스로 베스라고 한다는 검은 머리 여자를 찾습니다.”
수행인이 말을 대신했다.
“베스요? 아, 그 여자!”
간병인은 병원 맨 꼭대기 층으로 공작 일행을 안내했다.
“어휴, 요즘 그 환자 찾는 분이 많네.”
간병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병실 문을 열었다.
“저 끝 침대에요.”
병실 맨 구석에 있는 침대는 커튼에 가려 있었다. 데베르는 함께 나서려는 수행인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이제 막 푸르스름한 새벽 미명이 들어오는 병실은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데베르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기억 속의 베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이곳에 있는 게 정말 네가 맞는다면.
커튼을 쥔 데베르는 제 두려움을 마주 봤다.
정말 이 침대에 누운 여자가 베스일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 미쳐도 상관없었다. 병들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유일한 한가지.
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데베르 클리프란 이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 목을 꺾어버릴지도 몰랐다.
“베, 베스….”
희미한 여자의 중얼거림에 데베르는 거칠게 커튼을 젖혔다.
“허.”
데베르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베, 베스. 베….”
누워있는 여자는 베스가 아니었다.
꺼져가는 목숨을 겨우 이어만 가는 것 같은 여자는 베스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고, 닮은 것이라곤 답답할 정도로 시커먼 머리카락 하나뿐이었다.
“죽여버리겠어.”
그는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낯선 사람이 있는데도 천장만 쳐다보는 여자는 똑같은 이름만을 곱씹었다. 멀건 눈동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 밖으로 나온 데베르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할 일을 놓친 운전사와 수행인들이 따라붙지도 못할 속력이었다.
“아니, 벌써.”
집사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데베르는 사냥총을 들고 위층으로 향했다. 철컥이는 장전 소리에 질겁한 사용인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귀가 막힌 것처럼 굴었다.
데베르는 공작 방과 공작부인의 방을 잇는 통로 앞에 섰다. 카시우스가 살았을 적엔 못질 되어 막혀 있었지만, 이젠 집사가 새롭게 단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저택 안에 폭발 같은 총탄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이내 너른 문이 바닥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아니! 공작님!”
데베르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통로 너머로 보이는 클리프 부인의 방을 바라봤다. 군데군데 보이는 하늘빛에 숨이 막히면서도, 모순적으로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절감했다.
통로를 내지르듯 걸어가던 데베르는 그 가운데에 있는 문을 열었다.
부부 침실이었다.
“이 복도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제 앞을 가로막지 마세요.”
돌아선 데베르는 제 침실에 여전히 걸려 있는 군복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 군복에 손대는 사람도 죽여버릴 테니 그렇게 알고.”
데베르의 눈이 번뜩였다.
그건 살았되 죽은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