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보호구역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왁자지껄할 보호구역 골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들이 해독 주사를 기다리며 잔뜩 취해 늘어진 손님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이내 방 안엔 노파와 베스만이 남았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멀리서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고개를 빼 확인하려 하자 노파가 팔을 턱 잡았다.
“너무 관심 두지 말아라.”
경고 같은 말에 소녀도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벽에 붙어섰다.
직직. 바닥에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긴가.”
낮은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맞군.”
목소리는 노파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까딱였다.
공작의 고갯짓과 함께 장정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군인 하나가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녀는 제 발치에 닿는 군인의 머리카락에 얼른 까치발을 들었다. 넥서스 군복이었다. 그건 보호구역에 있는 소녀도 알 수 있었다.
“실력이 좋다던데.”
“실력이 좋다마다요. 할멈이 늙긴 했어도, 이런 쪽에는-”
“아니.”
공작은 소녀를 턱짓했다.
“어린 것치고 솜씨가 좋다고.”
공작은 늑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도 잿빛 눈동자의 안광은 짐승처럼 번뜩였다. 언제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것처럼 기민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뱀 같기도 했다.
“뭐든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지. 머리가 크면 다 제 생각이 들어가서 쓸모가 없어지거든.”
공작은 쓰러진 군인을 툭 발로 건드렸다.
군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해 봐.”
소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은 미형이었으나, 상대에게 호감보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이었다.
“야, 야! 나리가 말씀하시는데!”
풍겨오는 날붙이의 쇠 비린내가 싫었다. 문짝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고압적인 시선도 싫었다.
“아가.”
노파가 나직하게 불렀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녀는 커갈수록 노파의 말만 들었다. 이곳에서 노파는 소녀의 어머니였고, 아버지였으며, 유일한 가족이었다.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쭈그리고 앉아, 옆모습만 보이는 군인의 앞머리를 치웠다. 어쨌건 숨부터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 순간, 손이 멈칫했다.
그 애다.
멈춘 것 같던 소녀의 맥박이 서서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애가 맞다.
장정들이 엎드린 군인의 몸을 똑바로 뒤집었다. 속절없이 남의 손에 이리저리 옮겨지는 몸뚱이는 기억 속의 소년보다 훨씬 컸지만, 확실히 그 애였다.
데베르.
소녀는 얼른 그의 얼굴께로 다가가 앉았다. 열여섯, 열일곱쯤 된 소년의 얼굴은 앳된 청년티가 막 나기 시작했다. 여문 턱과 힘줄이 불거진 팔도 예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몰라볼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이 잿빛 머리카락을 잊은 적이 없으니까.
소녀는 고개를 들어 쇠 비린내가 나는 공작을 올려봤다. 그래, 이 냄새는 피 냄새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공작은 소년과 닮아 있었다.
“야! 주사나 놓으라고! 어디 감히 공작님 얼굴을!”
애가 탄 문지기가 연신 공작의 눈치를 보며 소녀를 재촉했다.
'아니, 나는 나중에 싸우러 가.'
앳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나중이, 지금이 된 걸까.
소녀는 얼른 뛰어가 서랍을 열었다.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해독제를 바구니에 담았다.
“코바흐 놈들 것을 먹은 거 같던데.”
공작이 단서처럼 던져준 말에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코바흐. 종종 보호구역에서도 코바흐에서 난 독성 식물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그걸 가루 내 향을 피우거나 먹게 되면 환각 증상을 보게 되는데, 그 중독은 다른 것보다 훨씬 심했다.
해독제 하나를 든 소녀는 곧 다른 해독제 몇 병을 들더니 비커에 조심스럽게 섞기 시작했다. 눈금 하나하나를 세는 세밀한 손길에 방안엔 정적이 맴돌았다. 쪼르륵거리며 흘러가는 해독제를 몇 번 흔든 후, 주사기에 꽂았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을 잡았다.
오두막에 있을 적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더 크지 않던 소년의 손은, 이젠 소녀의 손 하나쯤은 가볍게 덮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다는 걸 이제야 체감했다.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예리하게 소년의 정맥을 찔렀다.
“이젠 시간이 약입니다.”
노파가 운을 뗐다.
공작은 팔짱을 끼고 바닥에 늘어진 제 아들을 보더니 욕을 지껄였다.
“나약한 새끼. 고작 전투 몇 번 했다고 빌빌대는 꼴이라니.”
공작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지키고 있어. 정신이 들면 그곳으로 데려오고.”
“예!”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장정들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보호구역을 나서는 공작을 따라 문지기들이 아첨하며 들러붙었다. 공작의 부하들은 방을 지키기 위해 문 앞에 섰지만, 안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너처럼 팔자 사나운 놈이 또 하나 있구나.”
노파는 툭, 말을 내뱉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녀는 소년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았다. 보호구역에 오고 나선 시간을 잊은 것 같았다. 낡은 치맛자락이 조금씩 짧아질 때쯤에야 계절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는 걸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어릴 때와 비슷한데, 소년만 훌쩍 자라 있었다.
주사를 놓은 지 시간이 꽤 지나도 소년은 깨지 않았다. 소녀는 손 거스러미를 뜯으며 초조하게 소년이 깨기를 기다렸다.
자세히 보니 소년의 눈가에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그게 또 못내 마음에 걸려 제 손으로 닦아내려 했지만, 이미 말라붙은 탓에 헝겊에 물을 조금 부어 문질렀다.
“치워.”
잔뜩 메말라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얌전히 감긴 눈이 몇 번 바르작거렸다.
소녀는 얼른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눈만 깜빡였다. 숨도 어느샌가 참은 채였다.
벌겋게 충혈된 소년의 눈이 천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감겼다. 머리가 아픈지 꽉 깨문 잇새로 신음이 새 나왔다.
“소공작님, 깨셨습니까.”
금세 소리를 알아채곤 문을 지키던 이들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소년의 양팔을 결박하듯 붙잡아 일으켰다.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소년의 몸이 몇 번 휘청였다.
어둑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녀는 그 방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 밖으로 나와 모퉁이를 돌려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흐린 시선이 자그마한 여체에 향했지만, 그뿐이었다.
소녀는 미약하게 흔들던 손을 가만히 내렸다.
* * *
그날 이후로 항상 소년을 기다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매일 눈을 떴다.
밤이 오면 해독 주사를 놓으면서도 틈틈이 문가를 쳐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소년은 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서일까. 아니면 더 이상 그런 건 먹지 않아서일까. 웨인으로 갔을까. 번트에 계속 있는 걸까.
떠오르는 질문 중 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또다시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소년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무렵. 웨인에서 의료봉사단이 도착했다.
“줄 서세요!”
“어머, 아저씨! 그거 그렇게 막 가져가시면 안 돼요!”
“어디 뼈가 부러진 거 같으면 부인에게 가시고, 속이 고장 난 거 같으면 공작님께 가세요!”
보호구역과 이어지는 뒷골목은 빈곤층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후미진 골목에 전에 없는 활기가 돌았다.
침침한 골목을 밝히는 이들은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소녀는 골목 구석에 숨어 그 모든 걸 지켜봤다.
그들도 저처럼 주사기를 가지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환자를 대하는 이들의 얼굴엔 행복감이 흘러넘쳤다.
“허허! 아프시다고 의사를 패는 어르신도 있답니까?”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중년의 남자는 청진기를 마이크처럼 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유난히 큰 목청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너스레를 떨며 진료를 보는 남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만약 아빠도 살아계셨으면 저렇게 나이 드셨을 텐데.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불쑥 치밀어오른 건, 눈에 보이는 저 남자가 지나치게 다정해 보여 그럴 것이다. 소녀는 눈을 세차게 문지르며, 의료봉사단이 하는 걸 지켜봤다.
노파는 의료봉사단은 일주일 정도 있다가 웨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소녀는 매일 골목 귀퉁이에 서서 해가 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는 날, 저무는 노을 사이로 짐을 정리하는 그들을 보는데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어디 아프니?”
돌아본 곳엔 그 괴짜 같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부서진 한쪽 안경다리를 붙잡으며 재차 물었다.
“혹시 어머니나 다른 가족이 아프신 건 아니니?”
이렇게 가까이서 볼 생각은 없었다. 소녀는 몇 번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굽이진 골목 사이로 뛰어가 버렸다.
“허허, 이거, 참.”
남자는 거칠한 턱수염을 쓸며 탄식을 흘렸다. 일주일째 도둑고양이처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챘다. 필시 이 골목에 사는 아이일 텐데.
“콜린스 공작님! 출발하셔야 해요!”
이른 부름에 콜린스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동그란 눈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보, 왜 이리 늦으세요.”
“아니, 누굴 좀 찾느라.”
몰리 부인의 타박에 콜린스는 변명을 둘러대며 마차에 올라탔다. 번트에서 멀어질수록 콜린스는 아이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쫓아가기라도 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어젯밤에 어린애 한 명이 품에 뛰어드는 꿈을 꿨어요.”
“한참 늦은 태몽인가? 허허.”
“이 나이에 태몽이려고요. 그저 꿈꾼 걸 얘기한 거예요.”
몰리 공작 내외에게 애가 없다는 건 이미 철 지난 사교계의 가십이었다.
부지런히 달린 마차가 웨인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 깊은 무렵이었다. 서둘러 짐을 내리는데, 인부 중 하나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어이구야! 얘! 너 누구냐?!”
갑작스런 소란에 공작 내외도 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어갔다.
인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짐마차 구석을 보고 있었다.
“너는….”
말문이 막힌 콜린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안엔 마차 맨 구석에서 몸을 오들오들 떠는 소녀가 있었다. 자신이 놓친 그 아이가.
“어머!”
몰리 부인도 예상치 못한 아이의 등장에 당황스러워했다.
콜린스는 겁많은 새끼 짐승을 대하듯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저씨한테 오렴. 괜찮아. 이리 오겠니?”
그 부름에 주저하던 아이가 마차에서 기어 나왔다. 신발조차 없어 흙투성이가 된 맨발의 아이는 초겨울 날씨에도 발목이 깡총하게 드러난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당신이 꾼 꿈이 태몽이 맞긴 하네! 허허허!”
제 남편의 능청스런 말에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얼른 아이의 어깨에 숄을 둘렀다.
“얘야, 난 콜린스 몰리란다. 네 이름은 뭐니?”
아이는 자신을 콜린스 몰리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올려봤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불어오는 추운 바람에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이는 부부의 발치에 쭈그려 앉았다. 이에 콜린스도 아이와 함께 무릎을 굽혔다.
작은 손가락이 흙바닥을 쓱쓱 쓸었다.
[베스]
“베스? 베스. 예쁜 이름이구나.”
콜린스가 활짝 웃었다.
처음으로 불린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