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침대에 쓰러진 베스 위로 환한 램프 불빛이 내리꽂혔다. 정신이 채 제대로 들기도 전에 누군가 베스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순간 그 남자인가 싶어 움찔하던 베스도 부드러운 여자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약 기운에 반항할 힘조차 없는 탓도 컸다.
“씻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녀 둘이 베스의 양팔을 부축하듯 잡고 방문을 열었다.
번뜩 루카가 생각나 뒤를 돌아봤지만, 루카는 방에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녀의 나직한 재촉에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열차에서 이곳까지 온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걷는 다리가 맥없이 후들거렸다.
하녀는 싫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베스를 지탱했다.
처음 보는 방 밖의 풍경은 베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복도 벽엔 고풍스런 그림 액자가 즐비하게 달려 있었고, 계단 밑에선 사용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복도의 창 대부분을 가린 탓에 낮인데도 복도 등불은 모두 켜져 있었다.
욕실의 문을 잠근 후, 하녀는 베스의 옷에 손을 댔다. 베스는 손을 내저어 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갈아입으실 옷은 이쪽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다만, 씻는 것은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이질적인 단어에 베스의 손이 멈칫했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베스는 잠자코 등을 돌린 채 옷을 벗었다. 주머니의 브로치는 몰래 옷더미 속에 파묻었다.
간헐적으로 찰박이는 물소리가 깜빡 잠이 드는 베스를 일깨웠다. 몸속에 녹아든 약 기운은 웬만해선 달아나지 않았다.
미온한 물줄기가 몸에 부어지고, 향긋한 향유 냄새가 습윤한 공기 속을 배회하는 내내 베스는 꿈속을 헤맸다.
“아가씨, 이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욕실은 파우더룸으로 이어졌다.
허름한 간호복으로 향하는 베스의 손을 하녀가 조심스레 막았다. 하녀가 가리킨 곳엔 반듯하게 접힌 실내용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베스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번, 문을 한번 가리켰다. 잠시 그 뜻을 헤아리는 듯 고민하던 하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바로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하워드 백작님께서 곧 도착하시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나자, 베스는 몸을 감싼 타월을 풀었다. 잠시 잠든 사이 향유를 들이부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꽃향기가 진동했다.
드레스를 입으면서도 베스의 눈은 쉴 새 없이 브로치를 숨길만 한 장소를 찾았다. 아니면 브로치를 걸 수 있는 줄이라도.
하지만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장신구는 화장대 서랍을 여시면 있습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하녀의 말에 베스는 얼른 서랍을 열었다. 귀걸이며 팔찌가 가득했지만, 거기에도 브로치를 걸어 숨길만 한 줄은 없었다.
다만 머리 집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베스는 얼른 풀어헤친 긴 머리를 틀어잡아 올렸다. 묶인 머리를 집게로 몇 번 단단히 고정한 베스는 그 가운데에 작은 브로치를 집어넣었다. 집게의 보석과 맞물린 브로치는 고개를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봐도 풍성한 머리카락 덕에 파묻힌 브로치는 보이지 않았다.
베스는 잠시 제 얼굴을 바라봤다. 갓 목욕을 끝내 말간 얼굴은 전장에서보다 더 파리하고, 병색이 가득했다.
딕시가 자신을 꾸며줬을 때의 모습은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이렇게 못났는데.
“아가씨! 백작님이 오셨답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문을 열고 나간 베스는 주위를 돌아봤다.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 끝에서 하워드 백작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죽인 거나 다름없는 작자가 감히 태연하게도.
그 모습은 이십여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베스, 정신은 좀 드니? 얘기할 마음은 있고?”
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일이구나. 때마침 의사도 함께 왔는데, 더 기쁜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군.”
* *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워드는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찻잔이 쓰러졌다. 식은 찻물이 뚝뚝 테이블 모서리를 타고 떨어졌지만, 감히 다가가는 하인은 없었다.
“성대도 멀쩡하고, 정신머리도 온전한데 왜 말을 못 한다는 거야!”
“그, 그게.”
애꿎은 의사만 땀을 뻘뻘 흘리며 백작의 눈치를 봤다.
“이, 병이라는 게 마음의 문제도 매우 큰 것이라.”
“허, 마음?”
하워드는 기가 찬다는 듯 베스를 돌아보며 콧방귀를 꼈다.
“고분고분 말 듣는 흉내는 내는데 더러운 고집까지 꺾지는 않았다, 이 말이지.”
하워드의 눈살이 돌연 찌푸려졌다. 순식간에 인자한 중년 백작의 얼굴에서 막돼먹은 시정잡배처럼 인상이 변했다.
그게 하워드의 본 모습이었다.
하워드는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제 성질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시체 같은 네 어미 몸뚱이라도 지키겠다고 제 발로 기어들어 왔으면, 마땅히 네 할 일을 해야지.”
하워드는 으르렁거리며 베스의 작은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쥐었다. 새카만 베스의 눈동자가 뚫어질 듯이 그를 노려봤다.
“건방지게!”
참지 못한 손이 베스의 따귀를 날렸다.
베스는 터지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이 자리에 루카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루카가 있었다면, 필시 그 아이의 뺨이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말을 꼭 해야 하나요?”
이곳으로 온 이후, 하워드와 함께 모습을 보였던 여자였다.
저번처럼 시커먼 로브가 아닌, 고급스런 실내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누가 보기에도 명망 있는 귀부인으로 보였다.
“오, 하워드 부인. 안녕하십니까.”
“제발, 하워드 부인이라는 끔찍한 소리는 집어치워요. 적어도 이 집에서만큼은 안 듣고 싶으니까.”
여자는 냉정하게 의사의 인사를 받아쳤다.
“곧 사교 시즌이 열릴 텐데,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하는군!”
하워드가 분통을 터뜨렸다.
“데베르가 얼마나 귀신같은 놈인지 잊었어? 카시우스보다 더 미친 새끼라고! 근데, 그 새끼 옆에 구구절절 종이에 증거를 남기는 이 덜떨어진 애를 갖다 놓으라고?!”
찻잔이 벽으로 날아갔다. 찢어지는 파열음이 귓전을 때렸다.
“차라리 우리 목숨을 다 갖다 바치자고 해!”
“보아하니 올해는 글렀네.”
하워드 부인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각했는지, 욕을 짓씹으며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눈치를 보던 의사도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베스와 단둘이 남은 하워드는 잔뜩 흥분한 숨을 골랐다.
“얘야.”
그 순간, 베스의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올라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얘야.'
“잘 들으렴.”
'잘 들으렴.'
하워드의 눈이 번뜩였다.
“난 과거를 잊지 않아. 네 어미가 그렇게 된 날, 아니, 네가 그렇게 만든 날을 난 모두 기억하고 있어.”
베스의 가는 목덜미로 거칠한 손이 올려졌다. 짐승의 심줄을 끊을 때처럼, 하워드의 엄지가 맥이 팔딱거리는 지점을 꾹 눌렀다.
“또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숨을 참아도 할딱거리는 맥은 멈추지 않았다.
“말을 하렴. 이젠 베스 하워드가 될 베스 제인스야.”
* * *
결국 베스의 입술에서 단말마 같은 비명조차 듣지 못한 의사와 하워드는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
방 안은 다시 짙은 어둠에 잠겼다.
루카도 이젠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하루에 한 번꼴로 재단사와 하워드가 들어와 베스를 들볶았다. 재단사는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드레스들을 들이밀었고, 하워드는 한마디라도 뱉으라며 얼굴을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그 짓도 일주일을 채 가지 못했다.
결국 베스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하워드는 걸음을 하지 않았다.
베스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방 안에서 잠들고 깨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자의는 아니었다.
저녁 식사 쟁반엔 꼭 수면제가 들어 있었고, 그걸 먹기 전까지 하녀는 나가지 않았으니까.
베스는 비몽사몽 한 몸을 일으켜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그때,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루카에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베스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루카에게 다가갔다.
어둠에 익숙한 베스의 눈엔 금방 루카의 얼굴이 보였다. 여린 얼굴 가득 잔뜩 멍이 들어 있었고,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누가 널]
“이곳에서 이러실 수 있는 분은 하워드 백작님뿐이세요.”
베스는 펼친 손바닥을 천천히 접었다.
루카는 주섬주섬 제 바지 밑단을 접어 올렸다. 치렁치렁한 바짓단에 가려진 발목엔 가는 줄이 감겨 있었다.
“우연히 하녀 방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웠어요.”
루카는 거짓말을 했다. 지하실에서 맞다가 자신을 때리는 이의 옷에 붙은 장식 줄을 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줄이 길어서 브로치를 매달아도 옷 속에 숨기면 보이지 않을 거예요.”
베스는 멍하니 은줄을 받아들었다.
루카는 배시시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맑은 웃음이었다.
“이름값입니다.”
베스는 엉금엉금 침대맡으로 기어갔다.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사이에 숨겨놓은 브로치가 금방 손에 잡혔다. 베스는 브로치를 손에 꽉 쥔 채 루카의 반대편 벽으로 다가가 기댔다.
무릎을 세워 브로치를 쥔 손을 숨긴 베스는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그 미소를 본 루카가 따라 활짝 웃다가, 찢어진 입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베스는 눈을 감았다.
말해야 해. 말해야 해.
입술을 벌리고 숨을 세게 내뱉었다. 희미한 숨소리만 나올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베스는 브로치의 뾰족한 부분으로 힘껏 손톱 밑을 찔렀다. 번쩍 드는 정신과 함께 다시 한번 목에 힘을 줬다.
이번에도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브로치는 사정없이 손톱을 파고들었다.
베스는 그렇게 밤이 새도록 손톱 밑을 찔러댔다.
날이 밝고, 또 날이 저물고.
루카가 하녀에게 끌려나가고, 또 잔뜩 얻어맞은 채 돌아오고.
끔찍하고 지루한 나날들 내내 베스는 브로치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내려놓던 하녀가 피범벅이 된 베스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랄 때까지, 베스는 멈추지 않았다.
말해야 해.
말해야 해.
베스는 쉬지 않고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