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라프넬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갑작스런 황제의 전갈에 급하게 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무엇하나 제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날들의 연속인데 황제와 아침부터 마주 봐야 한다니.
“또 어떤 쓸데없는 얘길 하시려고.”
황제가 제 이복동생들을 식사 자리에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데베르가 군대장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던 폭풍 같은 저녁 식사를 마지막으로 황제는 라프넬에게 인사치레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종종 벨을 통해 황제와 아더가 자리를 같이했단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아더는 쓸모 있다 여기나 보지.”
멍청하긴. 라프넬은 붉게 칠한 입술 끝을 손톱으로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넥서스엔 만개한 봄이 도래했다. 시리던 겨울 끝에 찾아온 꽃눈을 모두 반가워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봄을 반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봄이 온다는 것은 곧 넥서스의 사교 시즌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모두 그곳에서 짝을 찾고, 겨울이 다시 오기 전에 결혼하리라.
“손 치워.”
공주의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려던 하녀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라프넬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어깨를 털어냈다. 하얀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스쳤다.
황제가 왜 미워해 마지않는 자신을 부를까.
그래, 어쩌면 그 얘길 꺼내려고 부르는지도 모르지.
아니, 맞을 것이다. 황제가 제게 기대하는 건 그것뿐이니까.
“라프넬, 왔구나.”
황제 호이든은 평소와 달리 편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그 곁에 자리한 아더 또한 각 잡힌 슈트가 아닌, 신사들의 스포츠용 셔츠를 입고 있었다. 창을 통과한 노란 아침 햇살까지 맞물려 겉보기엔 그저 평화로운 아침 식사 자리를 연상케 했다.
정말 가족이랑 식사라도 하는 것 같아, 라프넬은 쓴웃음을 삼켰다.
“폐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가족끼리 함께 하는 아침 식사일 뿐이란다. 앉으렴.”
“네.”
호이든은 길 가는 개에게 적선하듯 제 이복형제들에게 다정함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건 어쩌면 선대 황제인 제 아비를 보고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선대 황제가 그 적선으로 많은 여인을 목말라 죽게 했듯이, 그의 아들은 그의 형제를 죽게 만드는 것이라고 라프넬은 생각했다.
“오랜만이네.”
라프넬은 나이프를 놀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더의 손이 뚝 멈췄다가 이내 슬며시 움직였다.
아더는 라프넬의 와인잔을 치우고, 빈 잔에 주스를 채웠다.
“아침부터 무슨 와인이야.”
그 말에 이번엔 와인을 들이켜던 호이든의 손이 멈췄다. 아더의 눈은 채워지는 주스 잔에만 고정돼 있었다.
묵묵히 주스를 따르던 아더는 다시 제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슬쩍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호이든이 입을 뗐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교 시즌을 보겠구나. 다들 짝을 찾을 준비는 하는 거니?”
그는 짐짓 태연한 척 라프넬을 바라봤다.
“데베르와 진척이 있긴 한 거냐, 라프넬?”
역시나.
라프넬은 한숨을 내쉬며 더 자를 것도 없는 고깃덩이를 조각냈다.
“요즘 브리틴과의 군수 무역 협정으로 바쁘다고 하시네요.”
“남자는 아무리 바빠도 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법이다. 일 핑계처럼 손쉽고 쓸데없는 변명이 없지.”
“…그러게요. 아버지도 그러셨죠.”
“라프넬.”
아더가 라프넬의 말을 끊었다.
고작 세 명이 앉기엔 지나치게 큰 식탁 사이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더는 제 형의 눈치를 봤다. 자신과 닮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지만, 넥서스의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그리고 호이든은 제 이복동생들과 다르다는 이질감을 못 견뎌 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체하는 자였다.
“듣자 하니 데베르에게 여자가 있다던데. 알고 있니?”
답을 묻는 호이든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상대의 약점을 눈치챈 자의 기만이었다.
“나도 소식지를 통해 들었지.”
“폐하께서 그런 황색지를 믿으실 줄은 몰랐네요.”
“너도 꽤나 그 소식지를 애정한다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았나 보구나.”
라프넬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처럼 붉던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작은 이에 힘을 줬다. 할 수만 있다면 호이든의 귀라도 뜯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제 거처에도 폐하의 눈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눈뿐이겠니.”
호이든은 비식거렸다.
“눈뿐만 아니라, 귀, 입, 다리 다 있지. 알다시피 난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아더처럼 전장을 휩쓸지도 못하고, 너처럼 미색이 뛰어나 뭇사람들을 홀리지도 못하잖니.”
호이든은 마른 손을 들어 커다란 제 귀를 가리켰다.
“잘 듣고, 빠르게 처세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는 길이지. 나의 넥서스이자, 나의 궁이잖니.”
아더와 라프넬의 얼굴이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짓하지 마라.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쏙 빼닮은 너희 둘이 데베르 곁에 있는 게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구나.”
호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못 볼 것을 보는 양 질색한 표정이 언뜻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기억해라. 우린 어쨌건 피를 나눈 황가이지만, 그는 그저 이방인인 뿐인걸. 언제든 우리에게 칼끝을 겨눌 수 있어. 하긴, 그 막돼먹은 새끼는 칼이 아니라 총구를 들이밀겠지만.”
한번 고삐가 풀린 호이든의 언사는 거침없었다.
“감히 군대장을 하느니 마느니 지껄여? 어림도 없는 소리. 클리프가의 뼛가루까지 갉아 쓰기 전엔 그놈은 죽지도 못해.”
클리프가의 군수 물자 지원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장 사임 건을 승인한 호이든은 분을 참지 못했다.
빈 와인잔을 쥔 호이든의 손이 옅게 떨렸다.
“다음 전쟁이 터지기만 하면, 그놈은 황제의 특별권을 써서라도 선봉으로 세워 버릴 거다. 그러니 라프넬! 그놈이 죽기 전에 네가 클리프 부인이 돼야 한단 말이다. 알아듣겠니?!”
커트러리를 손에서 완전히 놓은 라프넬은 제 치맛자락 위에 양손을 포갰다. 항상 야망으로 반짝이던 눈동자 빛이 어딘가 죽어 보였다.
“…알아요.”
“넌 포부가 큰 아이란 걸 내가 진즉부터 알고 있지. 넥서스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되고 싶은 것 아니니?”
대번에 제 속내를 말하는 호이든에 라프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요.”
“우리가 모두 한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애를 좀 써보렴.”
애를 써보라는 질책 섞인 당부에 아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국 데베르의 결정이 모든 걸 결정하는군요.”
여태 잠자코 있던 아더가 호이든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잔의 반을 훨씬 웃돌게 따른 와인이 넘실거렸다.
“폐하와 공주의 목표가 모두 공작의 손에 달려 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넌…!”
그때, 멀리 서 있던 황제의 집무대리인이 다가왔다. 황제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황제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벌써 도착했다고?”
“예, 폐하. 예상보다 아침 식사가 길어지셨습니다.”
“크흠.”
호이든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자리에 내던진 냅킨이 먹다 남은 접시에 닿아 얼룩졌다.
황제를 따라온 일행이 우르르 소란스럽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황제의 동행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아더와 라프넬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식당 안에 둘만 남고 나서야 라프넬은 입을 열었다.
“답지 않게 내 편을 들어서 황제 눈 밖에 나?”
“네 편 든 적 없어.”
“그럼 데베르 편을 든 거니? 정말 친우라도 돼서?”
“데베르와 난 열다섯부터 친우야.”
“웃기지도 않아.”
라프넬은 대차게 비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아더도 이번엔 말리지 않았다.
“술 자주 마시니?”
“이틀에 한 번 정도.”
“...조심해.”
“술이 위로만 돼준다면야 매시간 마실 수 있어.”
아더는 가슴이 답답한지 목을 옥죄는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데베르와 결혼은 다시 생각해. 희박한 가능성에 도박해서 너를 갉아먹지 마.”
“황제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나의 포부가 데베르와 닿아 있다는걸?”
“그의 부인이 되는 게 가장 높은 여인으로 향하는 길은 아니야.”
“그럼 다른 수를 내게 말해줘, 아더.”
라프넬이 식탁에 턱을 괴자, 갸름한 턱을 타고 금발 머리가 흘러내렸다. 꼭 그림 속의 아름다운 여인처럼 굳은 라프넬은 입술만 작게 벙긋거렸다.
“황후라도 되게 하던지.”
“그게 무슨!”
“그러면 데베르 클리프 따위, 베스를 찾아 첩첩산중으로 떠나건 미쳐버리건 신경 안 쓸 테니까.”
아더는 말문이 막혔다. 차마 넥서스의 황후냐는 물음은 나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잊은 줄 알았던 베스의 이름까지 그 입에서 나오다니. 아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프넬은 아더에게로 기울인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놀래? 가장 높은 여인이 황후라는 건 어린애도 알아. 난 그저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야.”
“네가 내 동생이라고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라프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일하게 제 속마음을 알아주는 이복오빠를 향한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우리가 정말 피를 나눈 형제라고 확신해? 우리가 정말 닮았다고? 글쎄.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곱게 접은 냅킨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앞으로도 날 여동생으로서 아껴줘. 부디 앞길은 막지 말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라프넬은 문가로 걸어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문득 멈추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넌 군복보다 그게 어울려. 날도 좋은데 나가서 사교 시즌 파트너라도 찾아봐. 나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없을 테지만.”
라프넬은 활짝 웃었다. 아더에게만 보여주는 웃음이었다. 비웃음이나, 다른 수 따위 없는 진심 섞인 웃음.
몇 걸음, 아더를 보며 뒷걸음하던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았다. 나풀거리는 금발 머리가 봄바람에 휘날렸다.
아더는 작아지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라프넬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적처럼 웃었다. 저 웃음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창을 모두 열어.”
그의 손짓에 시종들이 빠르게 너른 식당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높은 층고만큼 뻗어 올라간 창이 활짝 열리자, 바람에 흔들리는 꽃가지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쓸쓸한 식당 안으로도 흩날리던 연분홍빛의 꽃잎이 날아 들어왔다. 제법 훈기가 느껴지는 바람을 맞으며 아더는 눈을 감았다. 시리고 매섭기만 하던 전장과 같은 바람이라 믿기지 않았다.
“봄이구나.”
겨울이 갔다.
하지만 어쩌면 더 매서운 겨울이 닥쳐오는데 봄이 왔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두려워했던 그 물음을 아더는 홀로 남은 지금에서야 속삭였다.
“봄이 기어코 왔구나.”
모든 게 조금씩 엇나간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