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63화 (63/206)

63화

데베르의 손에서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미처 서재 테이블에 닿기도 전에, 열린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종이를 잡아챘다.

데베르는 그저 소식지가 겨울바람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다.

“번트에서의 휴식은 평안하셨습니까.”

소식지를 가져온 집사 올리버가 물었다.

“네.”

데베르는 가볍게 답했다.

서무를 보는 테이블은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밀린 업무 서류로 가득했다.

펜촉이 예리하게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적막한 서재에 퍼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필시 소식지를 먼저 읽었을 올리버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그의 젊은 주인은 태연하게 답했다.

“누가 본들 소식지가 주인님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죠.”

집사는 침묵했다.

“적어도 어디서 보더라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분을 말입니까?”

“이전에 부탁한 건 마무리 지으셨나요?”

데베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간단히 셔츠만 입은 공작의 모습은 바깥에서보다 한결 느슨해 보였다.

소식지의 천박한 가십과 별개의 인물인 양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태연자약한 표정만 보노라면, 집사조차도 가십지의 이니셜이 데베르가 아닌 다른 이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네. 때마침 오시기 직전에 가구가 모두 도착했습니다.”

“보죠.”

데베르의 걸음이 오랜만에 침실로 향했다. 제 목덜미를 주무르는 손에 악력이 실렸다.

번트에서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서류를 들썩이다 소파에 잠시 기대거나, 목욕을 하며 잠시 욕조에 누워있는 게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그의 걸음에 맞춰 침실 문을 열었다.

데베르는 잠시 멈춰서 침대 옆에 걸린 군복 재킷을 바라봤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통로를 여세요.”

데베르는 고개를 돌려 부인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리켰다.

카시우스가 있을 적엔 공작과 공작부인이 서로 오갈 수 없도록 거대한 판자로 못질이 되었던 복도였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데베르의 걸음이 닿은 적 없는 곳이기도 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여 사용인들에게 문을 열라 지시했다.

“오랜 기간 막힌 곳이라 시공을 새로이 했습니다.”

집사의 말대로 데베르가 번트로 간 사이, 못질이 사라지고 마감이 새로 된 복도에서 나무 냄새가 풍겼다.

“마음에 드십니까.”

데베르의 시선이 느릿하게 방을 훑었다.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부인 방이었다. 어쩌면 이곳 또한 제 걸음이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나무 골조로 이루어진 공작 방과 달리, 부인 방은 이 저택의 모든 빛을 끌어다 부은 것처럼 환했다.

너른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새하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가 방을 더 환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티 테이블부터, 화장대, 옅게 풍기는 꽃 향까지. 어둠이 제 것이라도 되는 듯 구는 클리프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색상은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군데군데 보이는 연하늘빛이 방을 더 온화하게 보이게 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조한 칭찬이었지만 집사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다만.”

창가로 걸어간 데베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내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인위적인 향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네요.”

“주의하겠습니다.”

데베르는 창 밑을 내려봤다.

'올라가기엔 좀 높다.'

'내려와 줘.'

딱 이만큼의 높이였다. 격리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베스에게 내려와 달라 약한 체를 하고, 등을 내보이며 그 마음을 흔들어보려 애썼던 것이.

데베르는 뻐근한 목덜미를 다시 한번 쥐었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이젠 칼로 찌르듯이 머리를 후벼팠다.

“드시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는 ‘약을’이란 주어를 생략한 채 물었다.

데베르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창턱에 걸터앉았다. 충혈된 눈동자는 건조한 바람에 쓸려 더욱 붉어졌다.

“이 방의 주인이 곧 올 겁니다.”

고집스럽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때까지 방을 잘 관리하세요.”

방을 나서며 데베르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방 안의 풍경이 그의 눈에 담겼다. 데베르는 그게 마치 잃어버린 베스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래도록 바라봤다.

“클리프 부인은 어떻게 지냈죠?”

“선대 클리프 부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집사는 서둘러 입을 뗐다. 단 한 번도 제 어머니의 존재에 관해 묻지 않았던 데베르였기에, 잔뼈가 굵은 집사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일찍 돌아가셨지만, 생전엔 감히 황후 폐하보다도 아름다운 분이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게 곧 넥서스 여인들의 유행이 되었지요. 미감이 탁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가요.”

애틋함 따위는 묻어나지 않는 건조한 중얼거림이었다.

데베르는 기억 속 베스의 행색을 더듬었다. 제 친구의 옷을 빌려 입었을 때 빼곤 노상 낡아빠진 간호복만을 입고 있던 여자였다.

베스와 미감이라.

데베르의 입술 새에서 오랜만에 진심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집사와 사용인들은 조심스레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아, 잠시 생각난 게 있어서.”

데베르는 입술 끝을 매만지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돌아서는 클리프 공작의 걸음은 처음보단 한결 가벼웠다.

“클리프 부인의 격에 맞을 법한 옷과 장신구들도 채워 넣으세요.”

* * *

“몸에 뭐 숨겼는지 확인해서 데리고 나와!”

남자의 윽박에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소년이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남자는 베스가 제 뜻대로 굴지 않을 때마다 소년을 구타했다. 몇 번이고 남자를 할퀴고, 이도 저도 안 되면 벽에 제 머리라도 부딪히던 베스도 결국엔 무릎 발로 기어가 빌 수밖에 없었다.

제발 소년을 때리지 말아 달라고.

자신은 몇 번이고 아플 수 있었지만, 어린 소년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무자비한 폭력을 견디는 건 볼 수 없었다.

낡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서야, 소년은 비척비척 베스에게로 다가왔다. 몸을 만지려는 손짓에 베스는 한걸음 물러났다.

“저는 여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확인만 하겠습니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머리가 짧고 비쩍 말라 언뜻 보면 소녀보단 소년에 가까운 아이였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베스의 목부터 어깨, 갈비뼈 아래까지를 손으로 훑었다. 그러다 베스의 골반 근처에서 손이 멈췄다.

소녀의 손이 원피스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어 나온 건 넥서스 문양이 새겨진 금 브로치였다. 소녀는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봤다. 텅 빈 눈으로 그걸 보던 소녀는 다시금 베스의 주머니 속에 브로치를 넣었다.

“들키지 마세요.”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베스는 자신보다 조금 큰 키의 소녀를 마주 봤다. 열차 안에서 베스를 발견한 소녀는 지금까지 함께였다. 남자가 붙인 눈인 모양이었다.

“눈을 가리겠습니다.”

소녀는 눈을 가린 베스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없어?!”

소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우악스런 손길이 베스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

찝찔한 손맛과 함께 씁쓸한 맛이 났다. 뱉어내려는 베스의 입을 틀어막은 손은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손을 쥐어뜯던 베스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베스는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 애썼다.

벽에 머리라도 박아볼 요량으로 몸을 흔들었지만,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풀썩 맥없이 침대로 쓰러지는 베스의 주위는 어둡기만 했다.

지난한 나날이었다.

남자가 왔다 간 뒤, 다시 눈을 가린 베스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이전의 후미지고 곰팡내 나던 지하실과는 달랐다. 침대는 푹신했고, 침구에선 좋은 향이 풍겼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끔찍하긴 매한가지였다.

남자는 하루에 한 번꼴로 와 베스가 제 뜻에 따르도록 종용했고, 베스는 머리통으로 남자의 코를 박거나 손에 쥔 펜으로 남자의 손등을 찍었다.

하지만 그 반항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가 다시 소녀를 끌고 왔으니까.

'넌 어릴 때부터 너 때문에 망가지는 꼴을 봐야 정신을 차렸지.'

남자는 소녀를 때렸다. 이전보다 한층 더 포악해진 몸짓이었다.

베스는 뭐든 하겠다며 고개를 주억이며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저 대신 다치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으니까.

'네가 하기에 달렸어. 네 어미와 이 애를 살릴지 죽일지는.'

남자는 그날 이후 오지 않았다. 대신 은쟁반에 담긴 약이 도착했다.

그 약만 먹으면 졸음이 밀려왔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판단은 흐려졌고, 날짜개념도 사라졌다.

몇 번인가 약을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던 베스도 소녀가 처음으로 ‘쟁반이 비워지지 않으면 제가 또 맞습니다’라고 속삭이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베스는 몇 번이고 약을 삼키며 다짐했다.

약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야.

내 생각이 나를 죽이는 거야.

난 벗어날 거야. 틈을 놓치지 않을 거야.

까무룩 잠이 들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정신을 차린 어느 날 밤, 처음으로 방 안 램프에 불이 붙었다. 베스는 그 작은 빛이 너무도 귀해 한참이고 그 동그란 불빛을 바라봤다.

침대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앉았다. 멀찍이 앉아 있는 소녀에게 손짓하자, 쭈뼛거리던 소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름이 뭐니?]

오랜만에 쓰는 글씨에 손이 덜덜 떨렸다. 약 기운 탓인지도 몰랐다.

“이름….”

소녀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작은 부리 같은 입술이 우물쭈물 답을 뱉었다.

“없어요.”

베스는 잠시 멍하니 소녀를 바라봤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 그제야 영악한 남자가 왜 이 아이를 제게 붙였는지를 깨달았다.

내 죄책감을 자극해 원하는 걸 얻겠다는 거구나.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줄까?]

“이름을요?”

늘 공허하던 소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베스의 입가가 떨렸다. 미소 짓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기력은 바닥이었지만, 소녀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야.

[루카]

“...뜻이 있나요?”

처음으로 제 또래다운 호기심이 비치는 물음에, 베스는 자꾸만 거꾸러지는 펜을 힘주어 잡았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라고]

“루카….”

[어디에도 속박되지 말고 날아가라는 뜻의 이름이란다]

몇 번 “루카”를 중얼거리던 소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아요. 루카….”

위태롭게 흔들리는 램프 불빛에 ‘루카’라는 글자가 일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