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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62화 (62/206)

62화

“세상에, 오늘에서야 그이가 번트로 갔단 소식을 들었지 뭐예요.”

영애 한 명이 분통을 터뜨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찻잔을 쥐었지만, 발그레한 얼굴에 물든 모멸감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티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영애가 얼른 제 친구를 위로했다.

“설마, 이든 남작님이 허튼짓하실까요?”

“번트라구요. 그 번트.”

번트.

라프넬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데베르의 저택 앞에서 당했던 수치를 떠올렸다. 하지만 다른 영애들이 보기에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얌전한 얼굴의 공주였다.

“사실, 제가 예전부터 그이 옆에 늘 붙어 다니는 운전사와 작은 거래를 했거든요.”

은밀한 목소리였다.

라프넬도 이 얘기는 조금 흥미로운지, 고운 아치 모양의 눈썹이 가볍게 들썩였다.

“남작이 어디 허튼 곳에 가면 내게 알려달라고요.”

“세상에!”

누군가의 탄성에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남에게 말하기엔 부끄러운 얕은 수긴 했다.

“어, 어머니께서 다른 부인들도 제 남편에게 심복 하나쯤은 붙여놓는다고 그러셨어요.”

라프넬은 열심히 변명하는 영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아비는 호색한으로 유명한 자였다. 어머니의 조언 아닌 조언도 이해가 가는 참이었다.

“그래서.”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라프넬이 입을 뗐다.

순식간에 티 테이블의 관심이 공주에게로 쏠렸다.

“데베르의 영지로 초대된 손님들이 번트 보호구역이라도 갔다, 이 말인가요?”

‘데베르’에 약간 힘이 들어간 질문에 티 테이블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둘러앉은 영애들이 저들끼리 얼른 눈짓을 주고받았다. 라프넬은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공작이란 호칭을 떼고 데베르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넥서스에 많지 않았다. 라프넬 또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데베르 공작, 혹은 클리프 공이라 불렀다.

하지만 사사로운 자리에서 처음으로 데베르의 이름을 온전히 부른 저의를 그녀들은 모르지 않았다.

이제 확실히 하려는 것이다.

데베르의 부인이 될 사람은 자신이고, 이젠 저도 그에 대해 어느 정도 권한이 있다는 것을.

졸지에 공주 앞에서 데베르의 흉을 보게 된 영애의 안식이 파리해졌다.

“고, 공작님이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이든 남작님은 가셨다고 하네요….”

“저런.”

라프넬은 정말 안타까운 듯 그 말을 한 영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영애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적당한 공감이나 위로를 사려 뱉은 말이었는데, 졸지에 제 약혼자의 못난 꼴만 보인 참이었다. 그와 결혼을 앞둔 자신 또한 꼴이 우스워지긴 매한가지였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건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

“그렇죠….”

무언가 더 뱉으려던 영애는 입을 다물었다. 삐죽이는 입꼬리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차마 공주에게 대거리를 할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라프넬은 남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 입에서 나오려던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 알만해서.

아마 제가 없는 자리에서 수군덕거리겠지. 공주의 출생을 모르지 않는데, 감히 정부인의 적녀인 자기들 앞에서 아내의 덕을 운운한다고.

하지만 감히 제가 있는 데에선 결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라프넬이 권력을 사랑하는 이유였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을 수 있고, 누구든 발아래에 둘 수 있고.

“꽃이 참 아름답죠.”

화제를 옮기는 라프넬의 한마디에 대번에 찬사가 쏟아져나왔다.

온실 정원의 유리 천장을 둥글게 감싼 분홍빛 등나무는 종전 후 첫 연회를 열던 때와 또 달라져 있었다. 바닥 곳곳에 뿌려진 꽃들 또한 외국에서 들여왔는지 못 보던 것이었다.

천장을 둘러보던 라프넬의 푸른 눈동자가 끝없는 찬탄에도 제 찻잔만 보고 있는 아이네스에게로 향했다.

고운 드레스를 입고도 아이네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아이네스.”

“네? 으, 응?”

저를 부를지는 몰랐는지 퍼뜩 고개를 든 아이네스가 말을 더듬었다. 이내 입꼬리를 올려 공주에게 미소 지었지만, 라프넬은 웃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얼굴이 어둡네.”

“무슨 일이라니.”

아이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어요. 곧 결혼을 앞둔 영애께서 이리 얼굴이 어둡다니. 무슨 일 있으세요?”

“설마, 그 사이좋은 두 분께서 다툼이라도 하셨나요?”

“게일 백작님이 화를 내시는 건 상상이 안 되네요. 호호.”

적절한 가십을 문 영애들이 이번엔 아이네스를 물고 늘어졌다.

“앗, 아니에요. 결혼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어요. 백작님도 재활에 힘쓰고 계시고.”

아이네스는 찻잔 끝을 만지작거렸다.

라프넬은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뭐 때문일까요?”

“그러게요. 영애께서 지참금이 부족한 것도 아니실 테고.”

“결혼하시면 웨인엔 계속 계실 건가요?”

이어지는 멍청한 질문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라프넬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운 장신구들을 들였는데 괜찮은 물건인지 모르겠어요. 영애들께서 함께 봐주시겠어요?”

확인하기엔 지금이 적기다.

라프넬은 근처에 선 하인에게 손짓했다.

“영애들을 안으로 안내해드려.”

가십을 옮기기란 너무도 쉬웠다.

넘쳐나는 공주의 사치품을 구경할 생각에 잔뜩 들뜬 영애들이 차례차례 온실 정원을 빠져나가자, 라프넬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아이네스에게 다가갔다.

“아이네스, 내 친구야.”

달콤한 부름이었다.

“무슨 일 있니? 내게만 말해주렴.”

“라프넬….”

식어 빠진 찻잔을 쥔 아이네스는 아름다웠다. 라프넬은 이 지나치게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제 친구를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지를 절감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표정은 흉내 내지 못할 테지.

“결혼과 관련된 문제니?”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프넬은 물었다.

이렇게 조금씩 가려운 부분을 갉작여 주면, 순진한 제 친구는 결국 실토하리라.

“라프넬, 혹시 저번에 전방 병원에 왔을 때 기억나?”

“응? 몰리 부인의 병원 말이니?”

이렇게 말이다.

“응. 거기에 있던 내 친구인데, 간호학교 수석이라고 했던.”

“음,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

“머리카락은 새카만 검은색이고, 하얗고, 또….”

말끝을 흐리던 아이네스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말을 못 하는 친구 말이야….”

“아.”

그제야 생각난 듯 라프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에게 큰일 날 뻔한 친구 아니니?”

“맞아! 베스! 기억하는구나!”

대번에 밝아진 아이네스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사실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니?”

“갑자기 사라졌어. 그것도 웨인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

“그래?”

라프넬은 아이네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위로에 힘입었는지 처음엔 망설이던 아이네스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이상해. 갑자기 사라진 것 하며, 지금까지 소식 하나 없다는 게. 콜린스 교수님이 함께 찾고 계신대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니?”

“혹시 다른 군인과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거 아닐까?”

“그건 아니야!”

앗, 아이네스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남자와 도망갔다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내지른 거였다. 아무리 라프넬이라도 베스를 욕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랑의 도피라니. 베스는….

간호 숙소를 쳐부술 듯이 들이닥쳤던 데베르 공작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공주 앞에서 베스와 공작을 함께 떠올리는 게 불경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는 없어. 다른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라프넬, 혹시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베스를 수소문해 줄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저 귀족보다는 황족이니까-”

“아이네스.”

라프넬은 단호한 목소리로 아이네스를 일깨웠다.

“고작, 아니, 네 친구. 일개 간호사인 출신도 불분명한 네 친구를 찾기 위해 넥서스 황가의 권력을 사용하는 게 옳다고 보니?”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리고 나는.”

라프넬은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뜨며 처연한 기색을 내비쳤다. 한풀 꺾인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내가 이 황가에서 무슨 힘이 있겠니. 고작 정원 따위 꾸미는 게 전부인걸. 다들 날 우습게 여기는 걸 알아.”

“아니야, 라프넬! 무슨 말이야, 그게!”

“미안. 나도 네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구나.”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라프넬, 날 봐.”

아이네스는 눈물이 어룽거리는 라프넬의 두 뺨을 쥐었다.

“신경 쓰지 마. 베스도 사정이 있으니 그렇겠지. 곧 소식이 들려올 거야. 내가 걱정이 지나치게 앞섰어.”

끝까지 베스, 베스.

라프넬은 유일하게 걸리는 그 이름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방으로 가 있을래? 나는 조금만 마음을 추스르고 뒤따를게.”

“알겠어. 얼른 와.”

아무도 없는 티 테이블에 홀로 남은 라프넬의 곁으로 벨이 나타났다. 그녀는 공주가 있는 곳이면 언제든 그림자처럼 함께였다.

“공주님, 소식지가 날아왔습니다.”

벨이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데베르가 돌아오니 전할 만한 가십이 생긴 건가.”

재빠르게 소식지를 낚아채는 손길엔 아까 전의 먹먹함이라곤 온데간데없었다.

라프넬은 소식지를 빠르게 훑었다.

소식지는 넥서스의 황색지였다. 힘깨나 있는 귀족의 가십이나, 그들의 은밀한 뒷돈 얘기들이 주를 이뤘다. 아닌 척해도 넥서스의 여론을 만드는 게 바로 이 소식지였다.

명실상부 이 소식지의 단골 주인공은 데베르 클리프였다.

전쟁이 있는 동안은 상대적으로 뜸하던 소식지도, 그가 웨인으로 돌아온 기점부터는 활발하게 발행됐다.

아니나 다를까.

첫 면에 자리 잡은 데베르의 이니셜을 보는 라프넬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그분께서 번트 보호구역까지 가셔서 전장에서 만난 천한 애인을 찾으셨다는구나. 그 여인은 넥서스 어느 보호구역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네.”

불쌍하고 멍청한 데베르.

“다들 이젠 보호구역에서 그 애를 찾으려고 난리겠네. 그 애를 빌미로 데베르의 눈에 들려는 작태들이 벌써 눈에 뻔히 보여. 그 한심한 작태들이.”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라프넬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잔뜩 성질을 부릴 줄 알았는데, 어딘가 만족한 공주의 모습에 벨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그럼 괜찮고말고.”

베스 제인스가 사라졌다니.

그것도 콜린스 공작도, 아이네스도, 심지어 데베르조차 찾지 못하게 꼭꼭 숨어버렸다니.

“그 애가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라프넬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꽁꽁 얼어 있는데, 그녀의 온실 정원엔 이른 봄꽃이 만개해있었다. 하얀 손이 꽃망울을 건드리자 파르르 떨리는 꽃잎이 사랑스러웠다.

“봄이 오는구나.”

하지만 그 꽃조차 라프넬의 입술보다 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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