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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61화 (61/206)

61화

베스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밀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희미했다.

며칠이 지난 건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심지어 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안대에 눈이 가려진 베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몇 번이고 거세게 벽에 부딪혔지만, 돌아오는 건 저를 벽 옆으로 끌어내는 손길뿐이었다.

분명, 이 공간엔 다른 사람이 있다.

그 손은 때가 되면 먹을 것을 입에 들이밀었고, 손이 묶인 베스가 격한 행동을 할 때면 제지하는 역할을 했다.

열차에서 내리고 꽤 오래 차를 탔다. 눈을 가린 채였기에 부드러운 시트의 촉감과 희미하게 맡아지는 향수 냄새가 유일한 단서였다.

이곳이 넥서스이긴 한 걸까.

그 순간,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뚝 멈췄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앞에 누군가 와 있었다. 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성질은 좀 죽었나?”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안대 풀어.”

베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에 흠칫 몸을 물렸다. 고개를 연신 틀어댔지만, 눈을 가린 안대는 손쉽게 풀렸다.

갑작스런 빛에 베스는 눈을 잔뜩 찌푸렸다. 번지는 빛줄기 사이로 뭐라도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릴 때마다 묵직한 두통이 저를 눌러왔다.

“베스 제인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엔 중년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희끗한 머리와 적당히 주름진 눈이 언뜻 인자해 보이기도 했으나, 그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눈동자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

그 독사 같은 눈동자를 베스는 기억했다.

“기억하나 보군. 벌벌 떠는 걸 보니.”

남자는 가볍게 일갈하며 베스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때는 이름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름은 네가 선택한 건가?”

그 말을 마친 남자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무언가 잊었다는 손짓이었다.

“말을 못 한다는 걸 잊었군. 손 풀고 펜이라도 쥐여줘.”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명령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명령에 이내 누군가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소년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한 번에 알기 어려워 묘한 느낌을 주는 소년은 아직 앳된 티가 났다.

베스는 제 손을 푸느라 잠시 닿은 손에서 지금껏 저를 먹이고, 챙긴 이가 이 소년임을 알아챘다.

며칠 만에 자유로워진 베스의 손에 엉거주춤 펜이 들렸다.

“눈에 독기가 아직 안 빠졌군.”

남자는 쯧, 혀를 차더니 손에 낀 가죽 장갑을 벗었다.

툭. 고작 장갑 하나를 바닥에 던진 것뿐이었으나, 상대를 겁주는 것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베스는 남자를 노려봤다.

“베스의 일을 베스가 물려받는다, 라. 꽤 그럴듯해.”

남자는 입술을 삐죽였다.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에 상대를 향한 멸시가 드러났다.

“네 어미의 안부는 내가 잘 확인했어.”

베스는 그 말과 동시에 손에 들린 펜촉을 칼날처럼 겨눠 남자에게 집어던졌다. 이 정도의 도발은 예상치 못했는지, 끝이 뾰족한 펜촉이 남자의 볼 한쪽에 길게 자국을 남겼다.

“제기랄!”

가느다랗게 그인 실금에서 천천히 피가 새 나왔다. 미세한 양이었지만 남자를 도발하기엔 충분했다.

거센 마찰음과 함께 베스의 고개가 구석으로 돌아갔다. 뺨을 맞은 것뿐이지만, 한쪽 귀와 머리통까지 울려댔다.

베스는 비명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성질머리하고는!”

남자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올라갔다.

휙- 하는 바람 소리에 베스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그만 해요.”

다른 목소리였다.

열기 오른 손이 지척에서 느껴지는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베스와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걔를 데려온 이유가 그 여자를 닮아서인데, 얼굴을 때려서 쓰나요.”

방으로 들어선 목소리의 주인이 로브를 벗었다. 남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였다.

“네가 베스니? 우리 둘 다 초면이구나.”

여자의 말투에서 미약한 브리틴 억양이 묻어났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해요.”

여자는 이곳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도 않다는 듯, 문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마뜩잖은 눈길로 보며 잔뜩 찌푸린 턱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그 매서운 눈은 다시 베스를 향했다.

“데베르 클리프와 꽤 가깝게 지냈다지?”

남자는 위협이라도 하는 듯 제 커다란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베스의 눈이 흔들림 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아주 쉬워. 전장에서처럼. 그때처럼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어미가 그랬듯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는 베스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을 몇 번 깨물더니 이내 퉤, 하고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 빌어먹을….”

남자는 여전히 문가에 선 여자를 의식하는지 또 뺨을 때리진 못했지만, 제 얼굴에 붙은 침을 닦아 내리는 손은 덜덜 떨렸다.

철썩.

“억!”

발작하듯 일어선 남자는 옆에 선 소년의 뺨을 때렸다. 남자보다 훨씬 작은 소년의 몸뚱이가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남자의 무자비한 구둣발이 쉴 새 없이 웅크린 소년을 내리찍었다.

베스는 몸을 꿈틀거렸지만, 허벅지와 발이 의자에 묶인 탓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몸을 묶은 밧줄의 매듭도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감히! 어디서 대거리를 해!”

몇 번 바르작거리던 소년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베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벌벌 떨리는 입술 새로 간헐적인 숨이 터져 나왔다.

“네가 저렇게 만든 거란다.”

여자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질타했다.

“네 건방진 행동이 낳은 결과를 보렴.”

소년의 입에서 묽은 물이 흘러나왔다. 어두컴컴해 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피란 것은 분명했다.

“이젠 너도 대화할 생각이 생겼겠지.”

남자가 씩 이빨을 드러내며 바닥에 던져진 펜을 다시 주웠다. 베스는 제 손에 쥐어진 펜을 멀거니 내려봤다.

“그럼, 구면끼리 얘기 좀 할까.”

* * *

데베르는 새벽 미명이 밝기도 전에 성을 나섰다.

지난밤, 그의 손님 중 성으로 돌아온 이는 반도 되지 않았다. 다들 번트 보호구역 골목 어딘가에 나자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공작님,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손님들을 데려올 이들을 붙일까요?”

“괜찮습니다. 다들 체면 차리는 이들이라.”

데베르는 친우들의 면을 챙긴다는 간편한 핑곗거리를 댔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던 연회장은 이제 막 치워진 참이었다. 하지만 사용인들의 눈앞에 서 있는 데베르는 그런 진흙탕 같은 파티는 알지 못한다는 양 말끔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웨인에 도착한 직후보다 더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웨인에서 다른 손님이 찾아오거든, 클리프 공작은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린다 전해주시고요.”

셔츠의 커프스를 채우며 그가 말했다.

“저도 위신이란 게 있는데, 새벽 댓바람부터 보호구역에 가 있다는 것보단 낫겠죠.”

슬렁슬렁 말하며 겉옷을 챙겨 들었다.

“혼자 갑니다.”

문 앞에 대기하던 운전사의 손에서 차 키를 뺏은 데베르는 빠르게 성을 벗어났다.

단 한 번 가본 게 전부인 번트 보호구역이었지만, 이젠 모든 게 생생했다.

데베르는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을 주먹 쥐어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 노파가 정말 그 엘리젯 바머일까.

어쩌면 그곳에 베스가 있진 않았을까.

돌아간단 곳이 고작 그따위 곳이라면, 왜 나를 떠났을까.

내가 그 진창보다 나을 바가 없었다는 걸까.

떠오르는 질문과 의심으로 잠 못 이룬 밤이었다. 개미굴 같은 보호구역 골목의 방 곳곳을 샅샅이 뒤졌어야 했다. 멍청하게 그 노파를 붙들고 있을 시간에 베스를 찾았어야 했다.

그 후회가 이 새벽,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보호구역 앞에 세워지는 고급스런 차에 바닥에 널브러진 부랑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데베르는 거침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몰라본 몇 명이 시비라도 걸듯 다가왔지만, 이내 우악스런 힘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헉. 헉.”

답지 않게 속에서부터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냄새.

노파를 만났던 방이 가까워질수록 끔찍한 향내는 더욱 짙어졌다.

“고, 공작님!”

어젯밤 데베르를 상대한 남자가 급하게 골목 끝에서 뛰어왔다.

“노파는.”

“그, 그게. 켁!”

말을 흐리던 남자의 목이 그대로 데베르의 손아귀에 잡혔다. 공작의 여유 없는 손길은 지난 밤과 다를 바 없었다.

“노파는.”

“큽! 가, 갑자기 주, 죽-”

“죽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가 제 목덜미를 쥐고 캑캑거렸다.

데베르는 머리 꼭대기부터 얼음을 붓는 것처럼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흥분으로 들떠있던 맥박이 잠잠해졌다.

“죽었다고…?”

남자는 연신 데베르의 눈치를 살폈다.

“예…. 오늘내일하던 노파라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치는.”

“어떻게.”

“어떻게라뇨. 그저 죽었는데요.”

“방을 지키던 이는.”

“아래 있는 놈한테 시켰는데….”

“그 새끼는 어딨어.”

“방 지키던 놈이요?”

남자는 우물쭈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보호구역이라 해도, 여기 나름의 규율이 있었다. 이래 봬도 여기선 대장 노릇하는 제가 일개 잔챙이들의 이름까지 알지는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 그냥 여기서 먹고 자고 하는 놈인데요…?”

“찾아.”

“윽!”

데베르는 남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제 대장의 수모를 보는 아랫놈들의 질겁한 표정이 선명했다.

“이 보호구역에 있는 모든 인간을 내 앞으로 데려와. 하나도 빠짐없이. 노파의 시체까지 함께.”

씹듯이 뱉어내는 목소리에 살기가 흉흉했다.

“하나라도 놓쳤다간 이 골목 전체를 죽여버릴 거니까.”

“어, 얼른! 얼른!”

공작의 저 말이 농담일 리 없었다.

미치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니. 머리채가 잡힌 남자는 울상이 된 채 빨리 찾으라며 손을 휘저었다.

일사불란하게 흩어진 아랫놈들이 급하게 방마다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끌어왔다.

좁은 골목에 시체가 쌓이듯 손님부터 포주, 지나가던 잔챙이까지 모여들었다. 그중엔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웨인 귀족 놈들도 포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들것에 실린 하얀 포대까지 나왔다.

데베르는 골목에 널브러진 인간들을 낙엽처럼 밟으며 들것으로 다가갔다. 들춰본 천 안엔 어젯밤 발악하던 노파가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기막힌 우연이군.”

데베르의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때마침 오늘 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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