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왁자지껄한 기세로 들이닥치는 수도의 귀족들을 맞이하는 보호구역 상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중에는 벌써 한 몫 벗겨 먹을 멍청한 귀족을 고른 작자들도 있었다.
데베르는 제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이 골목에 들어선 적이 없었다. 그에게 이곳은 선대의 치욕이자, 원치 않는 가문의 업보 같은 곳이었다.
'데베르. 가장 귀한 것을 취하고 싶다면, 가장 천한 것에 발을 담글 줄도 알아야 한다.'
그걸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던가.
더러운 향내가 풍기는 번트의 후미진 보호구역은 알음알음 돈깨나 있는 작자들 귀에 들어갔다.
“누추한 곳에 이리 귀한 분이 오시다니.”
이 골목에서 뼈가 굵은 자들은 곧바로 데베르를 알아봤다.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색만 보고도 번트 보호구역의 수많은 이들이 입맛을 다셨으니까.
카시우스가 있을 적까진 쏠쏠하게 돈을 챙기던 이들은 데베르가 가문을 이어받고 나선 수입이 반 토막 난 상황이었다.
소문과 달리 정숙한 귀족 행세라도 하나 싶었는데 오늘 이리 행차하실 줄이야.
“내 주인께선 무얼 원하시는지요?”
거칠한 수염이 얼굴을 덮은 남자는 주저 없이 데베르를 주인이라 불렀다. 이 바닥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군들 돈만 쥐여준다면 주인을 넘어서 신으로도 섬길 수 있었다.
“베스.”
아, 남자가 알만하단 표정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여자를 원하시는군요.”
“이곳에 베스가 있다고?”
베스? 그런 애가 있었던가? 남자는 주름진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만면에 능글거리는 웃음이 떠올렸다.
“베스뿐만 아니라 레이첼, 다이앤, 루스 아주 다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저기 국경을 넘어서 온-”
“베스를 데려와.”
“네, 베스요. 알겠습니다. 저 코너를 돌면 문이 나오니 안에서 기다리시죠.”
남자는 잽싸게 맞장구를 치며 데베르를 안으로 안내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베스, 베스. 남자는 중얼거리며 데베르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번트의 보호구역 입구는 좁은 골목 하나였지만, 막상 입구를 들어서면 개미굴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고르듯 제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든 웨인에서도 맛보기 힘든 쾌락이 기다리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곳이었다.
데베르는 갈래 진 골목으로 하나둘씩 사라지는 제 손님들을 지켜봤다. 술에 취한 몸뚱이들은 저열한 욕망만을 가진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끼익.
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향유 냄새가 풍겼다. 미약이라도 풀어놓은 건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오르는 향이었다.
“빌어먹을.”
데베르는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어차피 웬만한 약에는 잘 취하지도 않는 몸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육체는 베스가 사라진 뒤 증상이 더 심해졌다.
하루에 한두 시간도 눈을 붙이기 어려웠다. 새벽이 되면 아침이 될 때까지 토악질이 밀려왔고, 얼핏 잠이라도 들면 어김없이 카시우스의 환영이 그를 깨웠다.
약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된 데는 황제의 비호 아닌 비호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조금만 더.
그의 약은 침실 깊숙한 서랍 속에 잠겨 있었다.
데베르는 자신이 지옥 같은 밤을 견디는 이유를 알았다. 아둔하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스 제인스를 기다리니까.
그 여자가 오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 여자만이 고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스스로 꽤나 로맨틱한 핑계를 댄다고 자조하면서도, 잠긴 서랍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베르는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이건 두려움일까, 기대일까.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정말 자신의 베스일까 두려우면서도, 막상 그 얼굴을 보면 반가울지도 몰랐다.
“들어와.”
곧이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치렁치렁한 머리를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남자도 함께였다.
여자의 머리는 불에 타는 것처럼 붉었다.
“공작님께서 대체 어떻게 아시고, 허허. 여기 베스가 있는 줄은 저도 몰랐네요. 자, 인사드리렴.”
“공작-”
“이름이 베스라고?”
음울하게 바닥을 기는 목소리였다.
그에 움찔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예, 예. 얘가 베스인뎁쇼.”
“감히.”
데베르는 순식간에 둘의 목을 양손으로 틀어쥐었다. 무식하리만치 우악스런 힘이었다.
“켁! 켁!”
“으아, 고, 공작!”
웃음이 새 나왔다.
어떻게 이곳에 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을까.
두 사람은 실성한 듯 웃는 데베르를 질겁한 얼굴로 쳐다봤다.
“감히 누구 이름을 쓰는 거야.”
데베르는 더러운 것을 털듯 손을 떨쳤다. 헉헉거리는 소리만이 어두운 밀실을 채웠다.
“이곳에서 두 번 다시 베스란 이름이 들리지 않게 해.”
“헉, 헉, 예, 예. 그러겠습니다.”
여자는 재빠르게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야! 야!”
남자가 불러도 돌아올 리 만무했다.
도망갈 기회마저 놓친 남자는 슬금슬금 데베르의 눈치를 봤다. 대체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열린 문 사이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노파의 것이었다.
“에유, 또, 또, 멍청한 놈들이, 기, 기어들어 오고.”
지팡이가 탁탁 바닥을 찍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 노인네가!”
가뜩이나 기분 오락가락하는 영주 놈 심기 불편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당에, 도움도 안 되는 노친네의 방문이라니. 남자는 얼른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노파의 지팡이가 조금 더 빨랐다.
데베르는 끝이 뭉툭한 지팡이로 내려간 시선을 들었다. 허리가 반 이상 굽은 노파는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꼭 개가 새로운 것을 탐색할 때 하는 모양새였다.
“앞이 보이지 않나?”
데베르의 목소리에 노파가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세히 보니 양쪽 눈동자가 모두 허옜다.
“으, 음? 이 목소리는, 내가 흠, 어,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고.”
“이 망할 노인네야! 이분은 이곳이 처음이시라고!”
남자가 윽박질러도 노파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팡이 끝이 노파의 걸음만큼 밀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앞이 보이지 않으면 다, 다른 능력이 더 생기지. 흐, 흠. 분명 술 냄새가 나는데, 옷에선, 흠, 향기가 나는군.”
노파가 씩 웃었다.
“여기에 취해서 온 게 아니군. 다른 목적이 있는 게야.”
떨리던 목소리가 돌연 분명해졌다.
“어유, 공작님. 죄송합니다. 이 노인네가 일 년 전부터 섬망이 있어서 오락가락해요. 자, 나가자고! 얼른!”
“누가 날 보고 미쳤다고 하는 게야! 난 엘리젯 바머야! 천하의 엘리젯 바머가 어떻게 미쳐!”
“엘리젯 바머…?”
엘리젯 바머.
베스의 유일한 사망금 수취인.
사그라들었던 끔찍한 물음이 다시 올라왔다. 정말 이곳에 베스가 있을까, 하는 그 끔찍한 물음이.
“이 노파에게 자식이 있나?”
“네, 네? 자식이요?”
갑작스런 질문에 남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요. 이 노파는 젊은 적부터 이곳에서 그….”
남자는 제 팔을 들어 주사 놓는 시늉을 했다.
“이걸 하던 노인네지. 그런 쪽은 전혀 아닙니다. 자식은커녕, 얼마나 괴팍한지 남자고 여자고 제 주위에 두지 않았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래? 그럼 재산은? 누군가의 사망금을 탔다던가, 목돈이 주기적으로 들어온 전적은?”
“목돈이요?”
남자는 헛웃음을 쳤다. 괴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노인네는 약값 낼 돈도 없어서 저희가 덕 쌓는다 생각하고 데리고 사는 중입니다요. 목돈은커녕, 저승 갈 노잣돈도 없는 사람인데….”
남자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래. 나가 봐. 당신은 남고.”
데베르의 축객령이 향한 곳은 남자였다.
남자는 이게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또 모가지라도 잡힐세라 얼른 허리를 굽신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비, 비밀이 많으신 부, 분인가 보군.”
노파가 성성한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마다, 구불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서, 서, 섬망 든 노인네하고도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면, 그, 그게 비밀이 많은 사람이지.”
노파는 훌훌 웃으며 쭈그려 앉았다.
“베스 제인스.”
“응?”
“베스 제인스를 찾고 있어. 혹시 당신이 알까?”
“베, 베스…? 베스…?”
노파는 쭈글쭈글한 입술을 들썩이며 ‘베스’를 읊조렸다. 그러더니 돌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난 한평생을 여기서 썩었어!”
데베르는 노파의 양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독이듯 어깨를 살며시 주무르자, 노파의 발악도 점차 잦아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애. 아마 부모도 없는 애일 거야. 그 애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거, 검은 머리? 검은 머리, 검은….”
노파의 허연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순간, 허공에서 그 움직임이 뚝 멈췄다.
“하나 있어.”
노파는 기억을 더듬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된 기억 사이사이로 무언가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거, 검은 머리의 깡마르고 어린 여자애.”
그 희미한 끝을 잡으려 노파는 애를 썼다.
“내가 끼고 사, 살았어. 예쁘고, 똑똑한 아이.”
“계속 떠올려.”
으름장을 놓는 데베르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 아인 이름이 없는데? 그, 그저 ‘아가’였어. 내가 아가라고 불렀으니까.”
“그 아이가 커서도 당신이 찾아온 적이 있어?”
“...응?”
잠깐 정신을 차린 것 같던 노파의 인상이 다시 구겨졌다.
“기억이 안 나! 안 난다고! 이봐! 나 좀 살려줘! 이 작자가 나를 죽여!”
“기억해 내!”
터지는듯한 데베르의 고함에 노파가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물을 흘리며 손을 싹싹 빌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사, 살려, 어르신.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데베르는 바싹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런 고함과 비명에 문을 연 장정들은 공작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이 노파의 정신이 돌아오게 만들어.”
섬망이 든 노파의 정신을 되돌리라는 어려운 명령을 남긴 채, 데베르는 역한 냄새가 가득한 밀실을 벗어났다.
굽이진 골목을 돌고 돌아도 번트 보호구역 특유의 날 비린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영지의 구석에 와서야 데베르는 참은 숨을 토해냈다.
닿을 듯 말 듯 결국은 아무것도 닿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