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갑자기 번트라고?”
라프넬은 머리를 빗어 내리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옅은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독하리만치 평온한 그곳에 자리한 라프넬은 인형처럼 두 눈만 깜빡였다.
“번트….”
오랜만에 벨이 전한 새 소식이었다.
뭐라도 할 것처럼 굴던 데베르는 지난 한 달간 지루할 만큼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이 트기 무섭게 회사로 가고,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에서 대체 뭘 하는지는 몰라도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 않은 공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제아무리 수에 밝은 라프넬이라 해도, 갑자기 데베르가 영지로 돌아갈 마땅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새초롬한 얼굴 위로 미약한 근심이 떠올랐다.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휴식이라.”
휴식과 데베르라니. 그토록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하지만 휴식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번트로 친우분들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늦게라도 종전의 회포를 푸시려고요.”
하기야, 데베르는 온실 정원 연회 이후론 저택에 처박혀 있었다.
“아더 황자님도 오후에 번트로 출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더도?”
그제야 불편한 기색을 담아 치켜 올라간 라프넬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더도 간다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가 제바람대로 데베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말해주진 않겠지만, 어쨌건 없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뒤늦게 술판이라도 벌이겠다는 건지.”
라프넬의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데베르는 웨인의 저택엔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았지만, 제 영지로는 종종 사람들을 불렀다. 가끔은 꼭 남의 집 대하듯이 번트를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주인의 부재에도 잘 돌아가는 영지 사정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번트는 웨인을 제외하면 두 번째로 큰 지역이었고, 제국의 곡창지대와 산업단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쉬쉬하는 한 가지 비밀.
가장 지독한 약쟁이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외출 준비를 서둘러야겠어. 그분이 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니.”
“네, 공주님.”
벨이 손가락을 마주 부딪치자,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갈한 옷으로. 단정하게.”
언젠가부터 바뀐 공주의 취향 탓에 하녀들은 전에 없이 혼란스러웠다.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한 옷과 장신구만 찾던 공주는 이젠 음전한 것만 찾아댔다.
그마저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찌검해대는 꼴은 전혀 음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클리프가로. 아, 오늘은 차를 타고 갈 거야.”
황궁 앞의 황금 마차를 물린 라프넬은 시커먼 차에 올라탔다.
하녀들은 그녀의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다잡아주며 겉껍데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라프넬은 누가 보기에도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붓감이었다.
* * *
사용인들은 부지런히 공작의 차에 사냥총을 실었다.
“또 늑대사냥을 하시려는 겁니까?”
집사가 걱정스레 묻자, 데베르는 가벼운 웃음으로 답했다.
“넥서스의 늑대들이 갈수록 포악해진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만 할까요.”
데베르는 농이라도 치듯 말했다.
“좀처럼 하시지 않더니….”
“그땐 늑대가 아니라, 적군을 잡고 있었으니까.”
늙은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바라본 젊은 공작의 얼굴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필 한겨울에 번트로 사냥을 가신다니 늙은 저로서는 걱정이 앞섭니다.”
“클리프 공작이 외톨이가 되어 죽진 않을까 걱정하는 올리버를 위해 번트로 가는 거죠.”
데베르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사냥총의 총열이 녹슬진 않았는지 살피며 답했다. 총은 마치 데베르와 한 몸인 것처럼 그의 손에 매끄럽게 감겨들었다.
“찾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번트로 보내세요. 거기로 오면 만나줄 테니.”
“알겠습니다.”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고자 저택을 떠나는 주인을 위해 모인 사용인들이 열을 맞춰 공작을 배웅했다.
“어이쿠!”
운전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저택 정문 밖으로 길게 이어지는 가로수길을 달리던 차를 막은 건 넥서스의 인장이 찍힌 황족의 차였다.
“데베르!”
그리고 그 뒷좌석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케이프를 걸친 라프넬이 내렸다.
데베르의 무미건조한 얼굴에도 라프넬은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살갑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번트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배웅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걸요.”
“그러시군요.”
“번트에는 얼마나 계실 생각이세요?”
“아직 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간다고 하면 싫어하실 건가요?”
데베르는 제 가슴팍쯤 오는 라프넬을 가만히 바라봤다. 예전엔 아더와 참 많이 닮았다 싶은 얼굴이었는데, 다시 보니 딴판이었다.
어미가 달라서 그런 걸까.
“공주를 위해서라면, 감히 오지 마시길 말씀드립니다.”
“저를 위해서요…?”
“미혼인 공주께서 외간 남자의 영지를 사사로이 드나드는 걸 좋게 볼 넥서스 귀족 영식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외간 남자. 사사로이. 다른 귀족 영식.
하나같이 라프넬에게 거슬리는 단어만을 고른 듯이 족족 뱉어내는 남자였다.
“황가와 클리프가 막역하다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걸요?”
“그저 군신의 관계일 뿐입니다.”
데베르는 자신의 차를 막아선 황족 소유의 차를 바라봤다. 작열하는 햇빛 탓인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속엔 배제할 수 없는 그의 감정이 드러났다.
그는 감정을 속이는 데 능했지만, 지금은 일부러 감정을 내비치는 체하고 있었다. 마치 실수인 것처럼.
“특히 소문이 좋지 못한 제 저택을 이렇게, 막아서듯 들이닥치시는 것 또한 공주의 평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라프넬은 붉은 입술 안쪽을 살며시 물었다.
데베르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공주께선 높이 오르는 걸 좋아하시지, 바닥을 기는 건 취향이 아니신 줄로 아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데베르는 한쪽 팔을 내밀었다.
“차에 타시죠.”
라프넬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에 힘을 주며, 그의 팔을 잡았다. 뻣뻣한 코트 자락은 이 남자의 성정과 닮아 있었다.
그는 라프넬을 뒷좌석에 태우고 단정히 묵례하더니, 차가 떠나는 걸 기어코 볼 작정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해.”
라프넬은 백미러에 비친 건방진 공작의 얼굴을 두고두고 노려봤다. 마침내 길을 벗어나 그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건방진 공작 새끼.”
도톰한 입술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분기가 섞인 숨이 뜨거웠고, 분은 풀리지 않았다.
데베르는 차가 코너를 돌고 사라지고 나서야 뻐근한 목을 느릿하게 돌렸다. 움직일 때마다 두둑거리는 뼈 소리가 그간의 피로를 말해줬다.
“지겹군.”
차에 오른 데베르는 번트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머릿속으론 수없이 같은 장면이 재생됐다. 그저 상상이었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상상.
“공작님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베르를 대신해 번트 영지를 돌보던 관리인이 차 뒷문을 열 때까지도, 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번트는 웨인과 마찬가지로 데베르의 마지막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지독할 만큼 본모습을 바꾸지 않는 곳이었다.
“여전하군요.”
칭찬인지 질책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말투였다.
관리인은 제가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추운 날씨에도 땀을 삐질거렸다.
잦은 전쟁 탓에 영지를 자주 비우는 가주를 대신해 관리인이 영지를 돌보는 건 넥서스에서 흔한 일이었다.
법률 대리인 자격이 있는 자가 그 역할을 맡았지만, 종종 재산이 없는 한미한 귀족 가문에서 그 직무를 맡기도 했다. 데베르도 제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엔, 어느 남작가에서 번트의 관리인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다.
“장부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세금 징수 목록과 토지 이용 내역, 예산 관리-”
“그저 쉬러 온 겁니다.”
사용인의 말을 간단히 자른 데베르는 사냥총부터 둘러맸다.
관리인 체프는 기억을 더듬었다. 데베르 공작이 어떤 이였지? 희미한 잔상 속에서도 형형하게 상대의 약점을 뚫어보는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마주한 데베르 공작은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선이 굵어지고 어깨가 벌어지긴 했지만, 특유의 날 선 분위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저녁엔 손님이 올 테니 식사와 손님방을 준비하세요.”
그래, 저건 마치 한량인 것처럼 건들거리는 모양새였다.
“취할 수 있는 건 뭐든 가져오고.”
때마침 마부가 끌고 온 사냥용 말의 고삐를 틀어쥔 공작은 순식간에 성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 * *
관리인 체프의 의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데베르는 초저녁부터 술을 들이켜더니 웨인에서 손님이 도착할 무렵엔 이미 인사불성이 돼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좋아하는 건 그에게서 뭐라도 뜯어내려 애쓰던 웨인의 귀족들이었다. 수많은 손님 중 아더는 없었다.
“어디 한번 거나하게 취해보자고!”
“승전을 위하여!”
“넥서스에 무궁한 영광을 주소서!”
공주의 온실 정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술판이었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곳곳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터지는 듯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베르! 딸꾹, 이곳이 그렇게, 재미 보기 좋은 곳이라던데?!”
“나도! 나도, 들었다구우!”
이미 이성을 놓은 지 오래된 놈들이 기어코 선을 넘는 질문을 했다.
테이블 위에 엎어지듯 쓰러져 있던 데베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싸늘한 눈에 이채가 돌았다.
“누가 그래? 번트가 그런 곳이라고.”
누군가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다.
“에이, 데베르. 끅, 다 알면서 묻기는.”
“우리 좀 놀게 해 줘어.”
직직 늘어지는 목소리가 듣기 싫게 데베르를 졸랐다.
데베르는 연회장의 창을 활짝 열었다. 세찬 바람이 남은 술기운을 앗아가도록.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보호구역에 가고 싶단 거지?”
올라간 입꼬리에 드러난 송곳니가 반짝였다.
“그래! 우리 좀 데려가 달라고!”
“번트 보호구역에 영주가 등장하셔야지!”
데베르는 옆에 선 시종에게 손짓했다.
“새 옷을 가져와.”
하지만 잔뜩 취한 그의 손님들은 데베르가 새 옷을 갈아입는지, 벗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손님이 원하시는데, 파티의 주최자로서 해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