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동이 트기에 아직 먼 짙은 새벽.
가장 어두운 것들이 모여드는 곳은 따로 있었다.
웨인에서 가장 천박하다 불리는 4번가 보호구역은 그 입구에서부터 썩은 내가 났다. 눈이 덜 녹아 질척이는 바닥 곳곳에 헐벗은 거지와 무언가에 잔뜩 취한 부랑자들이 쓰러져있었다.
시가 냄새와 다른 알싸한 향 또한 4번가 보호구역의 입성을 알리는 신호였다.
데베르는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다.
“뭐야…? 이거 귀족 나리 아니셔?”
가장 깊은 골목 안쪽에 와서야, 제정신인 자가 등장했다. 앞니가 누렇게 썩고, 군데군데가 빠진 남자는 나름 4번가의 대장 노릇을 하는 자였다.
그는 멀끔한 겉모습을 한 귀족 나리를 훑어봤다. 어둠에 가려지긴 했어도, 척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큭큭, 뭐가 필요해서 이 밤에 오셨을까….”
남자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잔뜩 엉겨 붙은 머리에 가린 눈이 영민하게 빛났다.
타고나길 계산에 빠른 머리가 지금 눈앞에 거대한 돈줄이 왔음을 말해줬다.
남자는 씩 누런 이를 드러내며 귀족의 심기를 건드렸다. 적당한 도발은 오히려 몸을 사리는 귀족들을 안달 나게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오셨으려나. 우리 귀족 나리께선.”
대답 없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휙 던져졌다.
남자는 잽싸게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것을 잡아챘다.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커프스였다. 곧이어 반대쪽 커프스도 날아왔다.
데베르는 흐트러진 소맷단을 정리했다.
“그건 계약금.”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 다른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건 목숨값.”
목숨값? 사파이어 커프스를 보고 싱글벙글하던 남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몇몇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주로 은밀한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순수한 부탁은 없었다. 주로 누군가를 대신 죽여달라던가, 영 몸을 못 쓰게 해달라는 등 위험천만한 대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싶어 했다.
지금 눈앞의 귀족 나리처럼 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다.
“똑바로 봐.”
위압적인 그림자가 남자를 덮었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느물거리던 눈동자도 어느새 여유가 사라졌다.
황족 외에 저만한 기세를 떨치는 귀족이 있었던가. 황가의 상징인 금발도 아닌, 잿빛 머리.
잿빛 머리…?
“크, 클리프?”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데베르는 남자의 손에 들린 시계를 턱짓했다. 공작과 닮아 잿빛으로 반짝이는 시계가 남자의 더러운 손에 들려 있었다.
“섣불리 팔면 나와 거래한 걸 들킬 거야. 넥서스에선 나 외에 그 시계를 손에 넣은 자는 없으니까.”
그는 친절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죽는다는 뜻이야.”
거래의 갑과 을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그냥 어둠 속에나 처박혀 있지, 왜 모습을 드러내고 지랄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는 되려 데베르에게 패악을 부렸다. 어차피 상대는 은밀한 일을 제 손으로 할 수 없기에 이곳을 찾아온 터. 이런 계약에선 쉽사리 우위를 넘겨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 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상대는 데베르였다.
고작 불법이 성행하는 뒷골목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자가, 클리프 공작의 면면을 알기는 역부족이란 걸 그는 몰랐다.
“날 기억해. 내가 찾는 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난 널 찾아갈 테니까.”
데베르는 벽에 기댄 채 시가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는 볼이 홀쭉해졌다.
“켁! 케켁!”
후-하고 뱉어내는 연기를 맞은 남자가 콜록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준 걸 팔고 국경을 넘어가다 걸리는 날엔 네 사지를 찢어서 이 골목의 개새끼들한테 던져줄 거야.”
데베르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밑의 약쟁이들까지 전부.”
좁고 후미진 골목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건, 곧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이는 시가 불 뿐이었다.
“내가 약을 만들었다는 즈, 증거가 어딨어서 날 팔아넘기겠다는 거야?!”
약물의 불법유통과 제조는 4번가 보호구역의 주요한 자금줄이었다. 심부름꾼 노릇은 심심풀이 정도로 느껴질 만큼 제 주머니를 비대하게 만드는 사업을 건들다니. 남자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때려치워! 이까짓 거래 안 해도 그만이야!”
“네가 지금껏 살아있는 건 네 고객이 된 넥서스 귀족 놈들이 입을 다물어서잖아?”
“...!”
“난 지금부터 아주 망가질 예정이야. 내 천박한 소문은 미친 듯이 퍼져 나가겠지. 그동안 쌓아놓은 업보가 있으니,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데베르 클리프가 단단히 미쳤다고 할 거야. 그리고 그 원인을 찾겠지.”
데베르는 피식 웃으며 시가를 다시 한번 깊이 빨아들였다. 떨어진 앞머리 몇 가닥이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럼 난, 이 골목에서 넥서스에서 금기시되는 약을 샀노라고 폐하께 고할 거야. 어때? 꽤 괜찮은 계획이지 않아?”
“그럼 너는 무사할 것 같아?! 공작이어도 처형을 피해가긴 어려울걸?”
“상관없어.”
바닥에 떨어진 시가가 구두코에 짓뭉개졌다.
“난 평생을 감옥에서 썩다 처형당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데베르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그런 공작의 모습을 보는 남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물이 왔다 싶어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목줄을 틀어쥐러 온 괴물이었다.
“누, 누굴 찾으면 되는 거야.”
대번에 한풀 꺾인 목소리가 나왔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와 손에 든 시계와 커프스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베스 제인스.”
데베르가 중얼거렸다.
독한 시가 연기보다 입안을 매끄럽게 채우는 이름이었다.
“넥서스의 모든 베스 제인스를 내 앞에 데려와. 하나도 빠짐없이.”
“흔해 빠진 이름 가지고 뭘 찾아오라는 거야! 머리카락 색이라도 말해!”
남자는 이번에도 대거리를 했지만, 그건 발악이 섞인 부탁이었다. 저 귀족 놈이 말하는 베스 제인스를 찾지 못했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니까.
겁에 질린 외침을 듣고도 데베르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치 않아.”
머리카락 색 따위.
이미 도망친 마당에 곱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리 없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 잘라버렸든지, 염색약을 들이부었든지 숨을 방법은 넘쳐났다.
하지만, 만약 그 여자의 얼굴에서 새카만 밤하늘을 닮은 머리 빛이 사라진다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넥서스의 가장 밑바닥부터, 가장 위까지 남김없이 찾아와. 기한은 한 달이야.”
* * *
돌아온 데베르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여유롭게 클리프 공작의 의무를 해나갔다.
항간에서 전쟁광이라 세상 물정은 모른다고 떠들어대던 소문을 우습게 무시한 그는 매일같이 이사회를 긴장하게 했다.
혹자는 선대 카시우스보다 더 사업에 있어 까탈스럽게 군다고 입을 뗐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수익과 성과를 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위협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데베르의 군수 사업과 맞물려 그가 전장에서 만들어낸 염문설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종국에는 그저 헛소문 아니냐는 여론이 가장 팽배했다.
데베르 클리프와 사랑은 얼토당토않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가 사라진 데베르 공작? 저 일에 미친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서 깊은 가문의 사업을 단번에 쓰러트리는 저 남자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데베르에게 더욱 목맸다.
웨인의 데베르 저택을 찾아오는 이는 매일 넘쳐났지만, 그는 아무도 응접실에 들이지 않았다.
“공작님, 로널드 백작님의 차가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았던가요.”
데베르는 신문을 넘기며 물었다. 깔끔한 셔츠 차림의 데베르는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답을 재촉하는 짙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례군요.”
데베르는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았으니 무례라는 말로 간단히 일축했다.
하지만 집사는 그건 그저 핑계일 뿐, 일전에 약속을 잡았다 한들 제 주인은 이 집안에 타인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았다.
그건 결벽이기도 했고,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한 과도한 자기방어이기도 했다. 유독 이번 전쟁이 끝난 이후 그의 이러한 성정은 더 깊어졌다.
“다가오는 봄에 맞춰 응접실을 새롭게 꾸몄습니다.”
새로운 응접실에 손님을 들이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문으로 고개를 돌리던 데베르는 문득 창밖을 쳐다봤다. 창밖의 가지는 아직 앙상했지만, 올망졸망한 꽃봉오리들이 성급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에 부탁한 방은 정리가 끝났나요?”
“거의 끝나갑니다. 다만, 부인 방의 침구와 가구 색은 어찌하면 좋을지 여쭤보려 했습니다.”
“색….”
베스 제인스의 색.
“하늘색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봄 하늘과 어울릴 것 같은 색이네요. 선대 클리프 부인들의 방을 꾸민 이에게 주문을 넣겠습니다.”
좀처럼 사견을 덧붙이지 않는 집사는 흔치 않게 들뜬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문가에 선 하인이 집사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예의 도착하는 사교 무도회 초대장이나, 남자들의 클럽 초대장보다 훨씬 두껍고 묵직했다. 심지어 겉봉투는 값싼 종이로 둘둘 만 게 전부였다.
여러모로 공작의 저택에 도착할 만한 전갈은 아니었다.
“나가보세요.”
데베르는 신문을 저만치 치웠다.
딱 오늘로써 4번가 보호구역을 찾은 지 한 달이 되었다. 제가 외출하기 전까지 소식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길로 그치를 찾아낼 작정이었는데 명줄 하나는 긴 놈이었다.
찢긴 봉투 속에서 누런 종이 뭉치가 나왔다.
그 안에는 베스 제인스라는 이름과 함께 나이, 출신, 결혼 여부 따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개중엔 성 없이 베스만 적힌 것도 많았다.
데베르의 눈이 빠르게 종이를 훑어 나갔다.
적막한 서재에서 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쉼 없이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가 한 곳에서 멈췄다.
「베스/23세/번트 보호구역/미혼」
보호구역은 유곽과 밀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에둘러 통칭하는 넥서스의 공식 명칭이었다.
“번트….”
데베르는 낯익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곳은 클리프가의 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