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공주님께서 꼭 참석을 부탁하신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운전사는 무슨 생각인지 차에 탈 생각이 없는 데베르를 조심스레 재촉했다.
데베르 또한 이 초대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본격적인 종전 연회는 군대가 도착한 다음 날 밤부터였다. 그리고 그 본격적인 연회의 첫째 날 밤을 주최하는 이는 라프넬 공주였다.
사랑스러운 공주의 축하로 종전의 시작을 축하하는 건 어느샌가 넥서스에서 하나의 전통이 되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왁자지껄한 인파의 노랫소리와 하늘을 수놓는 폭죽 소리가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데베르는 대답을 듣지 않고 차에 올랐다. 미약하게 찌푸린 미간과 함께 내쉰 한숨이 그의 피로를 전했다.
공주의 연회는 웨인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사교계 인사들만 아는 은밀한 연회는 라프넬의 온실 정원에서 열렸다.
라프넬은 이날 하루를 위해 정원을 가꾸고, 또 가꾸었다. 세상의 귀한 꽃들은 모두 라프넬의 정원으로 향했고, 그 꽃들이 유행하는 순간, 그녀는 가차 없이 제 정원에서 그것들을 물렸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정원이었다.
벌써부터 그 역한 꽃냄새가 코에 맴도는 것 같아 데베르는 창문을 열었다. 달리는 차 창 너머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아프게 얼굴을 스쳤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밖을 내다봤다.
베스가 없는 또 하나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저 그뿐인 밤이었다.
* * *
“공주님을 뵙습니다. 어쩜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까?”
“그럴 리가요. 로널드 백.”
“메이너 황가의 가장 진귀한 보석은 바로 라프넬 공주님이실 겁니다.”
“과찬이세요.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들이 많은걸요.”
라프넬은 분홍빛으로 물든 뺨을 매만지며 사내의 사탕발림에 응수했다. 그 손짓 하나에 공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입안의 혀처럼 남자들을 굴리는 건 라프넬의 타고난 재주였다. 제 어미에게 이것 하나만큼은 물려받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밤을 잊은 온실 정원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빛났다.
하얀 등나무가 은하수처럼 유리 천정을 둘러싸고 있었고, 온실 한가운데에선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솟아오르는 분수대가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다.
라프넬은 자신의 작품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사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어갈 때마다 사내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공주와 가까워지고 싶은 영애들 또한 잔뜩 들뜬 모습으로 그녀에게 칭찬을 쏟아냈다.
라프넬은 입구를 바라볼 수 있는 온실의 한가운데에 섰다. 이미 북적이는 그녀의 정원으로 꾸역꾸역 초대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넥서스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가의 미혼 자제들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공주님.”
“모여드는 얼굴들은 이 정원보다 더 아름답죠.”
라프넬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걸쳤다.
잔뜩 호사스럽게 몸집을 부풀리며 들어오는 이들의 저열한 욕망을 라프넬은 알았다.
사내들은 뒤론 여러 정부를 두면서도, 정작 자기 아내는 정숙하면서도 아름답길 원했고, 여인들은 자기 집안보다 부와 권력을 잡은 사내의 옆자리를 꿰차길 바랐다.
종전을 축하하고 위로한다는 적당한 대의를 앞세워, 서로를 마음껏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게 공주의 온실 정원 연회의 목적이었다.
“곧 도착하신답니다.”
벨이 공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공주의 방에서와 달리 다른 하녀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 채였다. 머리까지 똑같이 틀어 맨 탓에 평범한 얼굴의 벨은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았다.
“벌써 저기 오시는구나.”
붉은 입술 꼬리가 휘어졌다.
가볍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솜털처럼 자라난 어린 꽃들이 즈려밟혔다.
“공께서 오시지 않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다른 사내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간드러진 음성이었다.
데베르는 느슨해진 슈트 단추를 틈 없이 잠그며 걸어왔다.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부터 반듯한 이마, 무심한 눈빛까지. 전장에서 봤을 때와 달라진 거라곤 군복을 벗은 게 전부인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공께선 오늘도 멋지시군요.”
오늘 밤 뱉은 말 중 유일한 진심이었다.
생긴 것 하나만큼은 라프넬의 마음에 꼭 드는 남자였다. 그조차도 성애적인 관심은 아니었지만.
보기 좋은 그림을 보면 흡족하고, 세상에 귀하다는 꽃을 보면 한 번쯤은 더 쓰다듬게 되듯이,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그런 남자의 눈에 든 여자가 고작 그 베스라는 애라니. 심미안은 썩어빠졌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데베르…?”
“공주께서도 아름다우시군요.”
“천만에요.”
라프넬은 당연하다는 듯이 데베르의 옆으로 가 섰다. 고갯짓으로 저를 에스코트하란 뜻을 전하자, 데베르는 눈치껏 팔을 내밀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데베르!”
“데베르 공을 여기서 보다니! 참으로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지? 우리 재작년에 사냥터에서-”
“데베르! 살아 돌아왔구나!”
“클리프 공을 봬서 영광입니다.”
우아한 자태로 정원으로 들어서는 공주와 공작을 향해 다들 앞다투어 인사말을 던졌다.
병이 도졌다, 가문의 후계는 저뿐이다, 총소리만 들으면 발작한다, 갖은 핑계를 대며 전장을 피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민망스럽지도 않은지 데베르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 기꺼이 체면을 버렸다.
“자네와 꼭 사업 얘기해보고 싶었어.”
“우리 가문이 대대로 탄광 사업을 하지 않았나.”
클리프가의 군수 사업 규모가 갈수록 커진다는 걸 안 이상, 웬만해선 만나기 어려운 데베르 클리프를 놓칠 수는 없었다.
“데베르.”
라프넬은 팔짱을 낀 데베르의 옷깃을 미약하게 흔들었다.
무심히 제 앞의 인영들을 보던 데베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네, 말씀하시죠.”
“전 잠시 영애들의 안부를 물으러 가볼게요.”
데베르는 담백하게 팔을 물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떨쳐내는 꼴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라프넬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마치 데베르의 아내인 듯 행동하는 라프넬을 보고서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개중 아둔한 몇 명만 공주를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 데베르.”
“내가 반갑다니.”
공주를 옆에서 치운 데베르의 표정은 한결 더 서늘해졌다. 셔츠부터 슈트, 팔목의 커프스까지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날것의 분위기가 풍겼다.
데베르는 협탁 위에 놓인 샴페인 병뚜껑을 성의 없이 땄다. 그의 거친 손길에 흔들린 샴페인 주둥이에서 하얀 포말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윽! 제길!”
“뭐 하는 짓이야!”
터져 나온 거품에 슈트와 구두 앞코가 젖은 몇 명이 꼴사납게 제 옷을 털어내고 발을 굴러댔다. 때아닌 소란에 영애들의 눈길이 쏠렸다.
곳곳에서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들이 데베르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그의 서슬 퍼런 기색에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실수했군.”
“그래, 그래! 실수했네, 데베르!”
경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앗, 황자님.”
“아더!”
아더를 본 이들이 반색했다.
“부디 자네가 용서 좀 해주게. 이놈은 며칠 전까지 흙바닥을 구르다 온 신세 아닌가. 좀 불쌍히 여겨줘.”
“요, 용서랄 게 있나.”
아더는 데베르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아침의 푸석푸석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아더는 더없이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를 흠모하는 눈길로 쳐다보는 한 무리의 영애들을 향해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봐, 데베르. 나처럼 인사도 좀 하고 그래. 영 뚱하니 있지 말고.”
아더가 데베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명실상부 제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두 사람이 한패인 듯 붙어있자, 남자들의 기세가 확연히 죽었다.
“아더 자네는 잘 있었나?”
“나야 뭐. 잘난 황자 팔자 따라 지내다 왔지. 그대는 요양이 필요해 영지로 갔다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엔 왔군.”
“하하…. 좀 나아져서 말이야.”
“다행이군. 난 자네가 중병에 걸려 내가 웨인에 도착하기 전에 죽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더는 샴페인을 병째로 들이키며 싱글거렸다.
그 돼먹지 못한 행동에 멀찍이 선 라프넬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는 못 본 척했다. 이렇게라도 성질을 좀 부려줘야 살 것 같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웨인엔 좀 재밌는 소식 없나?”
아더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적당한 얘깃거리를 물었다.
“재밌는 소식이라면….”
그중 호사가 한 명이 눈치 없이 데베르를 흘긋 쳐다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아더가 샴페인 병을 소리 나게 협탁에 올렸다.
“천박한 가십 말고.”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더는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 넘겼다.
“즐거운 소식 말이야. 내가 듣고 웃을 수 있는.”
“그, 브리틴에서 실력 좋은 악단이 왔다고 하던데? 아주 들어본 적 없는-”
“말해 봐.”
호사가의 말이 뚝 멎었다. 끼어든 사람이 데베르였으니까.
잠들어 있는 것 같던 데베르의 눈동자에 섬뜩하게 이채가 돌았다. 호사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단단히 잘못 걸린 게 분명했다.
“자네가 생각한 재밌는 소식.”
“아, 아니. 나는-”
“거짓 없이. 처음 생각했던 그 소식을 말해 주겠어?”
데베르는 샴페인 병을 잡아 제 앞의 가련한 사냥감에게 내밀었다. 작달막한 호사가의 손이 덜덜 떨리며 샴페인 병을 잡아 들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어서.”
호사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데베르가 작정한 이상, 빠져나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자, 자네가 어떤 천박한 여자를 전장에서 잡아 왔다고…. 내, 내가 말한 건 절대 아니고! 들리는 소문이! 소문이란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지 않은가.”
주절주절 변명이 이어졌다.
데베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 지루한 변명을 모두 들어주었다. 아더는 굳은 표정으로 데베르를 살폈다.
하지만 제 염려와 달리, 데베르의 표정은 정말 재밌는 가십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상기돼 있었다.
“데베르…?”
“들었어?”
데베르가 킬킬거리며 호사가를 가리켰다.
“오랜만에 웨인에 오니 별 얘기를 다 듣는군.”
그는 정말 즐겁다는 표정으로 협탁 위의 술잔을 들었다.
생각보다 유한 데베르의 반응에 힘을 입었는지, 잔뜩 긴장했던 남자들도 하나둘씩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비위를 맞췄다.
“클리프를 위하여!”
“넥서스를 위하여!”
밤이 깊어갈수록 건배를 드는 술잔은 드높이 올라갔고, 음악 소리는 커져만 갔다.
모두가 짐승처럼 한데 얽혀 술을 축내고, 정원 곳곳에 하나둘씩 널브러졌다.
데베르는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가끔 풀썩 쓰러지기도 하는 그를 부축하는 이는 없었다.
짙은 어둠에 잠긴 황궁 문을 나설 때까지 데베르는 만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누군가 방만한 귀족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금빛 문을 벗어난 순간, 그는 천천히 굽은 허리를 폈다. 반듯하게 뻗는 걸음걸이는 취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데베르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