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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6화 (56/206)

56화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침대 위에 시체처럼 쓰러진 데베르의 머리맡까지 닿았다.

죽은 듯 눈을 감은 데베르는 미동도 없었다. 정신은 언젠가부터 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전쟁은 끝났고, 전장의 포화도 그쳤다. 비명도 고함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지독한 고요야말로 자신이 세상에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고요는 늘 끔찍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공작님, 올리버입니다.”

“들어오세요.”

데베르는 손을 올려 제 얼굴로 기울어지는 아침 햇살을 피했다.

곧이어 문고리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데베르는 눈을 가린 손을 치우지도 않고 물었다.

“귀신이네.”

아더는 맥없이 웃으며 침실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대충 내뻗은 다리와 단추 몇 개가 풀린 셔츠가 그의 분위기를 더 나른해 보이게 만들었다.

“클리프 공작께서 어젯밤 하도 비장하게 나가셔서 걱정돼 말이지.”

그 말은 퍽 진심인 듯 아더는 핏대 선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내가 왜 너랑 친구가 된 줄 알아?”

아더는 멍하니 너른 창을 내다봤다. 황궁을 제외하면 웨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리프가의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솜씨 좋은 집사는 제 주인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저택을 아름답게 꾸몄다. 모시는 주인과 상반된 저택의 풍경이 데베르를 더 쓸쓸하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넌 좀 엉뚱한 구석이 있었거든.”

아더의 눈은 정원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자신과 데베르 둘 다 열다섯일 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예상 밖의 행동을 했어. 첫 전투에서 분명히 겁에 질린 게 보이는데도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것 하며, 사냥을 갈 때마다 다 죽일 기세로 산을 휘저으면서도 새끼는 꼭 살려주는 것까지.”

소파에 머리를 기대자, 그제야 못다 한 잠이 쏟아졌다. 황궁의 제 성보다 이 냉랭한 곳이 편하다니. 그래도 데베르를 제 친구라고 여기긴 하는 걸까.

아더는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참을 수 없었다.

“네가 소문의 클리프 대장이 돼갈수록 그런 모습은 사라졌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다 내 아둔한 착각이었던 거지.”

데베르는 잠이라도 든 것처럼 가만히 모든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넌 여전해.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어.”

“아더 메이너.”

음산한 목소리였다.

“본론만 말해.”

“사임이 대체 무슨 말이야.”

데베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민한 기색이 느껴지긴 해도 말끔한 얼굴이었다. 구겨진 셔츠를 벗자, 코바흐와의 전쟁으로 인한 흉터까지 더해져 엉망이 된 상체가 햇살 아래 온전히 드러났다.

“지겨워서 그만두는 거야.”

“호이든이 널 의심해.”

“군대도 없는 고작 공작 따위가 뭘 할 수 있지?”

“그런 말이 아니란 걸 알잖아.”

새 셔츠를 몸에 걸친 데베르는 협탁에 놓인 위스키병을 들었다. 잔을 타고 흐르는 맑은소리에 아더가 뒤를 돌아봤다.

“목줄 쥐여줄 때 닥치고 받으라고 전해.”

데베르는 제 아버지처럼 넥서스를 갖겠다는 야심 따위 없었다. 지독히도 카시우스를 닮았지만, 그의 욕망까지 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걸 믿지 않았다.

데베르 자신이 죽지 않는 한 황제의 견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런 군대장 사임 따위가 원흉이 아니었다.

“설마…. 베스가 사라져서 그래?”

“베스….”

데베르의 입매가 휘어졌다.

반쯤 빈 술잔을 내려보는 시선이 짙어졌다.

“네가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막역했던가?”

데베르는 아더의 맞은편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밤새 뒤척인 사람답지 않게 생생히 살아있는 잿빛 눈동자가 섬뜩했다.

그 모습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데베르, 정신 차려.”

“이보다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데베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흘러가는 말처럼 했지만 진심이었다. 자신은 이보다 더 멀쩡할 수 없었다. 갈수록 쨍해지는 머릿속이 이토록 팽팽히 돌아가는데.

“그 여자를 찾을 거야?”

“찾다니.”

데베르는 옆에 걸린 제 재킷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더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평범한 군복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데베르는 남몰래 웃음을 흘리며 남은 위스키를 마셨다.

어떻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까지 이토록 내 마음에 드는지.

“기다리는 거야.”

“기다린다니?”

“돌아오겠다 했으니 기다려 줘야지.”

허, 아더는 탄식 같은 숨을 뱉었다.

“부디 내가 얌전떨 때 돌아오길 바랄 뿐이지.”

데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가죽처럼 입던 군복이 아닌, 검은 슈트를 걸친 그는 모두가 선망하는 공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아더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베르는 슈트 단추를 잠그며 길게 뻗은 계단을 단정한 모습으로 내려갔다. 복도 곳곳에 즐비한 창을 통해 어느덧 정오를 향해가는 햇빛이 여과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집사는 찬란한 햇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제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모시라 할까요.”

어젯밤엔 어둠에 잠겨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전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온전히 데베르 클리프만을 위한 세상이었다.

“주인이 도착했다는 걸 알려야죠.”

데베르의 뜻 모를 소리에도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사에게 뭐라 언질을 넣었다. 데베르는 차에 오르려다 말고 집사를 다시 불렀다.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정원을 가꾸세요.”

“정원을요?”

집사의 주름진 눈이 놀라움을 담아 조금 커졌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데베르에게 어떤 제 의견도 덧붙이지 않는 자였다.

“성심껏 관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길게 뻗은 데베르의 손가락 끝이 저택 꼭대기를 가리켰다.

“클리프 부인의 방을 깨끗이 치우세요.”

이번엔 노련한 집사도 감정이 드러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택 안의 몇 개의 방은 금문율 같은 존재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클리프 부인의 방이었다. 폐쇄되다시피 한 그곳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자도 없었다.

그런 공간을 지금 데베르 공작이 말하다니.

집사는 조금은 감격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죠.”

집사는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오래도록 시린 겨울뿐이던 클리프가에 어쩌면 봄이 오는 것은 아닐까.

젊은 클리프 공작의 후계를 생각하는 집사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웨인 중심에 우뚝 솟은 건물 정문 앞에서 데베르의 차가 멈췄다.

똑같이 정문에 멈춰 선 자동차와 마차에서 내리던 남자들이 데베르를 알아보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데베르는 기꺼이 그들을 돌아보며, 가벼운 묵례로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그의 등장과 함께 소란스러운 발걸음이 건물을 울렸다.

“아, 아니. 공작님께서 오실 줄이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중년의 남자 하나가 데베르를 향한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더듬거렸다.

“오늘이 총회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데베르는 신사다운 미소로 응대하며 총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데베르?”

“공작이 왔단 말이야?”

예상치 못한 공작의 등장에 당황한 좌중이 술렁였지만, 데베르는 개의치 않고 기다란 테이블의 가장 상석으로 다가갔다.

“공작 각하, 아직 휴식이 필요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역인 이사가 먼저 입을 뗐다.

하찮은 변명이었다. 데베르가 전장으로 간 틈을 타, 뒷거래로 쏠쏠하게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데베르는 몇 년간 이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줬다. 관대한 아량도, 세상 물정에 어두워 저지른 실수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무기력함의 방증이었다.

어쩌다 한 번 연례행사처럼 총회를 들를 때면 공작은 항상 “그대로 하시죠.”라는 말로 일축했다. 세상 모든 걸 죽은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클리프 공작은 이사들의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공작은 무언가 다르다.

생기인지, 혈기인지도 모를 것이 잿빛 눈동자에 일렁이고 있었다. 항간에서 떠도는 전쟁귀란 멸칭이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였다.

오늘에서야 살아있는 데베르 클리프가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아 이사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클리프가의 서명을 더 이상 남의 손에 맡겨둘 수는 없죠.”

데베르는 여유롭게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제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을 도맡으셨더군요.”

서류를 넘기던 이사들의 손이 멈칫했다.

“오늘 총회는 길어질 것 같네요.”

데베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틈 없이 조여진 넥타이 끝을 느슨하게 풀었다.

“여러분이 얼마나 클리프가를 위해 헌신하셨는지 전부 들어볼 예정이니까요.”

데베르는 느긋한 미소로 테이블을 둘러봤다. 모두 데베르보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이었지만, 무릇 탐욕에는 나이가 없는 법이었다.

쭈뼛거리며 안건을 읊는 목소리에 데베르는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까지 전장에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데베르는 사안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공작이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이사들을 쩔쩔맸다. 개중엔 선대 카시우스 공작이 살아있을 때부터 함께 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젊은 클리프 공작의 얼굴에서 카시우스의 모습을 봤다.

정오에 시작된 총회는 해가 저물어서야 끝났다. 그마저도 데베르는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는 말로 그들을 기함하게 했다.

“미치게 하는구먼.”

“이봐, 조용히 해. 다 들리겠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온 거야?”

모두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데베르는 일어섰다.

새카만 창밖 맞은편으로 웨인 제국 병원이 보였다.

“군수회사와 마주 보는 병원이라니.”

지독한 모순에 실소를 뱉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구둣발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온통 삐거덕거리던 전장 병원과는 달랐다.

“공작님,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일찍이 주인을 기다리던 운전사가 데베르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익숙한 금장 무늬가 찍힌 봉투를 받아든 데베르는 문득 들려오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종전을 축하하는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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