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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5화 (55/206)

55화

당분간은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황궁의 모든 출입문을 열고, 열흘 정도 큰 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

데베르 클리프가 웨인에 발을 디디는 첫날만큼은 출입문을 굳게 잠갔다.

겁쟁이 새끼. 라프넬은 어릴 적부터 지금은 황제가 된 호이든을 그렇게 불렀다. 물론, 다른 이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다.

유일한 예외, 아더를 제외하면.

그는 유일하게 제 속마음을 모두 터놓을 수 있는 이였다.

라프넬은 사뿐사뿐 자신의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중앙 연회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하얀 등나무 같은 귀걸이가 작은 귓바퀴 밑에서 하늘거렸다.

마치 한겨울의 신부처럼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공주를 보던 시종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선대 황제가 살아있었을 적엔 예쁘장한 막내 공주 정도밖에 되지 않던 라프넬은 이젠 만개한 꽃처럼 하루가 다르게 피어났다.

모두가 그 꽃의 주인은 저 식탁 끝에 고고히 앉아 있는 데베르 클리프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라프넬도 왔군.”

황제는 최대한 담담한 척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배다른 여동생을 향한 멸시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라프넬의 뼈있는 말에 황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와인잔을 든 손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가족끼리 이런 인사라니, 가끔은 정말 우습다니까요.”

“크흠!”

“얼굴을 뵈어 기쁘다는 뜻이었습니다, 폐하.”

라프넬은 살짝 들어 올린 발꿈치를 비틀어 제 맞은편에 서 있는 데베르를 돌아봤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그곳에 있었다. 지독하게 지겹고,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저 아래에 숨긴 감정도 그 표정처럼 평온할까.

“데베르 공께서도 그러시죠?”

데베르는 아무 대꾸 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공주에 대한 예를 표했다.

라프넬은 질리도록 봐온 데베르의 얼굴을 뜯어봤다. 열일곱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저 표정이 가끔은 그녀조차도 소름 끼쳤다.

“앉아. 라프넬.”

그리고 그 옆자리를 늘 지키고 있던 아더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다들 앉지.”

황제의 말이 있고 나서야 애매한 정적은 깨졌다.

멀찍이 선 악단의 선율이 적절하게 침묵을 채워줬다. 고작 네 명의 식사 자리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풍경이었다. 심지어 문밖에 정렬된 황제 친위대는 이곳이 군대장을 축하하기 위함인지, 목숨을 빼앗기 위함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기묘한 부조화 속에서 데베르는 묵묵히 나이프를 놀렸다.

“‘실수’가 많았던 전투인데, 기어코 자네는 승리를 이끄는군.”

그 순간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아더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길.”

아더는 나직하게 욕을 짓씹었다.

황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더 메이너, 칠칠찮게 무슨 짓이지?”

“죄송합니다, 폐하.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쯧.”

아더는 테이블 아래 가려진 주먹을 꽉 쥐었다. 곧이어 하인이 윤이 나는 새 포크를 가져왔지만, 그는 손대지 않았다.

“실수는 없었습니다.”

데베르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실패가 있었을 뿐입니다.”

“실패라니, 무슨 뜻이지?”

데베르는 작게 자른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흠잡을 데 없이 예법에 맞는 식사 태도였지만, 지나친 여유로움이 그를 건방져 보이게 했다.

“말하자면….”

데베르의 눈가가 살짝 접혔다. 뭔가를 셈하는 듯 찌푸렸다 이내 여상해진 눈이 황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둔한 계획의 실패랄까요.”

라프넬은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가끔 이런 순간이 오면 데베르는 어쩌면 저와 참 잘 맞는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실패를 막기 위해 자네를 군대장으로 세운 거지. 카시우스가 그랬듯.”

황제는 태연하게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식탁에 둘러앉은 네 명 중 유일하게 황제의 와인잔만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데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그 대꾸에 황제가 치밀어오른 부아를 눌러 내리는 게 모두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오직 데베르만이 그걸 보지 못한 듯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그래서 사임하려 합니다.”

“데베르!”

“자네 지금 뭐라 했나!”

사임? 데베르 클리프가 군대장을 사임한다고?

소름 끼치게 닮은 세 쌍의 푸른 눈동자가 유일한 이방자인 데베르의 잿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데베르는 찬찬히 그 얼굴들을 돌아봤다.

익숙한 자리였다. 제 아비와 선대 황제가 살아있을 적엔 의자 두 개가 더 있었다는 것만 빼면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은 풍경이었다. 누굴 누구로부터 지키는지 모를 저 밖의 친위대까지 마찬가지였다.

“승인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공손한 협박이었다.

“그동안 클리프가는 황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왔으니까요.”

데베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는 멀거니 제 머리통을 내려보는 데베르를 올려봤다. 그 눈빛엔 두려움과 분노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설마, 제 목숨까지 원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자네는…!”

“먼저 일어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데베르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역한 고기를 씹고 있자니 전장에서 뒹굴던 시체 냄새가 올라와서요.”

“지금 뭐라고-”

“폐하 앞에서 토악질할 바엔 결례를 택하겠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정처 없이 테이블을 헤맸다.

“이젠 제가 없으니 바깥의 저 치들을 쫓아내시고 편히 식사하십시오.”

데베르는 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굽히며, 군인이 주군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살얼음판이 된 만찬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선율이 자리에 남은 세 사람 사이로 흘렀다.

“감히 내게….”

라프넬은 데베르가 던진 수를 계산하느라 바쁜 황제를 흘긋 바라봤다. 그리고 제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아더를 한번 바라봤다.

두 번째 시선은 처음보다 길었다.

라프넬은 새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꾸만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 나왔다.

정신 나간 놈. 멀쩡한 척하더니.

데베르 클리프는 미쳤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행동할 리 없었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아가야 할 남자였다. 모두가 아는 전쟁귀, 늑대 새끼, 카시우스의 망령으로 살아가야 할 남자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당신도 놓쳤구나.”

그 여자를.

라프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만찬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데베르를 보았고, 그가 베스를 놓친 게 확실하단 걸 알아챘고, 그래서 미쳤다는 확증까지 받아냈다.

더 이상 여기서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폐하, 심려치 마세요. 그는 언제나 넥서스를 위해 희생했으니까요. 지금은 그저-”

라프넬과 아더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긴 전쟁으로 인해…. 힘든 모양이에요.”

* * *

데베르는 수행인 없이 황궁을 나섰다.

바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은 황궁 문을 나서자, 왁자지껄한 웨인의 중심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밤을 잊은 이들이 승전을 축하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삼삼오오 모인 누구든 어깨동무를 한 채로 노래를 불렀다.

좌판엔 값싼 술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벌써 만취한 이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을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술집 상인들은 오랜만의 성황에 싱글벙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직 데베르만이 고요함을 간직한 채로 그사이를 걸어갔다.

보통의 사람을 훨씬 웃도는 키 탓에 종종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데베르를 훔쳐봤지만, 그게 소문의 데베르 클리프라는 것은 평민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잘생긴 귀족이겠거니 할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갔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을 넘겨 볼 요량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갔는지도 알 수 없을 즈음, 누군가 조심스럽게 데베르의 앞을 막았다.

“공작님, 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데베르는 별 대꾸 없이 차에 올라탔다. 차가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인파의 소음은 잦아들었다.

마침내 클리프 공작가로 향하는 고요한 길목에서야, 데베르는 자신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똑같군.”

늦은 밤이었지만, 전쟁을 끝마치고 돌아온 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인들은 깍듯하게 정렬을 갖추고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텄다.

그 가운데를 걸어가는 데베르는 거대한 클리프 저택을 무감한 시선으로 훑었다. 클리프 영지의 성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수도에 있는 저택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게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집사 올리버가 희끗한 머리를 숙여 제 주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주름진 얼굴에선 그에 걸맞은 노년의 온화한 분위기가 풍겼다.

“제가 없는 동안 수고가 많으셨겠군요.”

“그것이 제 일이지요.”

“아름답네요.”

“과찬이십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데베르의 칭찬에 올리버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숨겼다.

데베르는 단 한 번도 정원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어둠에 잠긴 정원과 그 길을 따라 이어지는 온실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등불을 켤까요?”

“그게 좋겠네요.”

올리버가 물러서 있는 하인에게 눈짓하자, 하인이 얼른 뛰어가 저택을 감싼 등불들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데베르는 느긋하게 하나둘씩 밝혀지는 제 저택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만약 베스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제게 예를 갖추는 집사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겠지. 어쩌면 입구에서 들어가지 않겠노라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짝 마른 입술 새로 버석한 웃음이 나왔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데베르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황량하리만치 커다란 홀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혼자 가죠.”

데베르는 뒤따르는 사용인들을 물렸다.

수십 개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복도엔 저 홀로 걷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 층으로 올라가 제일 먼저 나온 방문을 열었다. 전구가 몇 번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사위를 밝혔다.

다음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다음 방. 그다음. 다음.

데베르는 저택의 빼곡한 방의 불을 모두 켜기 시작했다. 전구가 켜지지 않는 곳은 벽에 등불을 켰다.

맨 위층으로 올라오자 제 침실이 보였다.

저곳에서 잠든 적이 있었던가.

데베르는 침실로 들어섰다. 켜지지 않는 전구를 멍하니 올려보다가, 손에 든 지포 라이터를 긁어내렸다.

동그랗게 저를 감싼 불빛 아래에서 데베르는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빈 재킷의 가슴팍을 매만지자, 그 안에 담긴 작은 알갱이가 손에 잡혔다.

안정제였다.

베스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준 그 약이었다.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데베르는 그 모든 걸 입안에 털어 넣고,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씁쓸한 약이 혀를 아릿하게 만들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선명해지기만 했다.

베스가 없다.

나의 베스 제인스가 사라졌다.

그 사실 하나만이 자꾸만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겨울꽃처럼 환한 클리프 저택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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