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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4화 (54/206)

54화

“폐하께서 또 쓸데없는 짓을 하시는구나.”

붉은 입술에서 달콤한 질책이 흘러나왔다.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이 부드러운 종이 위를 삭삭 스칠 때마다, 모시는 하녀들은 흠칫거리며 공주의 눈치를 봤다.

황금으로 도배된 널찍한 욕탕 한가운데에선 뜨거운 김이 풀풀 솟아나고 있었고, 은은한 향유 냄새는 습한 공기 속을 나른하게 부유했다.

욕탕 한쪽 벽에 반쯤 몸을 기댄 라프넬의 손에서 툭, 초대장이 떨어졌다.

황제의 낙인이 찍힌 초대장은 물기가 척척한 바닥에 닿자 속절없이 너덜거렸다.

눈을 감은 라프넬은 잠결처럼 속삭였다.

“향유를 더 부으렴.”

모시는 하녀들은 군말 없이 욕탕에 향유를 들이부었다. 값비싼 향유가 마치 물처럼 헤프게 녹아들었다.

“새로운 향이구나.”

“네, 공주님. 동방에서 들여온 향유인데, 아직 황실에만 납품되었습니다.”

“그래?”

흔치 않게 공주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라프넬은 제 팔목을 감싼 진주 팔찌를 아까 전 초대장을 떨어뜨렸을 때처럼 미련 없이 하녀의 발 앞에 떨어뜨렸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겐 넥서스 여인들에겐 없는 것만을 가져오렴.”

“네, 공주님.”

하녀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라프넬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어떤 넥서스의 여인에게서도 풍길 수 없는 향이 오직 제게서만 풍기리라 생각하자 꽤 흡족했다.

물기 어린 눈을 깜빡이며 탕에서 일어나자, 멀찍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다가와 공주의 벗은 몸을 감쌌다.

굴곡진 여체는 부끄러움 없이 제 방까지 걸어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라프넬은 귀족 시녀를 옆에 두지 않았다. 귀부인들의 티파티에선 영애들과는 우정만을 나누고 싶다 속삭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 잇속만 차리는 귀족가의 여식들에게 제 민낯을 보이느니, 차라리 천것들을 옆에 두는 게 나았다.

개나 돼지에게 알몸을 보일 때 부끄러워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치장을 시작할까요, 공주님?”

라프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익숙한 손길이 능숙하게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벌써 소란스러워.”

“네, 지금 막 군대가 웨인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황궁에서도 연회 준비가 한창이고요.”

“그렇니?”

라프넬은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바라봤다.

푸른 심연 같은 눈동자에, 찬란한 넥서스의 부귀를 뜻하는 금발까지.

“아더와 참 많이 닮았어.”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그건 자조와 비슷했다.

“아주 행운이지.”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겹겹이 색이 쌓일수록 모두가 아는 라프넬 공주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잠시.”

라프넬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공주의 입술에 붉은 덧칠을 하던 하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얼른 몸을 사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울을 보던 라프넬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머릿속에 원치 않는 얼굴 하나가 그려졌다.

답답하게 새카만 머리카락에 촌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그 여자.

베스 제인스.

“치장하라고 했지, 천박하게 꾸미란 얘기는 아니었는데.”

싸늘한 목소리에 붓을 든 하녀가 벌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저는 평소 하던 대로-”

“평소 하던 대로?”

“앗,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공주님.”

하녀는 털썩 무릎을 꿇고서는 손을 싹싹 빌었다.

라프넬은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화장대 위의 실크 손수건을 낚아챘다. 평온한 얼굴과는 별개로 우악스럽게 제 입술을 문지르는 손길엔 자비가 없었다.

순식간에 입가가 벌겋게 번졌다. 붉은 칠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서도 공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하녀들만이 아연실색해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날 보렴.”

라프넬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어린 하녀의 눈은 겁에 질려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의 공주는 너무도 화려했고,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매서웠다.

“날 천박하게 만들지 마. 알겠니?”

공주는 부드러운 손길로 하녀의 뺨을 매만졌다.

“다시 해주렴. 너만 한 솜씨가 아직 황궁 안엔 없으니.”

라프넬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애써 참으며 눈을 감았다.

황제는 언제나 그렇듯 승전고를 울리며 오는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 첫날 저녁은 오직 데베르만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을 막 끝내고 돌아온 데베르를 격려한다는 명목하에 견제하기 위해서.

오직 황족과 데베르에게만 보내진 저녁 만찬 초대장은 황제 호이든의 야심과 불신을 동시에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 우스운 꼴을 황제 하나만 몰랐다.

“공주님, 새롭게 들여온 목걸이입니다.”

하녀가 자줏빛 보석함을 내밀었다.

“넥서스 여인 중 아직 아무도 사지 못했답니다.”

꽤나 그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하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라프넬은 무감한 얼굴로 목걸이를 내려봤다. 본 적 있는 목걸이였다. 새하얀 백금 줄에 미세하게 가공된 다이아몬드가 일정하게 박힌 바로 ‘그 목걸이.’

“넥서스 여인 중 없는 것이지, 아무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지.”

라프넬의 손가락 끝이 자잘한 보석 줄을 훑었다.

“이래서 내가 당신을 놓지 못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한들 데베르 공작의 손에 먼저 들어간다. 이 단 하나의 사실이 라프넬을 분노케 하면서도 동시에 들뜨게 했다.

허울뿐인 공주 따위보다 데베르의 옆자리가 더 나은 것이라고 라프넬은 확신했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은 지혜롭게 행동했으니까.

“목걸이는 지겨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를 손안에 쥔 여자야말로 더 부러울 것이 없을 테지.

라프넬은 곱게 빗어 내린 머리에 달린 장식을 하나둘씩 빼냈다.

“어쩌면 보는 눈들이 이리 아둔한지.”

다소 밋밋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전장 병원에서의 하룻밤을 떠올렸다.

데베르에게 부는 작은 바람 하나에 요동을 했던 제 못난 모습 또한 생생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얼마나 입술을 짓씹으며 저주를 퍼부었던가. 멍청한 데베르를 향해. 순진한 척 혼을 빼놓는 베스를 향해. 그리고 그 모든 걸 바라보고만 있는 저 자신을 향해.

가져보지 못한 걸 뺏기는 끔찍한 기분을 며칠 밤이고 곱씹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일 또한 이젠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바람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인지.

그 전쟁귀 같은 남자에게 바람이 아니라 폭풍이 불더라도 상관없다는 걸 잊다니. 라프넬은 냉소했다.

그 남자는 제게 클리프의 성만 넘겨주면 된다.

라프넬 메이너에서 라프넬 클리프만 된다면 뭐든 괜찮았다.

“드레스를 가져오렴.”

하녀가 라프넬의 마음에 들 법한 드레스 몇 벌을 들어 올렸다. 느릿하게 드레스를 훑던 푸른 눈동자가 마지막 한 벌에서 멈췄다.

“색이 예쁘네.”

연하늘색 드레스를 든 하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방 전까지 공주의 입술을 칠하다 기겁을 한 소녀였다.

“그래도, 이걸 입을 정도로 내 꼴이 우습진 않잖니. 아직은.”

“그래도 수고했단다.” 라프넬은 나직한 칭찬을 덧붙이며, 제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레몬빛깔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때, 방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프넬의 손짓과 함께 문이 열리고, 다른 하녀들과 색이 조금 다른 옷을 입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치장을 돕던 하녀들이 알아서 문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여자는 라프넬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공작님께서 도착하셨답니다.”

“이곳으로 바로 오시진 않겠지.”

“네, 우선 군대를 돌아보시고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 남자는 고분고분 황궁으로 바로 올 이가 아니지.

“황제를 퇴짜 놓는 게 그분의 즐거움 아니겠니.”

누군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라프넬은 잘도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여자도 그런 공주의 말버릇이 익숙한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애는?”

“그게, 이변이 생겼습니다.”

“이변?”

라프넬은 차분히 손을 모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갈한 공주의 모습은 누군가의 뒤를 캐는 파렴치한 모습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아하기만 했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졌다니. 어디로? 누구와 함께?”

조금은 다급한 질문이 쏟아졌다.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소문으론 몰리 공작 내외가 찾고 있다곤 하는데, 아직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데베르 클리프는.”

“그분께서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풋. 라프넬은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대단한 데베르 공작께서 고작 그 여자애 하나를 놓치다니. 그 우스운 꼴을 조금 뒤에 두 눈으로 볼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다 믿을 수 없어.”

“네? 저를…. 믿지 못하신다고요?”

라프넬의 수족과 같은 이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었다.

그녀의 이름은 벨. 라프넬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부터 옆에서 온갖 시중을 들던 이였다. 그 시중엔 은밀히 남의 뒤를 캐거나, 공주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영민한 공주는 항상 비밀을 지키는 대가를 섭섭지 않게 줬고, 벨은 일개 하녀와 자신은 다르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갔다.

그런데 믿지 못하다니. 자신의 쓸모가 다해 버려지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얼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눈치 빠른 라프넬은 이를 몰라보지 않았다.

“아니. 네가 아니라 그 남자를 말이야.”

다정한 미소로 제 수족을 달랬다. 아직은 쓸만한 개를 놓칠 주인은 없으니까.

라프넬은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평소보다 덜 한 화장과 데뷔탕트 전처럼 길게 풀어 내린 생머리 덕에 유난히 그 옛날의 라프넬 메이너 같아 보였다.

어미가 살아있을 적의 라프넬 메이너.

작은 감상에 싸인 라프넬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 또한 그 남자의 자작극일 수 있어. 어디 지하실에 저 혼자만 보게 가둬놨을 수도 있지.”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나오는 말은 끔찍하기만 했다.

라프넬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는 데베르 클리프다. 그 늑대 새끼가 가련한 사냥감을 곱게 놓아줄 리 없다.

“당분간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나도 이젠 그럴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까.”

닫힌 창밖으로 막 시작되는 연회를 알리는 선율이 크게 들려왔다. 이르게 밀려오는 어둠은 하늘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젖어 드는 자신의 정원을 라프넬은 한참을 바라봤다. 그곳은 오롯이 라프넬만의 공간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라프넬은 몹시도 사랑했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고 정원을 둥그렇게 둘러싼 등불이 켜지고 나서야 굳은 다리를 움직였다.

모든 게 어둠에 잠기고, 거짓이 빛을 내는 밤.

“당신은 무슨 표정으로 앉아 계실까.”

라프넬은 이 밤이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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