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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3화 (53/206)

53화

다닥다닥 붙어있던 막사가 철수한 공터는 황량했다. 새삼 찬란한 청춘들이 이 삭막한 곳에서 얼마나 목숨을 걸고, 잃었는지를 떠올리자 콜린스는 침음을 참을 수 없었다.

침통한 눈동자는 아직 전시의 모습을 잃지 않은 유일한 막사로 옮겨갔다.

그곳은 데베르의 것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데베르는 전쟁을 벗어나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건 군대장의 의무이자, 지옥 같은 삶의 방식이었다.

이젠 밖을 지키는 이도 없는 막사는 쓸쓸하게만 보였다.

입구로 가까이 갔지만 안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데베르 대장. 들어가도 되겠소.”

큼큼, 헛기침을 하며 콜린스는 대답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막사는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는지, 안엔 그 흔한 의자 하나 없이 협탁만이 남아있었다.

그 위에 놓인 즐비한 종전 서류들을 챙기던 데베르는 단정한 모습으로 콜린스 공작을 맞았다.

“아직 가지 않으셨습니까.”

콜린스는 데베르의 의연한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하지만 이젠 저도 그저 늙은이일 뿐인지 데베르의 얼굴을 읽을 수는 없었다.

문득 데베르를 선대 카시우스의 망령이라 부르는 멸칭이 떠올랐다.

지독하게 고요한 그의 얼굴은 기억 속 카시우스 공작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네가 아직 떠나지 못한 이유와 같지 않겠니.”

흩어진 서류를 한곳에 모으던 데베르의 손이 멈칫했다.

“저는 군대장입니다. 쉽사리 떠날 수는 없습니다.”

낮은 협탁 탓에 약간 굽어있던 데베르의 어깨가 천천히 펴졌다. 빳빳하게 당겨진 셔츠 이음새에 긴장이 서렸다.

“의료진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셔도 됩니다.”

콜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려나. 작은 고민이 스쳤다.

“베스를 보지 못했다.”

콜린스는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베스가 보이지 않아.”

“그런가요.”

데베르는 중얼거렸다. 그러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라졌구나.

확신에 또 다른 확신이 더해지자 마음은 오히려 담담해졌다. 그 이전에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네가 알지 못한다면-”

“납치가 아니라면 도망일 수밖에요.”

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데베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외출일 수도요. 전장의 간호사들은 모두 외출을 허가받아야 한다죠. 물론, 이건 허락 없는 외출이긴 하지만.”

데베르는 비식거리며 서류를 한데 모아 협탁 위에 탁탁 쳤다.

허락 없는 외출이라니. 제가 뱉어놓고도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실없는 소리일지언정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외출하듯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가끔은 홀로 바람을 쐬는 여유도 필요한 거겠지.

그의 손 아래에서 어지럽던 서류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다음 전쟁부턴 의료진의 외출에 군대장의 허가도 추가해야 할 것 같네요.”

종전의 기운이 퍼지기도 전에 다음 전쟁을 기약하는 데베르의 말에 콜린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짓을 더 할지 말지는.”

데베르는 짧게 미소 지었다.

“베스가 정하는 거겠지만요.”

그는 흠 없이 예의 바른 공작의 모습으로 콜린스를 밖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면 마지막 차가 옵니다. 공께선 저와 함께 가시죠.”

달리는 차 안엔 운전병을 제외하곤 데베르와 아더, 콜린스만이 타고 있었다.

황족과 공작을 태운 운전병은 바짝 얼어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그가 모시는 세 사람의 기류는 바깥의 공기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데베르는 창턱에 팔꿈치를 올린 채 지나가는 풍경을 의미 없이 눈에 담았다.

이젠 터만 남은 후방병원으로 이어지는 숲길 어귀에서야 데베르는 이곳이 베스를 처음 만난 곳임을 떠올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닌 새하얀 햇살에 잠긴 숲은 평화롭기만 했다.

이곳에 베스가 있었다.

주저앉아 주사기를 찾고. 어리고 아픈 적군을 살리려 애쓰고.

제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손바닥을 내밀고.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원망스런 눈길을 숨기지 못하며 단추를 풀고.

그 순간, 차창 밖으로 유난히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스쳤다.

그래, 그 향.

날 미치게 한 건 그 향이지.

그날, 어둠 속에서 제게 쏟아지듯 부어지던 베스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 검은 머리칼이 지금도 생생했다.

이 길을 너도 지났을까.

차는 빠르게 숲을 벗어나 이어지는 마을로 향했다.

넌 어디로 갔을까.

데베르의 생각은 계속해서 베스의 뒤를 쫓았다.

비록, 그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을지언정 말이다.

* * *

차는 쉬지 않고 웨인으로 달려갔다.

“다 왔나 보네요.”

지독한 적막을 깨고 아더가 입을 뗐다. 잔뜩 메마른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래, 정말 웨인이구나.”

안 그래도 제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사시사철 화려한 웨인은 종전의 환대까지 겹쳐, 아직 수도 경계에도 가지 않았는데 떠들썩했다.

군용차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난 커다란 나뭇가지들 사이로 금빛 장식이 한가득했다.

언제나 불변하는 가치를 뜻하는 금은 넥서스의 상징이었다. 한겨울에 황금 꽃이 핀 모습은 넥서스의 건재를 과시하기에 적격이었다.

수도 근처가 고향인 병사들이 제 가족과 상봉하느라 찻길이 잠시 마비됐다. 굳이 누군가 입을 열지 않아도, 바깥의 음악 소리와 헹가래 소리가 지겨운 시간을 대신 채워줬다.

“아유, 저걸.”

운전병은 군대장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다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데베르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놔둬.”

보닛 앞의 사람들은 그들이 막고 있는 차에 감히 누가 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 자식, 혹은 애인과 눈물 어린 포옹을 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린 이들이잖아.”

저 만남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렸던가.

데베르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제 시간을 낭비해 줄 수 있었다. 군대장으로서 마지막 아량이기도 했다.

* * *

타닥.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 하나가 급하게 달리는 열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쓴 로브 탓에 인영은 남잔지 여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헐겁게 늘어지는 로브도 여린 몸 선까지 숨겨주진 못했다.

종전 탓인지 열차는 평소보다 붐볐다.

닭이며 오리 따위의 작은 가축과 인파가 한데 섞여 그야말로 난리 통이었다.

인영은 그 틈 사이를 파고들며 계속해서 열차 칸을 전진해나갔다. 툭툭 덩치 큰 사람들에 의해 어깨가 치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되먹지 못한 이들이 인영에게 시비를 걸어도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마침내 열차의 가장 마지막 칸에 와서야 인영은 고개를 들었다. 밭은 숨을 토해내는 작은 턱이 가늘게 떨렸다.

승객들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이따금 나오는 열차 칸 밖은 추운 날씨 탓인지 아무도 없었다.

인영은 칼 같은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추운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사나운 바람이 흐늘거리는 로브 모자를 휙 낚아챘다. 그 바람에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허공에 나부꼈다.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하얀 얼굴에 매서운 바람이 스쳤다.

인영은 베스였다.

베스는 잔뜩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살면서 이렇게 미친 듯이 뛰어본 적이 있었나.

아, 그때.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지끈거리는 머리 위로 스쳤다. 베스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쭈그려 앉아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자 찬 바람은 덜했지만, 눈가는 자꾸만 시려 왔다.

시커먼 로브 자락 위로 동그랗게 눈물 자국이 났다.

지금쯤이면 모두 웨인으로 갔을까.

주머니 안의 브로치가 아프게 손바닥을 찔렀다. 베스는 자신에게 벌을 주듯 브로치의 뾰족한 면을 계속해서 꾹꾹 눌렀다.

차라리 피라도 나면 정신이라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뛰었는데도, 이토록 차가운 바람을 맞는데도 왜 이리 모든 게 희미하기만 한 걸까.

내가 사라진 걸 알고 놀랐을까.

실망했을까.

분노했을까.

아니면, 그저 잊어버렸을까.

잊다니. 마지막 질문은 조금 아팠다.

늦은 새벽 어귀에서야 데베르는 잠이 들었다. 허리에 감긴 손을 치워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항상 예민한 짐승처럼 기민하던 남자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 그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봤었다.

차라리 지금 깨어났으면. 사라질 나를 붙잡아줬으면.

이기적인 소망을 곱씹으며 온전히 자신을 믿겠다 말하던 남자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옷을 챙기고 어두운 길을 내달리면서도 온 정신은 홀로 남아있을 그에게 가 있었다.

‘베스?’

그 걸음을 막은 건 아더였다.

‘이 새벽에 무슨 일로.’

베스는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하는 편지 보급차의 시간을 미리 확인해둔 참이었다. 주머니 속엔 몰리 부인의 서명이 적힌 거짓 확인서까지 들어 있었다.

이대로 보급 차를 타고 해가 뜨기 전에 기차역에 도착해 열차를 타야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더는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아더에게 편지 뭉치와 소포를 전달한 운전병은 깍듯이 사령관에게 경례하곤 벌써 차에 시동을 걸었다. 베스는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차 문을 덥석 열자, 아더가 급하게 손잡이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베스는 간절하게 그를 올려봤다.

마음이 급해 제 손바닥 위에 펜을 휘갈겼다.

[제발 모른 척해주세요.]

‘모른 척….’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아직 남은 잉크 자국 위를 또 다른 말이 덮었다.

아더는 멍하니 그녀의 작은 손을 바라봤다. 베스는 천천히 차에 올랐다. 그러자 문손잡이를 쥔 아더의 손이 미끄러졌다.

차는 그렇게 막사에서 멀어졌다.

베스는 고개를 들고 축축한 눈을 깜빡였다. 건조한 바람이 금세 눈물을 앗아갔다.

열차는 웨인과 정반대 방향으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꼭 제가 데베르의 막사를 뛰쳐 나왔던 것처럼.

그 순간, 끼익하고 열차 칸 문이 열렸다.

베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으레 이곳으로 나오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기 위함인데도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베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귀도 닫아버릴 수 있었으면.

“아가씨. 안에 계시지 않아 오래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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