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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2화 (52/206)

52화

데베르는 제 위압감에 얼어붙어 있는 작은 방 안을 둘러봤다.

천장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온 나무 골조는 썩어 나는 짐승의 뼈 같았고, 텅 빈 침대 프레임 위의 하얀 침대보는 마치 영안실 같았다.

가볍게 침대보를 쓸자, 시체의 거죽처럼 차가운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흐음, 데베르는 허밍 같은 숨을 길게 뱉어냈다. 동요 없는 표정은 감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꼼짝없이 굳어 있는 아더를 지나쳤다.

“숙녀분들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데베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방안을 가로질렀다. 뚜벅뚜벅 내지르는 걸음을 따라 모여든 간호사들이 길을 텄다.

“데베르!”

아더의 부름에 문득 걸음을 멈춘 데베르는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텅 빈 베스의 침대 언저리였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네? 그러세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엉겁결에 공작의 부탁에 응했다.

데베르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퍽 온화해 보일 정도로 평온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날 선 눈동자가 만들어내는 부조화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베스 제인스 양의 침대 옆에 쓰레기가 있더군요. 함께 버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쓰레기? 공작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단어에 모두의 고개가 베스의 침대로 향했다. 데베르는 마지막 대답은 듣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데베르!”

마침내 공작과 황자가 이젠 완전히 고장 나버려 덜렁거리는 문을 세차게 닫고 나서야, 간호사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작은 소란이 피어올랐지만, 그 누구도 답을 내릴 순 없었다.

“쓰레기가 뭐야?”

“어? 군화?”

“누구 거지?”

베스의 침대 옆엔 본 적 없는 남성용 군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상해….”

아이네스는 중얼거렸다.

오직 그녀만이 무언가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늘 아침에 베스 본 사람 있어?”

물음의 끝이 떨렸다. 아이네스답지 않은 예민한 목소리가 재차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희 중에 베스 제인스 본 사람 있냐고!”

* * *

데베르는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곳에 베스가 없다는 걸 안 이상 의미 없는 걸음이었다.

평소 인적이 드문 병원 후문 뜰에도 짐과 남은 환자들을 실으려는 군용차량이 그새 즐비하게 들어찼다.

북새통 같은 인파를 뚫고 데베르는 걸어갔다.

어디를 향하는지는 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전쟁통에 구른 몸은 알아서 주인을 위해 움직여 주었다. 지금은 지겹도록 몸에 익은 군대장 노릇을 해야 할 때였다.

“데베르! 데베르 클리프!”

막사로 가는 숲길 중앙에서 아더가 거칠게 데베르의 팔을 잡아챘다.

“사령관.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아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주 본 친구 놈의 얼굴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

“베스. 베스를 찾는 거 아니야?”

그 물음을 듣고 나서야, 데베르의 눈썹 한쪽이 가볍게 들썩였다. 하지만 그 감정이 당황스러움이나 불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방관자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 여자는 여기 없어.”

데베르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꼭 사라지는 베스를 직접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찾지 않아?”

“내가 찾지 않을 것 같아?”

데베르는 이젠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대화가 의미 없이 빙빙 돌고만 있었다.

아더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 여자가, 그러니까 베스 제인스가.”

아더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가자, 둘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나부꼈다.

“자네를. 너를. 떠난 거일 수도 있잖아.”

그 순간, 아직 전초선에 남아있던 겨울새들이 푸드덕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작은 소란에 몇 개 남지 않은 나무 잎사귀들이 파들거리며 떠는소리가 고요한 숲속을 울렸다.

데베르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벌써 저만치 하늘로 날아올라 간 새들의 자취를 쫓았다. 점점 작아지던 새들은 마침내 작은 점처럼 보였다.

저 새들은 웨인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넥서스의 모든 겨울새는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웨인으로 향하니까.

웨인은 겨울이 혹독하리만치 긴 넥서스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작은 새까지도 그것을 알았다.

가장 시린 곳을 떠나가는 영리한 새들을 데베르는 오래도록 지켜봤다.

“내가 겪은 인간들은 짐승과 다르지 않아.”

짐승이라니. 아더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 제각기 본능적인 습성이 있더라고.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나쁜 거든’이라고 말하며 데베르는 저보다 조금 작은 아더를 내려봤다. 오만하게 내리깔린 눈동자는 제국의 황자조차 제 발아래로 보는 것처럼 보였다.

아더의 목덜미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데베르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날개를 꺾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발을 꺾을 수도 없지만.

데베르는 실소하며 눈발이 그친 회색빛 하늘을 다시 한번 올려봤다. 그곳엔 베스가 사라졌듯이 겨울새 또한 벌써 모습을 감춘 채였다.

‘빠르기도 하시지.’

잽싸게 모포를 걸치고 새벽 어스름이 깔린 막사를 뛰어나가던 베스의 뒷모습이 텅 빈 하늘 위로 겹쳤다.

“아직은.”

어젯밤까지만 해도 베스를 뜯어먹을 듯이 어루만졌던 데베르의 손이 제 가슴팍으로 향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브로치가 만져져야 할 곳은 밋밋하기만 했다.

“어쨌건 돌아온다는 표시는 남겼거든.”

데베르는 아더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꼭 격려하는 듯한 두드림이었다.

“자네 말대로 오늘은 변수가 많은 날이잖아. 작은 소동 정도는 넘어가 줘야 관대한 군대장이지.”

데베르는 아더를 남겨 둔 채, 홀로 막사로 향했다.

아더는 굳은 듯이 그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끔찍한 고요를 체감하는 순간은 언제고 외로웠다.

* * *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이 막사와 병원에 가득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수다 소리가 황폐한 전초선을 들뜨게 했다.

아이네스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병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항시 닫혀 있던 병원장실 문도 오늘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네스?”

안에서 마지막 짐을 챙기던 몰리 부인이 밖에 서 있는 아이네스를 알아봤다.

아이네스는 곧장 부인에게로 향하다 구석 소파에 앉아 있는 콜린스를 보고 얼른 예를 갖췄다. 콜린스는 괜찮다는 표시로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부인은 심상치 않은 아이네스의 얼굴을 보곤 하던 일을 멈췄다.

“무슨 일 있니?”

“베스가 없어요.”

아이네스는 두서없이 본론부터 내뱉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다들 베스가 사라진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탓에, 저 혼자 병원이며 숙소 근처를 뛰어다니다 온 참이었다.

“베스가 보이지 않아요.”

“아니, 베스가 보이지 않는다니?”

베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에 콜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찾아는 본 거니?”

“이제 곧 의료진을 태울 마지막 차가 오는데 어디에도 베스가 없어요.”

아이네스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이네스. 날 보렴.”

부인이 눈물이 어룽진 아이네스의 뺨을 살며시 쥐었다. 주름진 부인의 눈가가 날카로워졌다.

“어젯밤까진 함께 있었니?”

아이네스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어요. 어제는 저희 숙소도 너무 어수선했고. 그래서, 흑, 제 잘못이에요.”

몰리 부인은 제 남편을 돌아봤다.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콜린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코바흐는 아니겠죠…?”

부인은 최악의 가정을 물었다.

콜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금테 안경 속의 침통한 눈동자는 며칠 전 데베르, 아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코바흐일 수는 없어요. 데베르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하게 경계를 세우고 있으니까. 그리고 베스는-”

콜린스는 남은 말을 삼켰다.

제 부인은 아직 데베르와 베스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는 이곳에 도착한 첫날부터 알아챘다.

데베르의 눈길이 베스에게 가 있다는 건 아마 암암리에 병사들 사이에 퍼져 나갔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데베르의 여자를.

그 누구도 베스를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혹시, 오늘 데베르 대장은 봤니?”

콜린스는 에둘러 물었다.

아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도 베스를 찾으셨어요. 베스를 이른 아침부터 찾으시는 게 뭔가 이상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거면 어쩌죠?”

데베르도 베스를 찾는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상찮았다.

“이것 참.”

콜린스는 거칠한 턱수염을 벅벅 쓸었다.

데베르조차 베스를 찾는 거라면 이건 베스의 독단적인 행동일 수 있다. 어떻게 남모르게 전장을 빠져나갔는지, 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네스! 콜린스 아저씨!”

열린 창 밑에서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올라왔다. 곧이어 경쾌한 클랙슨 소리도 들려왔다.

“병원장님! 내려오셔야 합니다! 차가 도착했어요!”

병사의 굵직한 목소리가 그들을 재촉했다.

“베스는 어쩌죠?”

콜린스는 부인과 아이네스의 어깨를 나란히 두드렸다.

“당신은 아이네스하고 먼저 가봐요. 난 남은 인원들과 함께 베스를 찾아보고 마지막으로 갈 테니.”

그래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두 여자를 향해 콜린스는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베스가 얌전한 듯 보여도 엉뚱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잖니. 내가 책임지고 찾아오마. 몰리 가의 명예를 걸고.”

그의 장난스런 말을 듣고 나서야, 부인과 아이네스는 짐을 챙겨 들고 병원장실을 나섰다. 그래도 불안한지 몇 번 뒤를 돌아보는 그들을 향해 콜린스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창 밑으로 남은 간호사들이 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그제야 콜린스는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데베르 녀석도 아직 떠나지 않았을 테지.”

콜린스는 작은 셈을 하며 막사로 향했다.

“베스 이 녀석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베스는 듣지 못할 나직한 탄식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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