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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1화 (51/206)

51화

이른 밤부터 시작된 열기는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데베르는 품 안의 여린 여체를 다시 한번 제 쪽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그의 손길을 따라 몇 번이고 무너지고 매달리던 여자는 지칠 대로 지쳤는지 미동도 없었다.

데베르는 툭 튀어나온 마른 날개뼈 위에 입술을 묻었다.

“베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베르는 한층 더 짓궂게 입술을 벌려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하얀 등 위에 그가 만든 열꽃이 또 하나 새겨졌다.

“자?”

차분히 오르내리는 숨이 전해졌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데베르의 낮은 웃음소리가 바깥에 내리는 눈처럼 소복이 쌓였다. 베스의 부드러운 머릿결에 고개를 기댄 데베르는 저만이 맡을 수 있는 이 여자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갈증은 끝이 없었다.

취하고 싶은 대로 취할 수만 있다면 제 무엇이든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짐승 같은 이 욕구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도, 어떻게든 눌러 내리게 하는 것도 결국 이 여자라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단단히 미쳤구나.

데베르는 인정했다. 자신은 미쳤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대가는 달콤했다.

이 여자가 제 품에 안겨있으니까.

“베스.”

대답 따위 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말하지 못한다는 게 이토록 저를 즐겁게 할 줄이야.

이 여자가 알게 된다면 질겁하며 도망칠 생각을 하겠지만. 숨기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났는데.

“가지 마.”

경고 같은 말이었다.

“절대로.”

고집스런 말은 기어코 끝을 맺었다.

“날 버리고 갈 생각하지 마.”

경고를 던진 이치고는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감돌았다. 데베르는 베스를 감싸 안은 팔에 단단히 힘을 준 채,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데베르는 막사 밖의 소란에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품 안에서 사라진 온기에 눈을 떴다.

얌전히 그에게 안겨있어야 할 베스가 보이지 않았다. 데베르의 시선이 느릿하게 막사 안을 훑었다. 작은 간이침대 끝부터, 벗긴 옷이 나뒹굴던 바닥, 여자가 제게 입을 맞추던 좁은 협탁까지.

그 어느 곳에도 베스는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도착한 짐차들과 이송되는 병사들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예민한 귓가에 거슬렸다. 데베르는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눈가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새카매진 시야 사이로, 어젯밤 어두운 숲길을 홀로 걸어오던 베스의 모습이 겹쳤다.

“고분고분할 턱이 없지.”

대체 언제 깨서 숙소까지 간 건지.

숲길에서 남녀가 정염에 휩싸인 소리를 짐승 소리로 착각해 겁을 집어먹을 때는 언제고, 그 길을 새벽에 혼자 냅다 달렸을 베스의 모습을 상상하자, 데베르는 작게 실소했다.

베스가 사라진 걸 알아챘을 때 순간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다시금 맑아졌다.

몸을 일으키자 녹슨 간이침대가 삐걱댔다. 그때, 청량하고 나직한 파열음이 데베르를 멈추게 했다.

잠시 허공에 멈추었던 눈동자가 바닥으로 향했다.

그곳엔 흙먼지가 나뒹구는 바닥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데베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저건 저기 있어선 안 된다.

데베르는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스르륵 그의 손가락에 감겨드는 반짝이는 줄이 빛을 발했다.

그 끝에 매달린 얼룩진 열쇠도 그를 조롱하듯 달랑거렸다.

“베스 제인스.”

이름을 끊어먹을 듯 되뇌는 데베르의 얼굴은 지금껏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 * *

“어머.”

숙소를 나가려던 아이네스는 예상치 못한 방문자에 깜짝 놀라 발을 뒤로 물렸다.

“베스 제인스 양을 찾아왔습니다.”

인사치레의 안부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을 묻는 공작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무언가 달랐다.

아이네스는 뒤를 한번 돌아봤다. 그러자 숙소 계단참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공작의 방문을 훔쳐보는 간호사들이 보였다.

아이네스는 슬그머니 문을 밀어 닫았다.

“베스를 못 보셨어요?”

데베르는 의문이 피어오른 백작가 영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베스를 그에게서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데베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없나 보군요.”

“함께 계신 줄 알았어요.”

아이네스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아이네스도 어렴풋이 베스와 데베르 공작의 관계를 눈치챈 이 중 하나였다. 게일이 그녀에게 얼핏 귀띔해준 덕도 있었다.

“병원으로 갔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아이네스의 목소리에서 사라진 친구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데베르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후미진 숙소 귀퉁이를 살폈다.

저 귀퉁이를 돌면 나오는 작은 창가 밑에 오래도록 서 있던 날이 있었다.

그곳에 베스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데베르는 의미 없는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알겠습니다.”

“바쁜 날이라 벌써 병원에 가서 교수님을 돕고 있을 수도 있어요.”

데베르는 깔끔하게 물러나 묵례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네스 또한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면서도 공작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등을 돌려 병원 후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걸음에 조급함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느긋한 걸음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보아온, 칼 같은 걸음으로 목표물을 향해 직진하는 군대장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상해….”

그저 자신만의 직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데베르 공작이 제 친구를 찾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아마 베스라면 벌써 일손을 돕고 있을 게 뻔했다.

곧 만나겠지. 아이네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웨인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은 떠나는 날만큼이나 변수가 많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 * *

데베르가 병원 후문으로 들어가자, 짐을 옮기던 병사들이 재빠르게 경례했다. 데베르는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로비를 걸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 있었다. 저를 흘깃대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데베르는 오직 한 명만을 찾고 있었다.

한때 파티를 했던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낡아빠진 건물 골조와 함께, 이 어둑하고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을 밝히며 다닌 여자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군 병원에서 데베르의 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데베르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약제실로 들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아직 치우지 않은 약 찬장과 테이블을 훑자, 알록달록한 사탕이 든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약을 끊고 싶다고, 그러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맹랑한 거짓말을 했던 곳이었다.

기억이 있는 곳에도 베스 제인스는 없었다.

“아니, 공작님. 여긴 어쩐 일로.”

막사 왕진을 자주 오던 닥터 바든이 알은체하자, 데베르는 희미한 미소로 전장의 의료진을 대했다.

“찾는 게 있습니다.”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것뿐이었지만, 제국 공작의 여유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그 말끔한 얼굴에 바든은 괜히 긴장한 어깨를 쭈뼛거렸다.

“제가 대신 찾아드릴까요? 공작님보다는 이곳을 아니까-”

“아뇨.”

찰나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제가 찾아야 하는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아유, 제가 괜히.”

바든은 민망할 정도로 매정한 그의 대꾸에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내가 찾아야 하는 것.

데베르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의 조급함은 딱 그 혼자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층을 걸어갔다.

베스는 없었다.

삼 층을 뒤졌다.

베스는 보이지 않았다.

사 층. 그나마 있던 베드마저 비워져 텅 빈 격리실에 선 데베르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쥔 손아귀 속에서 열쇠가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그곳에 남은 것은 데베르, 그 하나뿐이었다.

창가로 걸어갔다.

창을 열자 하얀 설원 위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보였다. 작은 장난감처럼 움직이는 그들을 지켜보던 데베르는 돌연 등을 돌렸다.

고요한 복도에 뚜벅이는 군홧발이 살벌하게 내리 찍혔다.

올라갈 때와 판이한 모습으로 내려오는 군대장의 모습에 지레 겁먹은 병사들은 불똥이라도 튈세라 몸을 사렸다.

정문으로 나가자마자 눈에 보이는 수송 차량의 운전병을 끌어내렸다.

“엇, 대, 대장님.”

“데베르!”

운전석에 올라타려는 그를 급히 붙잡은 건 아더였다.

아더는 막사로 이어지는 숲길 어귀를 뛰어오던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바닥에 나동그라진 운전병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며 아더가 물었다. 살짝 높은 언성이었다.

데베르의 시선이 아더의 손에 들린 편지 뭉치로 향했다. 무언가에 꽂힌 듯 그 편지 뭉치를 응시하던 데베르가 입을 뗐다.

“사라졌어.”

“뭐가?”

아더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잘생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데베르는 여전히 편지 뭉치에 뭐라도 있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베스 제인스가.”

천천히 데베르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아침 햇살과 어울리지 않는 짙은 재색 눈동자 빛이 형형했다.

데베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닥터 바든을 향하던 신사적인 공작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건 어딘가 뒤틀린 사내의 미소였다.

“그래, 사라졌구나.”

“무슨 소리야.”

데베르는 바닥에 차 키를 툭 던진 채, 그대로 간호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대충 편지 뭉치를 주위 부하에게 넘긴 아더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쿵.

데베르는 간호 숙소 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군대장과 황자에 몇몇 남아있던 간호사들이 나직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뿐이었다.

데베르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짐이 빠져나간 숙소는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공작님?”

아직 숙소에 남아있던 아이네스가 놀란 얼굴로 데베르와 아더를 번갈아 봤다.

데베르는 방의 유일한 창가 밑의 침대로 향했다. 새하얀 침대보가 정리된 침대엔 티끌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엔 군화 한 켤레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데베르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데베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더는 흠칫 손을 물렸다.

“데베르, 무슨 일이야.”

데베르는 웃고 있었다.

그 기이한 모습에 아더는 황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도망쳤구나.”

“어수선하니까 보이지 않는 거겠지. 철수 날이 북새통인 걸 한두 번 겪었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데베르의 비스듬한 고개 끝이 아더를 향했다.

아더의 뒤편으로 벽에 달린 작은 거울이 데베르를 비추고 있었다. 반듯한 제복 가슴팍에 달려 있어야 할 브로치가 보이지 않았다. 데베르 클리프임을 상징하는 제국 문양의 금 브로치가.

거울 속, 그의 모습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텅 빈 표정으로 입꼬리만 당겨 문 꼴이라니.

가슴팍의 장식이 빈 제 모습을 응시하던 데베르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비로소 모든 게 선명해졌다.

“역시. 믿는 건 무리였나.”

베스 제인스가 도망쳤다.

데베르 클리프의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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