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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50화 (50/206)

50화

베스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데베르의 손에서 벗어났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을 대신해 협탁 아래로 숨은 손이 낡은 치맛자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데베르는 협탁 위에 턱을 괬다. 눈앞의 여자를 시험하듯 가늘어진 눈매 끝이 날카로웠다.

“평소답지 않네.”

조금은 예민한 기색이 담긴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협탁을 두드렸다.

말 그대로였다. 베스 제인스는 평소답지 않았다. 숲길에서의 실없는 웃음 하며, 의미 없는 질문까지. 반짝이던 까만 눈은 어딘지 모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믿어야지.”

그 말에 베스의 고개가 설핏 들렸다.

“믿을 수밖에 없지.”

자리에서 일어난 데베르가 천천히 협탁을 돌아 베스 곁에 섰다. 위압적인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하지만 이내 그 그림자는 점점 크기를 줄여나갔다.

베스는 제 곁에서 한쪽 무릎을 굽힌 남자를 돌아봤다. 조금 아래에서 시선을 맞추는 그가 보였다.

“내가 널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잖아.”

다정한 채근이 이어졌다.

“대답은 생각해봤어?”

베스는 홀린 듯이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안엔 저만이 온전히 들어 있었다.

유난히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 날이었다. 같은 시선 속에 같은 이가 들어있는데도, 그 온도는 확연히 달랐다.

베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예상 밖이었는지 남자의 한쪽 눈썹이 가볍게 까딱였다. 휘어지는 눈꼬리 끝에 웃음기가 담겼다.

“그래서, 대답은.”

데베르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훅 끼쳐오는 베스만의 향이 코끝을 아찔하게 간지럽히고, 머지않아 미온한 입술이 그의 위로 겹쳤다.

다시 고개를 든 베스의 눈은 심야의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정말… 평소답지 않네.”

여자의 한쪽 뺨을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다. 굳은살 박인 손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베스가 그 손에 기대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말캉한 감촉이 더 선명하게 그에게 와닿았다.

“자꾸 날 괴롭히지 마.”

투정 같은 그의 말에 베스는 푸스스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마디가 선명한 손이 웃는 여자의 얼굴을 새기듯이 더듬었다.

볼록한 이마, 적당히 휘어진 눈매, 온기를 머금어 발그레한 뺨, 그리고 한층 열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까지.

건조한 손끝에 설원의 열매 같은 입술이 몇 번 스쳤다. 목이 말랐다.

“얼마나 달콤하게 거절하려고.”

멍한 중얼거림이 데베르의 혀끝을 맴돌았다.

베스는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쌌다. 작은 손에 그를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을 주겠다는 듯 선선히 제 손을 따르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까 전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제 입술을 포개자, 그의 목울대에서 침음 같은 신음이 들렸다. 몇 번을 오가는 열기 속에서, 이성을 잡으려는 듯 의자 등받이를 꽉 쥔 데베르의 손등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다.

“안돼.”

벌떡 일어난 데베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줄기를 타고 새파란 핏줄이 형형하게 일어섰다.

“데려다줄게.”

자리를 피하는 그의 옷깃을 베스가 얼른 잡았다. 데베르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베스는 천천히 그를 뒤로 밀어냈다. 몇 번인가 밀려난 데베르의 군화 뒤축에 철제 프레임이 닿았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쉰 베스는 결심한 듯 그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밀어냈다.

털썩 침대에 주저앉은 데베르의 눈동자가 정염으로 일렁였다.

“베스.”

[자고 갈래요.]

베스는 단단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후회는 없었다.

“너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타이르는듯한 말에 베스는 대답 대신 툭,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빈틈이라곤 없이 꽉 채워져 있던 데베르의 셔츠 맨 위 단추가 풀렸다. 눈에 띄게 튀어나온 목울대가 선명하게 울렁였다.

툭, 두 번째 단추를 풀자 잔뜩 힘이 들어간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세 번째 단추를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느슨해진 셔츠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온 붕대가 보였기에.

입술을 꾹 깨문 베스가 세 번째 단추를 풀기 직전, 데베르는 낚아채듯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풀썩, 그의 무릎 위로 쓰러진 베스의 몸이 빙글 돌려졌다. 낡은 매트리스 위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성급하게 겹친 입술 사이로 데베르가 침범했다. 집요하게 저를 괴롭히는 혀끝에 베스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채 모자란 숨을 삼키기도 전에, 데베르는 제 숨을 그 위로 겹쳤다.

조금 전 베스의 입맞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열기가 덧대진 키스였다.

고요한 막사 안에서는 성마르게 부딪히는 입술이 내는 질척한 타액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을 베스를 괴롭히다 살짝 입술을 뗀 데베르가 속삭였다.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

스칠 듯 말 듯 한 입술이 코앞에서 베스를 간지럽혔다. 데베르는 정말 괜찮다는 듯 콧잔등을 한 번 찡그렸다.

“정말로.”

참기 힘든 약속이었지만, 지킬 수밖에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데베르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구불거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감겨들었다. 그 부드러운 촉감에 충동질하는 마음도 한결 누그러들었다.

반쯤 굽힌 팔을 들어 올리자, 제 아래에 누운 베스의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순진한 사슴 같아 데베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제가 짐승 같단 소리이기도 했다.

어쩌려고 그리 대담하게 행동한 건지.

데베르는 이쯤에서 물러날 것을 예상하고, 불쑥 치밀어오르는 아래의 욕정을 눌러 내리려 애썼다.

그런 노력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자신을 안아오는 베스의 품에 속절없이 고개를 묻은 데베르는 숨을 멈췄다.

잔뜩 예민해진 등 위로 작은 손가락이 톡톡, 그를 불렀다.

“응. 듣고 있어.”

빳빳한 셔츠 위로 부지런히 베스의 목소리가 그려졌다. 데베르는 눈을 감은 채, 그 목소리를 더듬었다.

[나는]

데베르는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품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당신을]

움찔하는 근육 사이사이로, 새겨진 그의 흉터 사이사이로 베스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좋아해요]

아, 데베르는 베스의 질문을 떠올렸다. 나를 믿냐고 하던 그 맹랑한 질문을.

내가 어떻게 너를 안 믿겠어.

질 것이 분명한 전투였다. 몇 번이고 이 작은 여자 앞에 굴복할 게 분명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데베르는 베스의 앙증맞은 귓가에 입술을 문질렀다. 움찔하는 여자의 귓바퀴에 대고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젠 싫다고 해도 안 돼.”

달콤한 경고이자, 긴 밤을 알리는 신호였다.

베스의 갸름한 턱을 타고 자잘하게 키스하던 입술은 흰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목적이 분명한 손은 차분하게도 원피스 단추를 풀어나갔다.

여린 빗장뼈로 내려간 입술은 이내 하얀 슬립 위로 옮겨갔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베스의 갈비뼈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추워?”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끈질기게도 베스의 몸에 묻은 입술은 떼지 않은 채 데베르가 물었다.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스러운 열감이 계속해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데 추울 리가.

타인이 만질 리 없다고 생각한 곳에 데베르의 손이 닿았을 때, 베스는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제 어깨를 잡은 손에도 깊게 입술을 묻었다. 제 손바닥을 핥아 오르는 그에, 베스가 새빨개진 손을 얼른 물렸다.

경악에 찬 베스의 얼굴을 보는 데베르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비틀렸다.

“갈 길이 먼데. 베스 제인스 양.”

참으로 신사다운 정직한 말투였다. 그게 더 베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여린 발목을 쥔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종아리와 가녀린 허벅지 위로, 마디 굵은 손이 제 존재를 밝혔다.

베스의 입에서 밭은 숨이 터졌다. 단단히 그녀의 허벅지를 쥔 데베르가 고개를 숙였을 때, 베스는 울 듯이 그의 어깨를 다시 쥘 수밖에 없었다.

키스할 때보다 더 집요하게 그가 따라붙었다. 몇 번 할퀴듯이 그의 어깨를 붙잡던 손에서 이내 힘이 빠졌다.

“아플 수도 있어.”

물기 어린 베스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데베르가 속삭였다. 이내 데베르의 목에서도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은 신음이 뱉어졌다.

베스는 그저 그를 끌어안은 채, 제 안으로 들이닥치는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정돈되지 않은 숨이 간헐적으로 턱턱 목구멍을 막았다.

데베르가 움직일 때마다, 간이침대의 낡은 철제 프레임이 요란하게 삐걱댔다.

빠듯하게 제 안을 채운 데베르에, 베스의 입술이 만개한 꽃잎처럼 벌어졌다. 그리고 데베르는 그 틈을 놓칠 남자가 아니었다. 위도, 아래도 그가 채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아.”

반듯하게 가로지른 빗장뼈 아래의 둔덕을 움켜쥔 그의 손이 정점을 건드릴 때마다, 베스의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숨소리 또한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베스… 베스…….”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가감 없이 전해지는 흥분에 베스는 아득해지는 이성을 붙잡았다. 어느 곳 하나 온전한 곳이 없었다.

데베르 또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열감에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지만,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기만 했다. 저와는 다른 부드러운 여체가 닿을 때마다 아래의 열기는 달아오르기만 했다.

잔뜩 성난 근육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소될 듯하면서도, 결코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이 자꾸만 데베르를 급하게 만들었다.

점점 격렬해지는 허리 움직임에, 데베르의 입술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에게 매달리듯 안긴 베스의 가느다란 팔에도 힘이 실렸다.

더 참을 수 없는 정점의 순간, 데베르는 베스 위로 쓰러졌다. 땀으로 미끈한 몸이 틈 없이 맞춰졌다. 서로의 귓가로 가쁜 숨이 전해졌다.

“베스… 베스 제인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데베르는 그것조차 아까운 듯 제 입술을 가져갔다. 말간 눈물을 그는 몇 번이고 훔쳐냈다.

겨울밤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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